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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살 May 07. 2020

잠, 네가 잠들어야만 존재하는 나의 삶

졸리면 자면 되지, 왜 잠들질 못하니

날카로운 울음에

잠이 부서지다.


졸음이 밀려온다. 두 눈두덩이가 내 온몸의 무게를 짊어진 듯 땅을 향해 덮이고 있다. 창 밖으로 들리던 얕은 소음마저 잔잔해지고 몽롱함이 몸과 정신을 뒤덮는다. 묵직한 잠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찰나, 평온함은 이내 깨지고 만다. 찢어질 듯한 너의 울음이 이유였다.  


새벽 한 시가 다가오고 있다. 기다렸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낸다. 그리고 너를 다그치기 시작한다. 단지 시계의 두 바늘이 만들어 내는 각도를 따라 가늠하는 ‘시간’이 무슨 의미 있겠냐 만은, 나에게 밤 12시는 일종의 허가를 내려준다. 엄마라면 응당 자식에게 늘 보여야 하는 따스함을 버려도 된다는 허가. 말하자면, 나의 잠을 이기지 못해 너에게 화를 외쳐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자기 용서가 가능해지는 셈이라고 할까.


“이제는 잘 시간이야”라는 객관적인 어조는

“제발 좀 자야 하지 않겠니”라는 간곡한 어조로 바뀌고,

심지어는 “좀 자라, 자”의 강력한 명령조가 되기도 한다.

물론 너는 아직 나의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지만.

 



잠들지 않는 너와

잠들 수 없는 나,

그리고 이미 잠들어 버린 그.


벌써 며칠째다. 한 밤 중에 일어나 아무런 이유 없이 울고 보채는 증상이 이어지고 있다. 매일 밤마다 한바탕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잠들려 하지 않는 너와, 네가 잠들어야만 ‘나’로서의 삶이 존재하는 나의 치열한 싸움. 낮과 밤의 구별 없이 넘치는 에너지로 나를 올라타는 너와는 달리 나는 시들어가고 있다. 젖을 물려봐도 안아 올려봐도 소용이 없었다. 너의 울음은 전혀 달래지지 않았다. 너를 낳기 전부터 구비해 두었던 두꺼운 육아 사전도, 모든 질문에 답을 내려 준다는 인터넷도 소용이 없었다. 그저 같은 고민을 안고 있는 이들이 남겨 놓은 경험담만 쌓여 있을 뿐이었다.


'밤에 하는 잠투정', '잠들기 전 우는 아이', '잠투정의 이유'를 검색해 보면 대답은 대충 이러했다.


기저귀를 갈아줘 보세요. 불편해서 그래요. (아니, 그것은 기초가 아닌가)

맘마를 먹여 보세요. 배가 고파서 그래요. (젖을 물리고 또 물렸지만 더 운다)


몇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 영아산통, 그것이 병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한 밤 중에 깨어난 아이의 소스라치는 울음에 정확한 원인은 밝혀져 있지 않았다. 누군가는 소화 기능의 미숙함, 정신적 스트레스를 원인으로 지목했지만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는 없었다. 거의 모든 문제에 명확한 원인과 해결책을 내려줄 것 같은 과학도 외면한 문제였다. 하지만 어떤 문제를 만나도 헤쳐나가는 이들이 있기 마련. 일부 똑똑한 엄마들은 다양한 수면교육을 체계적으로 시행해 혼자 놀다가 자는 아이의 이야기를 남겨 놓았고 나는 또 나의 모자람을 탓하며 잠투정하는 아이와의 사투로 복귀했다.


이럴 때 더 화가 나게 하는 것은 벌써 잠이 든 너의 아빠다. 박현욱의 <그 여자의 침대>에 의하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아무 생각 없이 일하다가, 아무 생각 없이 퇴근해서, 아무 생각 없이 티브이를 보다가, 아무 생각 없이 잠드는 게 샐러리맨의 웰빙이다. 박현욱의 <그 여자의 침대> 中


그러고 보면 그는 그저 자신의 웰빙을 실현하고 있는 불쌍한 샐러리맨일 뿐이다. 그러나, 너의 칭얼거림과 나의 한숨, 그것도 다분히 의도적으로 내쉬는 깊은 한숨 따위는 들리지도 않는지 코까지 골아 대는 남편에게 너의 몫의 미움까지 얹힌다. 그래 봤자 잠든 그의 뒷모습에 닿지도 않을 따가운 시선만을 보내는 게 전부지만 말이다.


