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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스 Jan 03. 2024

포대기와 돌담길(11)

최고보다 최선을 다하고 싶은 육아

언젠가 ‘육아’라는 단어에 대해 검색 해 본 적이 있다.

‘육아’는 아이를 기른다는 뜻이고, ‘기르다’는 아이를 보살펴 키운다는 의미였다. ‘보살피다’는 정성을 기울여 돕는다는 말이었고, ‘정성’이란 온갖 힘을 다하려는 참되고 성실한 마음이다.

결국 ‘육아’란 진실된 마음으로 아이에게 잘 해준다는 정의로 나에게 와 닿았다. 나는 ‘열심히는 누구나 하는 것이며, 잘 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말을 가끔 되뇌인다. 일상생활에서도, 회사에서도, 누군가를 대할 때도, 그것이 비록 사람이 아닌 사물, 무형물일 때에도 나는 잘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러나 ‘육아’를 잘 하는 것이란 나에게 아직 스스로 확신이 들지 않는 일 인 것 같다.


‘육아’에는 그 영역 자체가 품고 있는 교집합이 많다. 단순히 아이에게만 집중하여 삶이 매몰될 것이 아니라, ‘육아’를 잘 하려면 살림도 꼼꼼히 살펴야 하고, 사회생활을 하는부모라면 더욱이 아이와 떨어져 있는 동안 내 자신의 영역을 지켜야 한다. 아이의 정서적이고 발달적인 부분을 또래보다 뒤처지게 하지 않으려면 공부에도 욕심을 내야 한다. 화목한 가정의 모습을 지속하기 위해 부부 사이에도 노력해야 하며, 현실적으로 금전적인 부분도 빼놓을 수 없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잘 챙기고 있나. 가끔씩 스스로 피드백을 하며 내가 놓친 부분이 없는지 살핀다. 오늘 아이가 몇 번을 깔깔거리며 웃었는지 행복도를 체크하고, 집안 곳곳에 먼지가 쌓이진 않았나 살림살이를 점검하고, 가계부를 작성하며 이번 달의 지출을 확인하는 등 내 자신이 ‘육아’의 달성도를 나름대로 수치화하며 살아오고 있다.


미혼이었을 때는 이 정도로 계획과 목표를 구체화하진 않았었다. 그때는 내가 세운 목표는 언제라도 나와 타협하며 단계를 낮출 수 있었고, 때로는 아예 삭제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의 잘못된 생각, 그릇된 행동 하나가 아이와 온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을 절실히 느끼고 있는 현재는 ‘육아’를 잘하기 위한 목표는 마치 정상이 보이지 않는 산을 오르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말은 나에겐 잘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정성을 다해 온 마음을 쏟아 부어 한 인간을 오롯이 장성할 때까지 키운다는 말은 ‘최선을 다한다.’와 동의어로 다가온다.

내 시야에 아직은 정상이 보이지 않지만 최선을 다해서 잘 해내면 언젠가는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기가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을 보게 되겠지. 그 과정에서 숨이 턱 끝까지차오르기도 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리고 싶을 때도 찾아올 것이며, 갑작스럽게 내린 비에 오도가도 못 할 상황도마주치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시련마다 그간 내가 살뜰히 살핀 살림살이나, 든든한 남편과, 또 아이의 웃음이 나에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느 것 하나 최선을 다하지 못 할 이유가 없다. 나에게 ‘최선’은 언제나 진행 중인 일이며 또한 언젠가 내가 나를 평가할 때 잘해냈다고 인정해주며 빼놓지 말아야 할 단어이다.


내일도 나는 이 ‘육아’에 최선을 다 할 것이다. ‘육아’의 최고봉에 이를 때까지 내 스스로를 잘 다독이며 아이와 남편과 그리고 내가 이루어온 모든 것들과 나란히 발 맞춰 나아갈 것이다. 나에게 ‘최선’이란 ‘육아’를 잘 해내기 위해 정상까지 같이 가야 할 ‘셰르파’같은 존재이다. 내가 스스로 ‘육아’를 잘 해내고 있다고 위로하고, 반성하고, 다짐할 때까지 내 근처에서 항상 머무르며 지침이 될 단어는 ‘최선’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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