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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겨움 Jul 06. 2020

영국 홈스테이 집

처음으로 느껴본 진짜 ‘집’이었다.

어색했다. 영국 히드로 공항에 도착해서 홈스테이를 할 집으로 가는 시간 내내 후회가 밀려들었다. 일 년 동안 중국에서 어학연수를 하면서 이제야 겨우 중국에서 비비고 살만 했는데, 영어를 배워보겠다고 또다시 이 낯선 땅에 온 게 잘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봤지만 돌아갈 핑계는 없었다. 비행기 값은 이미 백만 원 넘게 지불했고, 중국 어학연수와 마찬가지로 보란 듯이 새로운 언어를 배워서 부모님에게 자랑스러운 딸이 되어야 했다.

홈스테이 집은 이층이었다. 1층엔  부엌과 거실이 있었고, 2층에 내 방과 할아버지(george), 할머니(patsy) 방이 있었다. “여기가 네 방이야”라고 George가 방문을 열었을 때, 도착하기까지 들었던 잡생각이 사라졌다. 그곳은 내가 꿈꾸던 공간이었다.

방문을 열면 바로 맞은편에 벽을 다 채우는 투명한 큰 창이 있었고, 그 속에는 ‘빨간 머리 앤’에서나 나올 법한 커다란 아름드리나무가 웅장하게 손을 뻗고 있었다. 가장 날 매료시킨 건 사랑스러운 연보라색으로 도배된 벽이었다. 어스름한 새벽 해가 얼굴을 비추기 전, ‘나 이제 나온다. 나온다고!’라고 말할 때쯤의 빛깔. 무릎에 든 멍보다는 훨씬 명랑한 보라색이었다. 거기에 하얀 장롱과 하얀 책상, 그리고 내 몸이 쏙 들어갈 수 있는 사이즈의 침대까지, 완벽했다.

아침 7시, 1층에서 아침식사 준비를 마친 george가 이름을 부른다. “wake up!” 익숙한  목소리에 깨면 후다닥 계단을 내려가 토스트와 오렌지 주스를 먹고, 학원에 갈 채비를 한 후 집을 나선다. 수업이 끝나면 2시 넘어 집에 도착. 가장 먼저 책상에 앉아 숙제를 한다. 오후 5시경, patsy가 현관문을 열고 돌아온 소리에 저녁 준비가 곧 시작됨을 짐작할 수 있다. 1층으로 내려가 저녁 준비를 돕고 그 날의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긴 식사를 한다. 홈스테이 식구들은 항상 저녁 식사에 와인을 한 병 곁들였는데 나는 그 집에 머무른 동양인 최초로 와인을 같이 마시는 여자아이 었다. 식사를 마치면 남은 와인잔을 들고 patsy는 소파로 이동해서 작고 여린 몸을 소파에 기댄 채로 ‘셜록 홈즈 시리즈’를 보다 예외 없이 잠에 든다. 반대편 소파에 앉아 셜롬 홈즈를 알아듣겠다며 노려보다 잠든 patsy를 깨워 올려 보낸다.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와 침대 옆의 라디오를 켜고 창 밖 반대편의 불 켜진 집들을 바라본다. 라디오 DJ의 영어는 너무 빨라서 알아듣기가 힘들지만 그래도 영어로 라디오를 듣는 내가 대견해서 매일 켜 놓고 잠이 들었다.

동그란 원으로 그려진 생활계획표를 갖고 사는 사람들처럼 홈스테이 식구들은 모든 게 정확했다. 냉장고도 야채칸, 소고기 칸, 닭고기 칸까지 정해져 있었는데 항상 모든 음식들이 뒤죽박죽 엉켜있던 한국의 집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모든 일상은 예측 가능했다. 이 주에 한 번씩 내 방 침대 이불은 햇볕에 바짝 말린 숨을 쉬며 세탁이 되어 있었고, 주말에 어떤 저녁식사를 할 지도 월요일에 미리 정해져 있었다. 즉흥적인 것은 없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바구니 안의 사탕 브랜드가 늘 같았던 것처럼 예측 가능한 일상이었다.

그토록 정갈하고 명확한 일상은 난생처음이었다. 20평 남짓한 그 집, 그 안의 내 방은 안정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난 그곳을 사랑했다. 공간이 주는 느슨함에 살이 찌는 기분이었다.

한국에서 살던 집은 60평이 넘었다. 사람들에게 “00 살아요”라고 하면 다 아는 유명한 고급 아파트였다. 처음 친구가 놀러 오면 거실이 너무 커서 나가는 현관을 찾지 못할 정도의 으리으리한 집. 모두가 부러워했던 공간이었지만, 살림살이는 정해진 날짜 없이 부서져 나갔고, 나는 학교에서 자습을 하다가도 아빠로부터 엄마를 지키기 위해 삼선 슬리퍼를 신은 채로 달려와 핏기 가신 얼굴로 현관문을 열었다. 집은 내게 그런 공간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아프게 하는 것을 힘없이 바라봐야 했던 공간. 날숨과 들숨을 들이마시고 내뿜을 여유조차 없어 헐떡대며 연명해야 했던 곳.

내게 처음으로 안도감을 느끼게 해 주었던 ‘영국 집’. 부부가 투닥대며 살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내게 보여줘서 고맙다고, 그 집에서의 마지막 식사 때 기어이 눈물을 보이며 말했다. 샬라 샬라~ 늘어난 내 영어 실력에 부모님은 자랑스러워했다. 그로부터 15년은 지난 지금, 영어는 몽땅 잊어버렸지만 그 집이 줬던 안도감은 아직도 심장 어느 귀퉁이에 살아 있다. 난 더 이상 비혼주의자가 아니게 되었다. 아늑함과 안도감을 주는 공간을 나도 가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안고 살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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