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어깨 나의 무릎

16화

by 안스

남색 컨버스 앞코를 바닥에 툭툭 부딪히며 서호가 나오기를 기다리던 이진은 생각보다 빨리 대화를 마치고 서호가 가게밖으로 나오자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옅은 미소를 주고받으며 둘은 무언의 합의로 이진의 집을 향해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서호는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애써 입을 다물고 있었고,

반대로 이진은 대답할 것이 많았지만 차분히 뜸을 들이고 있었다.


이진의 집으로 향하는 15분 남짓한 짧은 시간 속 그렇다할 대화랄 것은 오고가진 않았지만, 둘 사이에 채워진 온도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을 정도로 적당하게 데워지고 있었다.


저멀리 이진의 낡은 셋집이 보이자 그녀는 천천히 걷던 속도를 늦추었다. 이진의 걸음 속도에 맞추어 따라 걷던 서호의 보폭도 점점 느려졌다.


무슨 일이냐는 듯 서호가 이진을 돌아다보자, 이진은 입술을 달싹이며 조금 머뭇거리다가 이내 그를 향해 어색한 눈빛을 올려보냈다.


“…내일 뭐해?”

“내일? 토요일? 뭐 없는데. 왜?”

“그럼 내일 내가 팥빙수 사줄게 나올래? 오늘 너가 밥 사준것도 고맙고 내가 또 팥빙수를 좋아하거든. 근데 혼자 먹기엔 양이 좀 많아서….”


주절주절 서두없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이진의 표정이 귀여웠는지 서호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드디어 알아냈네.”

“…?”

“윤이진이 좋아하는거 하나 드디어 알아냈다고. 팥빙수 먹으러가자 내일.”


아무렇지 않게 덧붙이며 서호는 이진을 향해 눈을 찡긋하고는 그대로 뒤를 돌아 걸어온 골목으로 사라졌다.


눈을 꿈벅거리며 서호가 사라진 길 끝을 잠깐 멍하니 쳐다보던 이진은 점점 얼굴에 열감이 오르자 황급히 두 뺨에 손을 올리며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몇 분 후,

집까지 단숨에 뛰어왔는지 가쁜 숨을 내쉬며 현관으로 들어서는 서호를 향해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있던 서정이 고개를 돌리며 알은체했다.


“너 왜 뛰어와? 급한 일있냐?”

“응. 급하지. 시간이 없어.”

“무슨 일인데.”

어깨에 둘러멘 크로스백을 한번에 벗어제낀 서호가 누나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방안으로 부리나케 뛰어들어갔다.


“좋아하는 애가 뭘 좋아하는지 알아냈거든. 드디어.”





다음 날 점심 즈음.

단조로운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을 한 이진은 시내의 어느 카페 앞에서 서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옷들 중 그나마 유행을 타지 않는 차림새였다.

멀리 버스정류장을 지나가는 버스들을 쳐다보고있던 이진은 그 방향에서 이내 자신을 발견하고 환하게 웃으며 뛰어오는 서호를 발견했다.


교복 차림이 아닌 하얀 셔츠에 연한 청바지를 입은 서호는 언뜻봐도 고등학생처럼 보이지 않았고, 이런 모습으로 만나니 꽤 새롭게 느껴졌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 나도 금방왔어. 들어갈까?”


자신이 계산하겠다며 서호는 지갑을 꺼내들었지만, 그럴순 없다며 박박 우겨대는 이진의 성화에 못이겨 서호는 입술을 삐죽 앞으로 내밀며 테이블에 앉았다.

계산을 마치고 테이블로 다가온 이진이 낡은 갈색 가죽지갑을 가방에 넣으며 서호를 매섭게 쳐다보았다.


“분명히 내가 산다고 했잖아. 이러면 반칙이야.”

“알겠어. 잘 먹을게.”


잠시 후 둘이 앉은 테이블 위에 얹어진 팥빙수는 누가봐도 혼자 먹기엔 양이 좀 부담스러울 정도로 팥과 우유얼음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숟가락을 들어 조심스럽게 단팥과 얼음을 긁어 입안으로 가져간 이진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서호의 얼굴에도 생긋한 웃음이 지어졌다.


“윤이진 너 팥빙수 진짜 좋아하는구나.”

“응. 예전에 엄마랑 자주 먹었었어.”


순간 이진의 입에서 튀어나온 ‘엄마’라는 단어를 듣자, 서호는 자신도 모르게 눈가를 들어 이진의 표정을 살폈다. 정작 이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은색 숟가락 끝으로 조심스럽게 커다란 그릇 위의 얼음산을 긁어가며 집중하고 있었다.


“…좀 괜찮아?”


서호의 낮은 목소리를 타고 나오는 조심스러운 물음에 이진은 달콤한 우유얼음을 목구멍으로 삼키고 손가락으로 입가를 매만졌다. 잠깐 테이블 어딘가를 멍하니 쳐다보던 이진이 두 눈을 꿈벅이더니 숟가락을 집어들며 그릇 안을 가볍게 내저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시원한 바람이 왈칵 쏟아지는 에어컨 바람에도 어쩔수없이 이진과 서호 가운데 놓인 팥빙수는 어느새 녹기시작했고 허여멀건한 우유가 그릇 위를 둥둥 잠식하고 있었다.


