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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웃음소리 May 19. 2023

뭐해요?_ [3]

주인집 사장님 내외와 우리 부부, 그리고 뒷집 군인부부는 편한 마음으로 가끔 맥주를 한 잔씩 하는 사이가 되었다.



주로 그녀가 "뭐해요?" 하며 전화를 걸어 맥주 한잔을 제안했다. 초등 아들 둘을 두고 평일 저녁에 누군가를 집으로 초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 말이다. 우리 집의 경우 이웃을 초대할 수 있는 상태로 집을 세팅하려면 최소한 한 시간 정도의 숨 가쁜 정리가 필요하기도 했다. 내가 가는 편이 여러모로 수월했다.



고맙게도 아이들이 협조를 잘해주었다. 우리의 맥주타임은 보통 6시나 7시경에 시작되곤 했다. 아이들에게 저녁을 차려주며 밥을 먹고 해야 할 공부를 하고 나서 씻고 있으면 엄마 아빠가 돌아오겠다고 잘 얘기한 후 뒷집으로 출동했다. 아직 겁이 많은 첫째는 바로 뒷집에 엄마가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는지, 깜깜한 밤에 동생과 둘이서 집에 잘 있어 주었다. 9시가 넘어가면 아이들이 전화를 걸어왔다. 집으로 돌아가면 아이들이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내고 침대에 누워서는 빙그레 웃으며 나를 반기거나 킥킥거리며 침대 옆에 숨어있곤 했다. 그때마다 아이들에게 폭풍 칭찬을 쏟아내었다. 진심으로 고마워서 말이다. 저녁시간에 부부동반으로 맥주타임을 가지는 건 제주에 오기 전에는 상상도 못 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폭풍 칭찬 덕분이었는지, 아이들은 우리가 맥주타임을 가지는 날이면 평소보다 더 착실하게 할 일을 해내어 주었다.










늘 예고 없이 갑자기 맥주타임을 가지게 되었기에 집에서 가져갈 게 마땅찮을 때는 그녀의 집에 빈손으로 가는 날도 있었다. 어떤 날은 냉장고에 남아 있는 350ml 맥주 한 캔만 가지고 그녀의 집으로 출동하기도 했다. 작년 마지막날, 마트에서 산 소박한 선물과 함께 짤막한 글로 감사의 마음을 꾹꾹 눌러 담은 조그마한 카드를 그녀에게 전달하였다. 그녀는 나의 카드를 받고는 손편지 받았다며 소녀처럼 기뻐해주었다. 주는 기쁨이 이런 거구나 하고 느껴질 만큼 크게 감동하는 그녀 덕분에, 함박눈이 내리는 새하얀 겨울날에 내 마음속에는 때 이른 분홍 벚꽃이 만개하였다.



2023년 1월 22일 설날. 집에서 가족끼리 단촐하게 차례를 지내고 난 후, 갈 곳이 없었던 나는 그녀의 집에서 맥주타임이 아닌 커피타임을 가지게 되었다. 카페인에 초 예민한 바리스타 우리 삼식씨가 내려준 커피를 마셔보고 싶다던 그녀가 떠올라 삼식씨에게 커피를 부탁했다. 그녀의 집에 오전에 방문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녀와 둘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커피를 홀짝거리던 나는 맥락도 없이 그만, 울어버렸다. 나이가 들면서 전에 없던 눈물버튼이 여러 개 생기기는 했지만, 당황할 정도로 예고도 없이 흘러버린 눈물이었다. 씩씩하게 짐까지 다 싸들고 이사를 감행하며 내려온 제주인데,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기로 결정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못내 아쉬웠던가보다. 두려운 마음에 이래저래 못 할 이유들만 만들어 내며 머뭇거리다가 제대로 된 도전을 해보지도 못했으니 말이다. 아이들에게 좋은 경험을 남겨준 것이 아니라 잦은 전학으로 인해 혼란만 주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내 마음속이 편치 않은 날들이었다.



내 이야기를 듣던 그녀의 눈에도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다른 날보다 더 활기차게 보내야 할 새해 첫날 아침에 하필 울적한 얘기를 꺼낸 것도 모자라 눈물까지 보인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 집으로 돌아와 그녀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사람은 누구나 힘들어요. 얘기할 사람이 필요하죠. 저도 가끔 푸념하고 싶지만, 친언니들에게도 얘기 못할 때가 많아요. 가끔 푸념하듯 얘기해요. 나이 조금 많은 언니로서 들어줄게요."



잠시 후 그녀가 답장을 보내왔다. 새해 선물처럼 따스한. 분명 푸념하듯 얘기하라고 했는데, 나도 쉽게 푸념하지 않고 씩씩하게 지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드는 신기한 메시지였다.



화려한 외모의 그녀는 그저 화려하기만 한 사모님은 아니었다. 강단 있고 당차지만, 힘든 상황에서도 순수하고 소녀 같은 모습을 기어이 지켜 낸 속 깊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좁디좁은 내 인간관계에 새로운 인물이 뚜벅뚜벅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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