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이게 된다고?
시차 적응에 실패해 새벽부터 일어난 아이 아빠와 오전 산책을 했다.
안개가 낀 것마저 그림 같던 스위스의 아침.
부모님은 장을 보러 나가기로 하고, 남편과 나는 아이를 데리고 인터라켄 동역 쪽을 돌아보기로 했다.
흐리고 비가 왔던 오전과는 달리 오후쯤 되니 날이 갰다.
어제는 숙소까지 오는 기차가 있는 줄 몰랐어서 버스를 타고 왔었다. 그런데 눈썰미 좋은 엄마랑 남편이, 우리 숙소 앞에서 기차가 멈추는 걸 봤다고 했다. 그래서 오늘은 집 앞에서 기차를 타보기로 했다.
멈춤 버튼을 눌렀는데도 한눈을 판 탓인지 기차는 우리를 지나쳐 갔다. 가장 가까운 역까지 걸어간 후, 동역까지 가는 기차를 타기로 했다.
구글맵을 보고 걷는데, 인도가 사라지고 갑자기 찻길이 나왔다. 알고 보니 강 건너편에 사람이 다니는 산책로가 있었는데 우리가 지도를 잘 못 본 것이었다. 꽤 오랫동안 찻길을 걸어야 해서 불안하고 무서웠지만, 경치는 참 좋았다.
겨우 역에 도착하니 엄마에게 또 전화가 왔다. 장을 다 보고 집에 왔는데 열쇠가… 없다고… 우리는 왜 생고생을 하며 여기까지 걸어왔는가.
결국 역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또 문제가 발생했다. 우리가 있던 역에서 타는 기차가 무조건 숙소 쪽으로 가는 게 아니라, 중간에 길이 두 갈래로 나뉘어 아예 목적지가 다른 곳으로 가는 기차가 있었다. 우리는 그걸 미처 몰랐기 때문에, 그냥 아무 기차나 타 버렸다.
낯선 역에 내려 우왕좌왕하고 있으니, 역에 있던 레스토랑의 사장님이 밖으로 나왔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꽤 많았나 보다. 익숙한 듯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어보시고는, 우리를 커다란 기차 노선표 앞까지 데려가 너희는 지금 여기에 있으니 어찌어찌 가면 된다고 친절히 알려주셨다.
이런 상냥함이 스위스 여행을 더욱 기억에 남게 했다.
다시 처음 걸어왔던 역으로 돌아와 이번엔 정말 제대로 가기 위해, 역무원에게 우리 숙소 주소를 보여주며 어떻게 가야 하느냐고 물어보았다. 기관사에게 직접 얘기를 해야 하는데, 이번에는 본인이 얘기해 준다 하셨다.
사실 숙소 주인이 보낸 메세지에도 <운전자에게 알려야 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기관사를 만나서, 기관사에게 직접 “나 무슨 역 갑니다.” 얘기를 해야 한다니… 한국에서는 도대체 상상도 할 수가 없는 일이라 나는 그냥 번역이 잘 못 된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게 진짜 되는 거였네. 문화충격이었다.
알고 보니 숙소 앞 역이 정식 역이 아니라 간이역이라서, 기관사에게 직접 얘기를 해야만 정차하는 시스템이었다.
기차 1번 칸으로 가니 정말 기관사와 직접 대면을 할 수 있었고, 우리는 무사히 숙소 바로 앞에서 내릴 수 있었다. 기사님은 우리가 내려서 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엄지 척! 을 해주셨다.
기차에서 내려 엄마에게 재빠르게 열쇠를 전달하고 인터라켄 동역을 탐방하기 위해 바로 밖으로 나왔다. 이번에는 지나가는 기차를 향해 손을 흔들어, 동역 가는 기차를 제대로 탈 수 있었다.
관광을 목적으로 나온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사람이 많은 메인 거리를 벗어나 한적한 거리를 걸어 다녔다.
역을 잘 못 찾아간 일과 열쇠를 전달해 준 일 때문에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어 오랫동안 여유를 즐길 수는 없었다. 두어 시간쯤 돌아다니다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번에는 우리가 스스로 첫 번째 기차칸으로 가서, 기관사에게 숙소 앞의 역에서 내려달라고 얘기를 했다. 이번 기사님도 내려주시며 인사를 해주었다.
평화로운 스위스.
어쩌면 국가의 행복지수와 친절도가 연관이 있는 건 아닐까.
숙소에 돌아와 창 밖을 구경하며 생각했다.
‘하긴, 집 앞 경치가 매일 이렇다면 절로 행복해질 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