“어느샌가부터 나는 엄마가 없는 아이라고 생각하는게 맘이 편해졌어. 그럼 좀 억울한 마음이 덜했거든. 엄마가 나를 안 찾는게 아니라, 나를 이모한테 버린게 아니라 나는 그냥 원래부터 엄마가 없는 사람이었다고.”

“….”

“근데 또 막상 생각해보니까 웃기더라구. 세상에 엄마없는 애가 어딨어. 그냥 나는 그 존재를 잊고 싶었던 거야. 아직 괜찮은지는 잘 모르겠어. 잊고싶었던 존재를 이제 진짜 잊어야하거든.”

“….”


가만히 자신의 말을 듣고있는 서호를 한번 넌지시 바라본 이진이 비밀이야기를 하려는 것처럼 목소리를 조금 더 낮추었다.


“내가 뭐하나 말해줄까? 옛날부터 엄마는 종종 나를 외할머니 댁에 두고 가곤 했어. 방학때면 할머니댁가는 수준이 아니라 아빠라는 사람이 또 행패를 부리면 나를 외할머니한테 숨겨놓고 가곤했어. 짧으면 이틀정도, 길면 거의 한달 정도.”


이진은 그릇 속 점점 차오르는 녹은 우유에는 정작 관심이 없다는 듯 멍하니 눈빛을 흘려보내며 말을 이었다. 서호는 가만히 테이블 위에 한쪽 팔로 턱을 괸채 이진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때 외할머니 마을 입구 버스정류장 맞은편에 커다란 2층 양옥집이 있었어. 그 마을에서 제일 멋지고 으리으리했던 집이었거든. 정류장에 앉아서 하염없이 엄마를 기다리던 어느날 내 눈에 들어온거야.”

“….”


“그 집 담벼락을 타고 핀 능소화가.”


서호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추억의 한 모서리를 설명하는 이진의 목소리는 마치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해묵은 사연을 읽어주는 듯 단조로웠다.


“금방 온다던 엄마를 오늘은 올까, 저 버스를 타고 올까 싶어서 매일같이 정류장에 앉아있던 내 곁에 그나마 같이 있어주었던 것이 그 집 능소화였어. 한 번은 담에 핀 능소화 꽃봉오리를 전부다 세어보기도하고, 한번씩 만져보기도하고 그러면서 시간을 떼웠지.”

이진은 숟가락을 들어 녹아버린 빙수 속 우유를 담아 입가로 가져갔다.


“그때부터 매년 여름즈음에 외할머니댁에 갈때면 그 집 능소화랑 같이 엄마를 기다렸어. 여름은 유독 해가 기니까 겨울보단 하루가 늦게가는 것 같아서 좀 지루했거든.”

“….”

“마침내 이십 몇일만에 엄마가 날 데리러 왔을 때, 엄마 손을 잡고 능소화가 핀 담벼락으로 갔어. 이것 좀 보라고 땀을 뻘뻘 흘리며 말하는 날보고 엄마는 이 꽃이 나처럼 환하다고 말해줬었어.”

“….”

“정작 나는 그 꽃들이 반갑지가 않았는데 말이야. 내 인생은 이렇게 어두컴컴한데 주황색 그 꽃은 너무 눈부셨거든. 하루빨리 꽃봉오리들이 다 떨어져버렸으면하고 나쁜 마음 먹을 때가 많았어. 막상 말해놓고 나니까 너무 우울한 이야기네. 나름 능소화에 얽힌 추억이었는데. 그치?”


아무 의미없이 빙수 그릇을 휘휘 내젓는 이진의 숟가락 끝에 새빨간 젤리하나가 올려진 것은 그때였다.


이진은 동공이 잠깐 커지며 눈커풀을 들어 서호를 올려보았다.

옅은 미소를 지으며 서호는 시선을 내린채 녹아버린 우유얼음이 찰랑거리는 그릇 아래에 가라앉아있던 젤리들을 건져내 이진의 숟가락위에 하나씩 올려주었다.


텅 비어있던 이진의 은색 숟가락위에 어느새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의 사각형 싸구려 젤리들이 주사위처럼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서호가 그 위에 주황색 젤리를 톡, 하고 올려주며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너는 지금 선글라스같은 걸 쓰고 있는거라고 생각해. 너에게 내리쬐는 햇빛이 너무 쨍해서.”

“….”


서호는 이진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은채 계속 숟가락으로 빙수 그릇 바닥을 휘저으며 젤리를 찾아 그녀의 숟가락위에 수북히 쌓아가고 있었다.

그저 서호의 목소리를 듣고있는 이진은 무거울 리가 없는데도 작은 빙수 숟가락을 쥐고있는 이진의 손끝이 알게모르게 점점 떨려왔다.


“사랑받고 있어 너는. 언젠가 네가 그 선글라스를 벗을 용기가 생기는 날에는 너도 알게될거야.”


젤리를 찾아헤매던 서호의 숟가락이 한가득 젤리가올려진 이진의 숟가락 끝을 팅,하고 건드렸다. 서호는 턱을 괴고있던 고개를 들어 그녀의 까만 눈동자를 맞추며 덧붙였다.


“세상이 이렇게 알록달록하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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