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장르.
사람들은 각자의 ‘장르’를 살아간다.
누군가는 인생이 코미디일 수도 있겠고, 어떤 이는 액션을, 다른 이는 스릴러 혹은 로맨스를 살아간다.
인생을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전지적 작가 시점이 될 수도, 본인 인생이지만 관찰자의 시점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또 나의 희로애락으로 인해 인생의 BGM이 바뀌고, 누군가에겐 잊지 못할 명작으로 남기도하고, 보던 거라
어쩔 수 없이 정으로 본다는 주말드라마가 될 수도 있다.
내 인생의 장르는 2년 전까지는 쭉 ‘성장드라마’이었다. 스무살이 되면서 덜컥 제주도로 환경을 옮기고, 나는 나를 둘러싼 이 낯선 세계에서 무너지지 않고 열심히 살면서 성장하는 캐릭터였다. 학교 생활도 열심히 하고, 각종 아르바이트로 용돈 벌이도 하면서 부모님께는 든든하고 착실한 큰 딸의 역할을 했으며, 졸업 후에는 인턴생활과 취업준비라는 나름의 갈등을 거쳐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된, 보다 보면 결말까지 예상하게 되는 평범한 내용의 ‘성장드라마’가 나의 장르였다.
그때 어렴풋이 먼 훗날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키우는 내 미래를 상상하긴 했었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판타지’였다.
그러나 지금 결혼과 출산을 거친 후, 내 인생은 ‘액션 코미디물’로 바뀌었다. 출산의 고통은 나에겐 지난한 싸움이었고, 그 싸움이 끝나자 시작 된 육아에서 나는 관객의 시점으로 사라지고, 아이가 내 인생의 ‘주연’으로 바뀌어버린 ‘액션물’로 탈바꿈했다.
힘이 넘치는 우리 아들은 신생아 때부터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78일만에 뒤집기를 하여 본격적으로 몸을 쓰기 시작했으며, 돌이 지나고 걸어 다니기 시작할 무렵부턴 매일같이 나와 집안에서 추격전을 한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항상 ‘나’ 자신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이 조그만 ‘슈퍼히어로’는 나를 무대에서 밀어내고 본인이 제일 중요한 사람이라며 내 인생 곳곳을 헤집어 놓는다. 때로는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진이 빠지기도 하고, 어떨 때는 눈물, 콧물 빼놓을 정도로 감동을 주기도 한다. 날 보며 웃으며 안길 때는 내가 이런 클라이맥스를 맞이하려고 이렇게 열심히 살았구나 벅차오르기도 한다.
엄마가 되기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장르가 분명 다르다. 하지만 틀리지는 않다. 그때의 나도 나고, 지금의 나도 나이기에, 내가 내 인생의 중심에 서 있던, 변두리에 걸쳐있던 그 전부가 나인 것은 변함없다.
다만 당분간은 내가 잠깐 내 인생의 ‘주연’에서 물러나
떠오르는 ‘신인’을 대우해줘야 할 때라고 생각할 뿐이다.
원래도 나는 ‘액션물’은 별로 흥미가 없어서, 이 장르에 익숙해지기까지 혼란의 시간을 겪어야만 했다. 아이가 나를 보고 싱긋 웃을 때는 선한 역할이었다가, 떼를 쓰며 이유도모르고 울 때는 잠깐이나마 악역같았다. 10개월의 마음준비의 시간이 있었음에도,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 같은 ‘엄마’라는 역할은 그 안에 담긴 무수한 걱정과 고난과 또 역경을 한 번에 다 터뜨리지 않고, 피로에 지친 나에게 쉴 시간도 주지 않고 계속 잽을 날렸다.
그럼에도 나는 이 역할을 어떻게 하면 더 성공적으로 맡아낼지 캐릭터 분석에 더욱 매진했었던 것 같다. 매일이 피곤하고 정신없긴 하지만, 나는 꽤 ‘엄마’라는 역할을 아끼고 사랑한다.
30여년을 넘게 평범한 ‘성장드라마’로 살다가 활력 넘치는 ‘코미디 액션물’로 살아보니 확실히 좀 인생이 다채롭고 퍽 재밌기도 하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사실은, 내 인생에 찾아온 이 조그만 ‘슈퍼 히어로’를 나는 앞으로도 꾸준히 사랑할 것이며, 우리 가족의 인생이 완벽한 해피엔딩이 되기를 매일같이 노력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