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서호는 한참을 찾아다닌 끝에야 운동장 한 구석 계단참에 앉아있는 이진을 발견했다. 반투명한 아케이드 아래 계단에 걸터앉아 비스듬히 걸터앉은 채 두 눈을 감고 앉아있는 이진은 얼핏 잠이 든 것처럼 보였다.
체육대회가 끝나자마자 아이들이 학교를 다 빠져나간 뒤라 왁자지껄했던 운동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한산해졌다. 이진을 향해 발걸음을 빠르게 움직이던 서호의 운동화가 순간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서호는 손을 들어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서 오케이 사인을 그려 그 안에 이진의 모습을 담았다. 반대편 눈을 감자 손가락 프레임 속 이진의 모습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마치 이진이 전학 온 첫날 교실 창문 밖으로 힘없이 걷던 그녀를 프레임 안에 담았던 그때처럼.
서호의 가느다란 숨소리가 희미하게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고, 이진은 여전히 두 눈을 살포시 감고서 요지부동으로 가만히 있었다. 서호의 입꼬리가 점점 위로 올라갔다. 처음 이진을 만났을 때는 참 걷는 게 희한하다고 느꼈고, 지금은 뛰는 것 빼고는 모든 것이 희한한 아이라고 서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때였다. 이진이 인상을 찡그리더니 이내 팔짱을 풀어 손을 허공에 휘저었다. 마치 서호가 만들어놓은 프레임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이. 순간적으로 실소가 튀어나오려던 입가를 다급하게 막으며 서호는 동그랗게 말아쥔 손을 물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희한하게 들어맞는 타이밍에 서호는 생경함을 느꼈다.
인기척을 느낀 이진이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시야에 곧장 서호가 들어왔다. 몇 미터 거리를 두고 둘은 잠깐동안 말없이 눈을 마주쳤다. 곧이어 이진이 서호를 향해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이어진 이진의 행동에 서호의 입가에 올려져 있던 미소는 점점 굳어졌다.
서호가 방금 했던 그대로, 이진은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아서 한쪽 눈을 찡그리고는 그 사이를 통해 서호를 보았다. 마치 서호가 자신에게 했던 행동을 다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처음 서호가 이진을 관찰했을 때는 멀리 교실 창문을 통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진이 알 수 없었고, 방금은 이진이 두 눈을 감고 있을 때라 그녀가 서호의 행동을 알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호의 행동을 복사하기라도 한 듯 따라 하는 그녀의 행동을 보자, 서호는 표정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우연의 일치라기엔 너무나도 희한한 상황에 서호는 얼음 주문에라도 걸린 것처럼 그 자리에 굳은 채 서있었다. 이진은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는 서호를 향해 손을 풀며 손짓했다.
서호는 아래로 내려져있던 자신의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있는 힘을 다해 꼭 힘주어 쥐었다. 그의 두 입술은 어느새 꾹 닫혀서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서호는 드디어 자신에게도 운명이라는 놈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가 걸음을 떼자 운동장 트랙과 부딪혀 그의 운동화 밑창에서 쓰윽쓰윽-하고 소리가 났다. 지금 그에게는 인적 없는 운동장에 울려 퍼지는 자신이 만들어낸 소음이 귓가에 무엇보다도 크게 울렸다.
이진을 향해 곧장 성큼성큼 다가간 서호는 의아해하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이진을 향해 대뜸 말을 내뱉었다.
“너 뭐 먹고 싶어?”
“응?”
“계주 때문에 너 긴장해서 점심도 제대로 못 먹었잖아. 배 안 고파?”
“아…. 그냥 괜찮은데.”
“뭐 먹고 싶어? 내가 다 사줄게.”
“갑자기?”
“그냥.”
서호는 목구멍에서 울컥하고 올라오는 이상한 감정을 꾹 눌러 삼켰다. 문득 이진에게서 어떤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떠올라서였을까. 일주일 사이에 더욱 마른 이진의 체구를 가까이하자 서호는 하얀 피부에 뛰어다니기를 좋아했던 한 꼬마아이를 기어코 기억에서 끄집어냈다.
“그냥. 이 세상에 있는 맛있는 거는 다 사주고 싶어. 뭐 먹으러 갈래? 말만 해.”
“….”
대뜸 밥 먹으러 가자는 서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와 눈높이를 맞추었고, 잠시 후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단 두 글자를 듣자마자 서호는 휘청거리지 않기 위해 두 다리에 있는 힘껏 힘을 주어야만 했다.
서혜야.
서혜야.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서호는 눈물을 비추지 않기 위해 속으로 어떤 이의 이름을 불렀다.
서혜야. 권서혜.
점심 장사가 다 끝나고 한산해진 가게 안을 치우고 있던 배영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익숙한 두 사람을 발견하자마자 허리를 곧추 세웠다.
“뭐냐.”
“아니, 이진이가 국수 먹고 싶대서.”
“국수?”
“어. 근데 내가 아는 국수 맛집이 여기밖에 없잖아.”
뻘쭘한 듯 뒤통수를 긁으며 서호는 빈 테이블에 가방을 풀었다. 서호의 옆에 서 있던 이진은 엉거주춤 그를 따라 옆 자리에 앉았다.
“뭐 여기가 국수 맛집이 맞긴한데. 윤이진 너 국수 좋아하냐?”
배영은 잔반그릇이 올려져 있던 핸드카를 주방으로 밀며 넌지시 물었고, 이진은 대답대신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고기국수는 안 먹어봤대. 기본으로 두 개만 줘.”
수저통에서 수저를 꺼내 이진의 앞에 내려놓으며 서호는 익숙한 듯 배영에게 말했다. 배영은 주방에 가서 무어라 말하는 듯하더니 이내 서호와 이진이 앉아있던 테이블로 걸어왔다.
