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전 나의 소울메이트였던 S와 함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북카페가 있었다. ( 잔잔한 음악과 푹신한 소파가 좋았다. 카페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책을 매우 신중하게 고르는 내 모습이, 내 마음에 쏙 들기도 했다. 당시 나는 책을 잘 읽지 않았다. 신중하게 고르기만 했다. 서로의 근황 토크를 끝낸 후 친구가 책을 읽으면, 나는 책을 몇 줄 읽다가 스르르 잠이 들곤 했으니 말이다. ) 나는 S에게 나이 들어서 이런 북카페를 운영하면 정말 좋겠다고 말하곤 했다. 돈을 좇는다기 보다는 여유롭고 우아한 카페지기가 되고 싶다는 철없는 소망도 덧붙였다.
우리 남편은 결혼 초부터 펜션을 운영해보고 싶다고 했다. 바다 가까운 남해에서 펜션도 운영하고 낚시도 마음껏 하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왜 하필 남해야. 나랑 같이 가보지도 않은 곳인데. 전여친이랑 무슨 추억이라도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뭐 배울 수 있는 문화센터도 근처에 있어야 하고 커피숍도 있어야 해서 남해 별로 안 좋으니까 혼자 가서 살라며 눈을 흘기곤 했다. 연애기간도 길지 않았는 데다, 신혼이었으니 말이다.
결혼 13년 차. 우리는 제주에 있다. 남해는 아니지만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마음만 먹으면 낚시를 하러 나갈 수 있고, 시골이라서 문화센터는 없지만 일 이십 분 정도만 차를 몰고 나가면 정말 다양한 컨셉의 카페들이 즐비한 곳에 살고 있다. 우리의 소망이 벌써 50퍼센트 정도는 이루어진 셈인 건가.
제주에 온 지 두 달 여가 지났을 때쯤이었으려나. (제주에 온지 벌써 9개월이 되었다. )오름 정복을 하느라 정신없이 지내던 남편과 나는 펜션청소알바를 찾기 시작했다. 감미로운 음악이 흐르는 아담한 커피숍이 딸린 갬성돋는 펜션의 펜션지기를 꿈꾸며, 우리 부부는 펜션청소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돈이 없으니 당장 펜션을 차릴 수는 없고, 경험이 없으니 경험을 쌓아보자는 취지였다. 사실은 육아휴직급여로만 살기에는 생활비가 궁하기도 했다. 하지만 펜션 청소를 하는 이유가 단지 '돈' 이라고만 생각하면 힘이 날 것 같지 않으니, 경험을 쌓기 위한 것이라고 나에게 그리고 남편에게 계속 주문을 걸었다. 아이들에게도 당당하게 얘기했다.
알바를 검색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우리에게 딱 알맞은 곳을 발견했다. 집에서 많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독채 펜션. 펜션 메이드 2명을 구하며, 일당은 인당 6만 원이었다. 초보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문구에 우리는 용기를 내었다.
사장님과의 연락은 내 담당이었다. 사장님께 살포시 문자를 보내어 보았다. 사장님은 서울에 계신다고 했다. 우리는 바로 합격통보를 받았다. 면접을 보지도 않았는데, 문자 몇 번 주고받았을 뿐인데. 어리둥절했다. 막연하게 펜션청소 아르바이트를 하자고 생각은 했지만, 구직활동을 하자마자 바로 취직을 하게 되다니.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된 것 같은데. 사장님이 며칠 후에 제주에 올 일이 있으니 그때 얼굴을 보자고 하셨다.
사장님을 뵙기도 전에 펜션 청소 하는 법부터 배우게 됐다. 원래 청소 담당하시던 분들이 청소를 하실 때 시간에 맞춰 펜션에 방문해 보기로 약속을 잡았다.
그간 오름 정복을 다니면서도 늘 무언가를 해야 할 텐데 하며 마음한켠이 무거웠던 우리인데, 막상 새로운 일을 하게 되니 싱숭생숭 마음에 잔잔한 파도가 일렁였다.
안개가 자욱한 날 오름에 오른 적이 있다. 멀리서 볼 때는 안개가 너무나 자욱해서 안갯속으로 들어가면 꼭 길을 잃을 것만 같아서 두려웠는데, 막상 안갯속으로 들어가니 눈앞이 선명하게 잘 보여서 안도했던 기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