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오늘도 손을 흔든다.
“아빠, 나 이제 서울 갈게.”
“벌써? 가... 지마”
“지금 가야 나도 주말에 쉬지. 가야 돼.”
“.... 으응.”
아빠는 오늘도 아쉬워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아빠 집에 도착한 지 한 시간 반 만이다. 아빠와 오래 있으면 언성이 높아지고 짜증을 부리게 된다. 12시가 땡 하면 마법이 풀리는 신데렐라처럼 ‘착한 딸’은 90분이 한계다. 마법이 풀리기 전에 재빨리 아빠 집을 나서야 한다.
오른손을 목발에 의지한 채 절뚝거리며 아빠는 현관문까지 나온다. “잘 가~ 전화해.” “응” 아빠의 볼에 뽀뽀를 쪽~ 한 후, 신발을 신고 허리를 일으키니 아빠는 벌써 뒤돌았다. 절뚝이며 어디론가 빠르게 걸어가는 뒷모습. 나도 질세라 현관문을 닫고 빌라를 나와 코너를 돈다. 역시나, 작은 방 창문 방충망 앞에서 아빠가 의기양양하게 기다리고 있다.
아빠는 방충망에 최대한 밀착한 채로 한쪽 손을 흔들면서 인사한다. 방충망에 흐려진 아빠의 표정이 웃고 있는지를 확인한 후, 나 역시 손을 흔든다. 입술에 손을 갖다 댄 후 ‘휘익~‘ 날려주면 아빠도 데칼코마니처럼 따라 한다. 그 모습은 항상 날 미소 짓게 만든다.
“아빠, 나 진짜 간다.”
쩌렁쩌렁 울리게 소리치면 아빠는 손을 격하게 흔들기 시작한다. 마지막 인사임을 아는 것이다. 뒤돌아 아빠가 날 더 이상 볼 수 없는 길가로 재빨리 몸을 돌린다. 내가 보이지 않아야 아빠가 사라지는 것을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알게 되었다.
180cm가 넘는 건장한 체격으로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사업을 했던 아빠. 서구적인 외모에 중저음의 부드러운 목소리까지 지닌 매력적인 남자였던 아빠는 내 인생 가장 거대한 산 같은 사람이었다. 존재 자체가 위협적이고 두려운, 어두운 그림자로 가득 찬 산이었다. 당신으로 인해 너무 아프다고, 제발 그만해 달라고 애원해도 울어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하고 길바닥에 날 둔 채 가 버리기도 했다. 지울 수만 있다면 아빠를 내 인생에서 지우고, 도려내고 싶었다. 말솜씨가 화려했던 아빠가 “우리 딸 사랑해”라고 말하면 그놈의 사랑은 도대체 뭔지 의심스러웠던 시간들이 있었다. 건강했던 아빠가 말하는 사랑은 도무지 와 닿지 않았는데, 아프고 난 후 상황이 달라졌다.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 10년의 시간 동안 아빠는 늘 나를 배웅해줬다.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았던 2년은 엘리베이터 앞 또는 병원 정문에서 한쪽 손에 목발을 의지한 채로 내가 안 보일 때까지 서 있었다. 퇴원을 하고 집에서 지낸 8년 동안은 방충망 앞에서 딸을 배웅하고 있다.
방충망 너머, 오늘도 아빠는 손을 흔든다.
‘찰칵’, 눈으로 찍어둔다. 죽을 때까지 잊지 말아야지. 아빠가 날 이토록 사랑해줬던 모습들만 간직하고 살아야지. 아빠로 인해 힘들었던 시간들보다 행복했던 시간들을 더 많이 기억하고 남겨두며 살아야지. 그것만 기억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