모든 엄마의 고민

잠.잠.잠


육아 초기, 모든 엄마를 힘들게 하는 것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잠'이다. 그리하여 육아와 관련된 질문에 대한 대답도 잠과 직결되는 경우가 많다. 아이가 가장 예쁜 순간은 잠들어 있는 순간이며, 남편이 가장 얄미운 때는 술에 취해 들어와 바로 직전 간신히 재운 아이를 뽀뽀로 깨우는 때이다. 가장 순한 아이란, 홀로 등을 대고 잠들어 주는 아이이며, 백일의 기적은 백일이 지난 아이가 통잠을 자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을 일컫는다. 그러고도 아이 잠든 틈에 핸드폰으로 아이 사진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것은 백발 초보 엄마일 게다. 아이가 잠들어 있는 순간의 소중함을 모르는 것일 테니.


잠도 오지 않는데 옆에 누워서 아이가 잠들기만을 기대하는 것이 얼마나 고역인지 겪어보지 않은 이는 모른다. 아이가 자야만 할 수 있는, 잠들면 하고 싶은 나의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를 재우는 동안 머릿속에는 그 일들만 계속 맴돈다. 간신히 재운 아이를 눕히고 발 끝으로 살금살금 걸어 나오려는 순간, 또다시 아이가 칭얼거리기라도 하는 순간이면 짜증이 솟구쳐 오른다. 그러다가 어느 틈인지, 누가 먼저인지 알 수 없이 아이 곁에서 결국 잠들어 버린 나를 아침에 발견하는 때에는 머리카락을 뜯고 싶은 심정이다. 나만의 시간을 그깟 잠에 빼앗겨 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잠과 관련된 모든 어려움 중에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이들이 왜 스스로 잠들지 못하는가? 밤이 되면 유난히 잠투정이 심해지는가?이다. 이쯤 되면 잠들 때가 되었는데, 졸려하면서 눈을 감고는 계속 울어대는 아이를 아기띠에 안고 엉덩이를 팡팡 때려가며 매일 읊는 대사는 이런 것이다.  


"졸리면 자면 되잖아, 왜 잠을 못 자니"



잠을 자고 나면

내일이 온단다.


너는 아직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낯선 가보다. 이것이 내가 짐작하는 원인이었다.

그 원인은 육아서도 블로그도 아닌 어느 소설을 읽다가 찾아낸 것이었다.


아담이 지상에서 맞은 첫 밤. 자려고 누웠을 때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잠이 뭔지 몰랐으니까. 눈을 감고서 이 세상을 떠난다고 생각했겠지. 헌데 그게 아니었지. 다음 날 깨어 보니 새로운 세상이 있었던 거야. 그는 어제를 갖게 된 거지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 by 미치엘 봄 中


이제 삶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너는 ‘잠’이 낯설고 두려웠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안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또 다른 하루가 있음을. 하지만 너는 두려운 것은 아닐까. 갑자기 넓은 세상으로 내보내진 후, 찾아오는 어둠. 잠들어 버리고 나면 깨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본능적으로 죽음에 길들여지고 싶지 않은 너의 선택인 것은 아닐까. 한 때 '내일이 없는 것처럼' 술잔을 채우며 밤과 잠을 거부하던 나의 청춘처럼.


물론 이것은 도무지 잠들려 하지 않는 너를 받아들여 보기 위한 나의 짐작일 뿐이다. 그저 나는 생후 100일이 지나면 자연스레 잠투정은 사라진다는 답 하나만을 믿은 채 고통의 시간을 감내할 뿐이다.


아마도, 내일 밤이면 나는 너와 또 전쟁을 치러야 하리라. 어젯밤과 오늘 밤이 다르지 않았던 것처럼, 내일 밤도 이 힘겨운 싸움은 또 너와 나를 찾아올 것이다. 아무렴 어떻겠니. 오늘 밤의 너는 이제 잠이 들었으니.


새벽 2시, 간신히 잠이 든 너의 숨결에 나의 숨결을 더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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