“보나 마나 권서호가 사준다고 한 거 같은데 소고기나 초밥 이런 거 사달라고 하지. 하필이면 국수를 찾았냐 너는.”
밑반찬을 내려놓던 배영이 둘을 번갈아 쳐다보며 이진에게 물었다. 이진은 어색하게 가게 내부를 두리번거리며 대답했다.
“난 국수가 제일 좋아. 싸고 배부르고.”
“에휴. 그런 이유라면 더더욱 이런 맛에 정 들이면 안 되지.”
“너 여기서 아르바이트해?”
“어?”
이진의 질문에 당황한 배영이 미처 대답하지 못하고 멀뚱히 서있다 맞은편 의자에 걸터앉았다.
“여기 우리 아부지가 하는 가겐데.”
“아. 그래서 권서호가 여기로 오자고 한 거였거구나.”
“이 놈이야 단골을 가장한 무전취식자고.”
“야. 내가 언제 무전취식했어. 가끔 돈 내 거든?”
“그걸 무전취식이라고 하는 거야. 줄여서 외상이라고 하는 거고.”
배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둘을 향해 말을 이었다.
“오늘은 뭐 너네 둘이 계주 하느라 수고했으니까 내가 쏜다. 편하게 먹어.”
이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호를 바라보자 서호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배영이 커다란 그릇에 가득 담긴 국수 두 그릇과 수육 한 접시를 내어오자 이진은 허기를 드러내며 젓가락을 빠르게 움직였다.
“너무 맛있다. 나 이런 맛은 처음 봐.”
입을 오물거리며 겉절이에 젓가락을 가져다 대는 이진을 보며 배영은 조금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이 근방 국수는 우리 집이 최고거든.”
“너희 둘은 진짜 친한 친구구나.”
“얼레. 권서호랑 나랑?”
배영이 입을 떡 벌리며 이진의 말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이진은 앞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치우며 물 잔으로 손을 뻗었다.
“응. 너랑 권서호랑 학교에서도 매일 같이 다니고, 대화하는 거 보면 베스트 프렌드 같은데?”
“나랑 고배영 안 친해.”
서호도 배영에게 동조하며 젓가락으로 국수 그릇을 휘휘 저었다. 배영은 다리를 꼬며 이진을 향해 덧붙였다.
“야. 나랑 권서호는 베스트 프렌드가 아니고 원수에 가깝지.”
“원수?”
“그래. 우리는 외나무다리를 공유하는 원수거든.”
“….”
배영이 말을 끝내자마자 테이블 아래 서호의 발이 배영의 정강이를 빠르게 걷어찼다. 갑자기 날아든 발길질에 배영은 입 안으로 고통을 삼키며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고배영. 넌 가서 저녁 장사 준비나 해.”
“아 진짜 야 말로 하라고 말로.”
배영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얼른 주방으로 몸을 숨겼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배영의 뒷모습과 서호를 번갈아보던 이진이 서호를 향해 물었다.
“혹시 내가 말실수했어?”
“어 아니야 그런 거. 배영이 저 자식이 원래 좀 매를 버는 스타일이라서 그래.”
이진은 서호의 대답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더 이상 묻지 않고 다시 국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까만 뒤통수를 내려다보던 서호의 눈빛은 이상하리만치 숙연해져 있었다.
“잘 먹었습니다.”
그릇을 싹싹 비운 이진이 가게를 나서기 전 배영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하자 민망한 배영이 옆구리를 벅벅 긁었다.
“다음에 또 와. 우리 집은 한 번도 안 온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온 사람은 없거든.”
“아유. 또 입만 열면.”
“진짜 다음에 또 올게. 자주 올게.”
서호가 배영을 향해 눈치를 주자 이진이 재빨리 그의 말을 가로막고 배영에게 인사했다.
“권서호 너는 잠깐 나 좀 보자.”
이진을 따라 가게를 나가려던 서호를 붙잡은 배영이 그를 포스기 옆으로 데리고 갔다. 방금 전까지의 개구쟁이 같던 표정은 사라지고 배영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음 달에 엄마가 가게 좀 들리래.”
“이번에도 챙겨주시려고? 안 그러셔도 된다고 말씀드려 줘. 괜찮아.”
“울 엄마 맘은 또 안 그렇지. 그냥 받아 좀. 넉넉하게 식구들 먹을 꺼가지 챙길 테니까 꼭 들러.”
“알았어. 감사하다고 전해드려.”
“너 이제 좀 괜찮은 거냐?”
배영이 팔짱을 끼며 서호를 향해 물었다. 그의 물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다 안다는 눈빛으로 서호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글쎄.”
의뭉스러운 서호의 대답에 배영은 넌지시 그의 표정을 살폈다.
“나 너 그렇게 열심히 달리는 거 오랜만에 봤어. 윤이진 때문이냐?”
“….”
서호는 대답대신 가게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배영도 따라서 현관을 향해 고개를 쓱 돌리더니 다시 서호의 얼굴을 응시하며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뭐 이유가 어떻든 너만 괜찮아지면 나는 상관은 없는데. 쟤한테 투영하지 마.”
“….”
“권서호. 윤이진한테 권서혜 투영하지 말라고.”
배영의 입에서 기어코 서혜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서호는 배영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지 알아. 그리고 그럴 일 없어. 걱정 마.”
서호는 배영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괜스레 웃어 보였다.
딸랑, 종을 울리며 서호까지 가게를 나서자 둘이 사라진 현관을 마냥 바라보던 배영의 입에서 낮은 한숨과 함께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걱정이 안 되긴 개뿔. 벌써부터 걱정이 태산이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