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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겨움 Jan 22. 2020

너그러운 사람

목구멍에 탁 막혀 넘어가지 않는 말들을 마주할 때

말에 예민한 편이다.

아니, 예민하다.


말에 예민하다는 건 사는 데 피곤한 일이다. 상대방의 의도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상대가 왜 그따위로 말했는가를 곱씹다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때 그렇게 말한 거.. 왜 그런 거야?"


당황하는 눈치다. 그렇게 자신이 말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내뱉은 문장을 정확히 기억하며 사는 사람이 있던가! 별생각 없이 뱉은 말, 농담이었는데 진지하게 쳐다보는 내 눈빛이 부담스러운 게 분명하다. 얼레방 둘레방 둘러대는 상대에게 나는 다시 묻는다.


"도대체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뭐야?"


정확하게 나는 사안을 파악하고 싶은 것뿐인데 처음부터 의도가 없었던 사건이니 명쾌하게 해결된 적이 없다. 어떤 친구는 이런 내 성격을 '꼭 상대가 배를 까 보이면서 졌다고 항복해야 용서해 주는 성질머리'라며 탓했다. 그래.. 안다. 내가 글을 쓰면서도 피곤하다. 숨통까지 턱턱 막히는 기분이다. 어쩌다 나는 이렇게 숨 막히는 사람이 되었던가!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이라고 날 주변에서 칭찬해 줄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문제는 상대가 내 틀에서는 어긋난 단어를 구사하면 그 말들이 도무지 넘어가지지가 않는 것이다. '별 뜻 아닐 거야' '농담인데 뭘' 생각하면서도 결국엔 상대에게 왜 그런 말을 한 건지 묻고야 마는 집념!!!




몸살로 심하게 아팠던 날이었다. 몸을 일으키기 조차도 힘들 만큼 열이 심하게 났던 날이었지만 오랜 친구와의 약속이 있어서 그때 만나던 남자 친구와 함께 친구를 만나러 커피숍에 나갔다. 몇일만에 나를 본 남자 친구는 핏기가 가신 내 얼굴을 보고 말했다.


"얼굴이 엄청 하얗네? 혹시 아픈 코스프레 하는 거 아냐?"


그 말은 100% 농담이었다. 같이 웃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는 내내 그 말이 귓가에 계속 맴돌다가.. 눈물이 핑 돌 지경으로 섭섭해지기 시작했다. 코스프레.. 코스프레.. 코스프레!!!!!라고? 단어를 곱씹을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그렇게 아픈 얼굴을 하고 나타났는데 어떻게 그런 단어가 생각날 수 있지? 코스프레할지도 모른다고 내심 생각한 건 아닐까? 그날 밤, 나는 심하게 다퉜고, 기어이 사과를 받아냈다.




아직도 그 일을 생각하면 그 사람이 지나쳤던 건지 내가 지나쳤던 건지 헷갈린다. 다시 생각해도 나라면 아픈 상대에게 코스프레 같은 농담은 하지 않을 것 같은데, 그게 농담인 줄 뻔히 알면서도 기어이 사과를 받아낸 나의 마음 또한 비좁다.


말에 유난히 상처를 잘 받는 이유가 뭔지 궁금해서 집었다가 인생 책이 된 '말그릇'이다. 말을 하는 화자에서 나아가 듣는 '청자'로서 갖출 그릇에 대해 이야기한 내용이 정말 인상 깊었다.


말하고 싶은 욕구를 다스리는 동시에 상대방의 말속에 숨어있는 여러 가지 의미를 파악하고, 그 안에 담긴 마음까지도 파악해 내는 것을 '듣기'라고 한다.   



상대가 표현하는 단어에 함몰될 것이 아니라 그가 말하는 저의를 정확히 파악하고, 오해하지 않을 수 있는 그릇을 가진 사람이고 싶다. 아픈 아빠를 보면서 "아이고 인생 헛살고 계시네요."라고 내뱉는 택시기사의 말에 분개하지 않고, "때리는 남자도 문제지만 맞는 여자도.. 맞을 만하니까 그런 거 아냐?"라고 낄낄거리며 말하는 처음 본 사람의 말에 호흡이 가빠지고 싶지 않다. (그렇게 반응하는 것 자체가 피곤하고, 그런 사람들에게 분개해 봤자..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다.)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들을 더 곁에 두고, 나의 듣는 그릇을 키워야지. 상처 줬던 말을 곱씹는 게 아니라 흐르는 시간에 흘려보낼 줄 아는 너그러움이 있는 사람이고 싶다.


듣는 데 난 아직도 많이 서툴다. 듣는 데 너그러움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하여 그 힘으로 주위를 따스하게 해 주고 싶다. 나로 인해 주변이 차갑거나 딱딱해지는 게 아니라, 언 마음을 녹여주고 보듬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


그런 넉넉함을 갖춘 그릇으로 성장하고 싶다.



당신이 아직 기억하고 있는 아픈 말도, 당신을 겨냥한 채 작정하고 내뱉은 말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설령 당신의 눈에 그렇게 보였더라도 말이다. 그들도 우리처럼 자신의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상태에서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있는 상처 많고 두려움 많은 존재들이다. 그들도 우리처럼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또는 사랑한다는 이유로 준비되지 않은 말들을 서둘러 꺼내는 존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투르고 또 한참 서투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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