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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겨움 Dec 22. 2019

내 마음에 병이 있을지도 몰라.

8만원을 내고, 마음 진단을 받다.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지만 사실은 내가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고, 밝은 척하느라 애쓰고 있으며, 깊은 마음의 병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늘 있었다.


그래서 8만원이나 하는,

그래서 더 전문적으로 보였던 심리진단을 신청했다.

‘내 마음 보고서’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신청을 하면 흡사 문제집같이 두꺼운 문제지가 집으로 배송된다. 그 문제들을 솔직하게 적고 기록해서 회사로 보내면 전문가들이 내 답안을 보고 마음을 진단해서 한 권의 책으로 보내주는 서비스였다.


진단의 첫 장에는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사건을 3가지 적으라는 요구가 있었다.


보자,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사건은 뭐가 있을까?


첫 번째. 아빠가 뇌경색으로 쓰러졌던 28살

두 번째, 엄마가 친엄마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10살

세 번째, 키워주신 엄마가 아빠와 몰래 혼인신고를 해서 혼인무효소송을 진행했던 2년의 시간


쓰고 보니 이건 뭐, 영화 소재가 따로 없다.

두려움이 사실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어느 누가 저런 사건을 겪은 나를 정상으로 여겨준다는 말인가!


좀 더 완화해서 다른 사건들로 바꿀까, 잠깐 고민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진짜 마음이 문제가 있는 건지 그것을 알기 위해서 시작한 진단이 아니던가!


다음 장으로 진단을 넘겼다.

나무를 그리라는 질문이 있었다.

성심성의껏 나무를 그렸다.


그리고 이어진 질문들과 문장 완성하기 섹션들.


문장 완성하기는 무의식적으로 내재된 나의 생각들을 알기 위한 것으로 보여졌는데 예를 들면 ‘남자는 내게 ———————-존재다’라고 적힌 가운데를 채우는 형태다.


문장을 채우고 보니 이게 또 비극인 거라.....

남자는 내게 ‘손을 들어 때리면 맞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존재다.


이런 답을 쓰다니...


정겨움님은 마음이 심하게 아프십니다.

이렇게 진단이 오면 어쩌지?


우씨. 병원까지 가 볼 용기는 없는데....

내가 쓴 답변을 읽어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끝까지 솔직하게 답을 적은 후,

회사로 답안지를 보냈다.


2주 후에 ‘내 마음 보고서’ 책이 배달되어 왔다.

자... 결과지를 보자.

진짜 병이 있는지, 없는지!



책을 한 장 넘기자,

총체적인 진단의 결과로 

나를 평가하는 한 문장의 글귀가 보였다.



푸른 물결 찰랑이는, 정겨움



심리 결과엔 와 닿는 문구들이 많았다.


-자신만의 원칙과 신념이 강한 사람

-자신을 통제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

-카멜레온처럼 행동하기보다는 스스로 화가가 되어 주변의 색을 자신에게 맞게 변화시키려 함

-감정을 ‘조화롭지 못할뿐더러 혼돈을 유발하는 무엇’으로 여겨 감정을 지나치게 통제함



특히나 감정에 대한 부분이 마음을 훅 쳤다. 지난날 가족 등 사적으로 매우 친밀한 관계에서 감정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고 억제해야만 했던 경험이 있어 이런 패턴이 강화된 것이라는 말이었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좋은 쪽으로 승화시키려 애쓴단다. 긍정적인 감정은 표현할 줄 알지만 부정적인 감정을 강하게 통제하는 패턴.


생각해보면 모든 갈등의 상황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식당에서 누가 소리를 지르면 밥도 제대로 삼키지 못했고, 화가 나도 항상 이성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면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 자체에 대한 두드러기가 있었던 것 같다.


내 마음 진단 보고서를 받은 지 

5년의 시간이 지났다.


여전히 난 화가 나도 차분히 감정을 설명하는 것을 선호하며, 상대방의 부정적인 날것의 감정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오늘 우연히 책장을 정리하다 한 켠에 고이 모셔두었던 ‘내 마음 보고서’를 봤다. 그때는 볼 수 없었던 그림이 하나 눈에 보인다. 내가 그려서 보낸 나무다.


세상에!

나무를 그리라고 했더니 거기에 열매도 그리고 살아 숨 쉬는 새도 그리고, 둥지도 그렸구나.


‘다행이다’는 생각을 했다.


항상 내 편이 되어 준 사람들이 있어서

그 스펙터클한 삶 속에서 난 따사롭게 자랄 수 있었구나.


내 주변 같은, 삶의 모습 같은

나무 한그루 그림에 

많은 안도감과 감사함이 드는 밤이다.



내가 그린 ‘따듯한’ 나무. 내 주변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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