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랑 이탈리아/스위스 여행 10.

10. 흐린 날의 베네치아.

by 모루

목감기가 심해져 밤새 잠을 설쳤다. 어제부터 내린 비는 그칠 기미가 없어 보였다. 나는 잠든 아이를 끌어안고 다시 잠을 청했다. 부모님은 우산을 들고 동네 산책을 나섰다.

얼마나 잤을까. 아이도 깨고, 나도 깨고, 부모님은 돌아왔다.


비가 그쳐 혼자 마트에 다녀왔다. 아이용 퓨레와 요거트가 다 떨어졌다. 엄마가 버터인 줄 알고 크림치즈를 사 와서 버터도 다시 사야 했다.


혼자 장을 보고 지도를 보지 않은 채 집에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비가 막 그친 낯설고도 익숙한 거리가 상쾌했다.

부모님은 요즘은 난생처음 가는 길도 인터넷으로 지도만 보면 한 번에 다 찾아간다고 신기한 세상이라 하지만, 막상 지도를 보며 다니면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시시각각의 거리, 풍경, 그때의 그 감정…

여행은 지도 없이 다녀야 비로소 완성되는 건데.


혼자 감상에 젖은 장보기를 마치고 다 같이 점심 식사를 했다. 내가 하몽과 멜론의 조화가 궁금하다고 노래를 불렀더니 엄마가 오전에 시장에서 사 왔다. ​


아, 이럴 땐 또 부모님이랑 다니는 게 좋아.

역시 엄마가 최고야.



오후 9시까지는 비소식이 없길래 넷 다 중무장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베네치아 본섬에 들어가기 위해 집 앞 담배가게에서 왕복표를 끊었다. 표를 끊고 버스 정류장이 아닌 엉뚱한 곳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으니 길 건너편, 저 멀리서 한 아저씨가 소리를 질렀다.


거친 행동과 화가 난 듯한 말투에 겁을 먹었는데, 알고 보니 정류장을 알려주려 했던 거였다. 우리가 이탈리어를 못 알아들으니 손짓 발짓까지 더해서. 그냥 지나칠 수도 있던 건데 정말 고마웠다. ​덕분에 무사히 본섬에 도착했다.



그렇게 본섬에 도착해 드디어 그 유명한 운하를 보게 되었다. 처음엔 신났다. 사진으로만 보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비 온 후의 눅눅한 하늘은 오히려 운치 있게까지 느껴졌다.


그러나 계단, 계단, 끝없는 계단, 종류별로, 또 크기별로 다른 계단의 행진. 성인 셋이서 내내 유모차를 가마처럼 들고 다녀야 했다.


게다가 비가 오는 날에도 코로나가 끝난 5월의 이탈리아는 인산인해였다.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가다 보니 우연히 바다랑 연결되는 곳까지 이르렀다. 거기서 아마도 처음으로 우리 네 명의 셀카를 찍었는데, 제법 귀엽게 나와서 종종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집에 가는 길에 하나둘씩 불이 들어오기 시작해 이대로 집에 돌아가기는 아쉽다는 생각이 진짜 손톱만큼 조금 들었지만, 그보다 피곤한 마음이 더 컸기에 부랴부랴 숙소로 발걸음을 돌렸다.

오늘도 비 때문에 꼼짝없이 집에만 매어있어야 할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의 속이 꽉 찬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