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전쟁과 평화.
어젯밤, 부모님과 크게 싸웠다. 남편이 스위스에 온 후로 남편과 나와 아기, 엄마와 아빠가 각각 다니고 있다.
엄마는 내가 “오늘 어디 갈 거야?” 하고 물어보면 매번 씩씩하게 “그냥 아무 산악열차나 골라서 종점까지 타고 갈 거야!“하고 말했었다. 그래서 나도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부모님 둘이서만 다니는 게 내심 부담이었나 보다.
아무리 대범한 엄마라도, 말이 안 통하는 데다 막차 시간도 잘 모르는 산악지대에서의 여행은 불안했을 것이다. 사실 스위스 산악열차는 내가 봐도 복잡한데, 모바일 활용이 낯선 엄마에게는 더욱 미지의 세계나 다름없었겠지.
그런 데다가 어제부터 아이의 열이 오르락내리락해서, 원래는 오늘 다 같이 가기로 했던 융프라우요흐까지 부모님들끼리만 가게 되었다.
그 불안을 먼저 알아채지 못해 미안한 마음에, 괜히 더 부산스레 준비해 그린델발트 터미널 역까지 모셔다 드렸다. 기차역 마트에서 대충 부모님 요깃거리를 사고, 혹여나 아빠의 당이 떨어지거나 고산병이 올까 봐 초콜릿까지 사서 든든히 들려 보냈다. 그러면 미안함이 조금 덜어질 것 같았다.
나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생각보다 멀고 피곤해 후회도 조금 됐지만, 그래도 부모님이 불안해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스위스의 필수 관광코스인 융프라우요흐. 날이 흐려 부모님이 제대로 보지 못할까 봐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웹캠상의 융프라우요흐는 맑은 편이었다. 날씨 요정인 엄마의 운에 맡겨보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맑은 융프라우요흐를 봤다며 사진을 보내왔다. 시간이 지나니 이것보다 더 날이 갰다고. 엄마의 날씨 운 하나는 정말 알아줘야 한다.
지난밤 부모님과 싸운 후 불안하고 걱정 됐던 마음이, 흐린 구름이 걷히고 맑아진 융프라우요흐만큼 맑게 갰다. 부모님의 마음 역시 맑게 개었길 바라며, 남편과 아이와 나는 인터라켄 서역 쪽으로 향했다.
어제 베른에서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서역을 보고 한 번 가보고 싶다고 한 게 계기였다. 다들 동역은 많이 가도 서역 쪽은 잘 안 가는 것 같던데, 계획 없는 나보다 더 즉흥적인 남편이라 참 생각지도 못한 여행루트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무계획 서역 여행이 시작되었다. 늘 그랬듯이, 또 어딘지도 모를 서역을 곳곳이 돌아다녔다.
인터라켄 동역 쪽이 여행자 거리에 가까웠다면, 서역 쪽은 대형 백화점과 차분한 주거지가 공존했다. 호수와 산이 어우러진 경치가 운치를 더해주었다.
부모님의 융프라우요흐 관광이 끝났다는 연락에 라우터브루넨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우리의 서역 산책도 마쳤다. 서역에서 동역으로 가기 위해 호수를 따라 걷는 길이 참 예뻤다.
부모님을 만나기 전, 아이가 추울까 봐 숙소에 들러 옷을 갈아입히고 가기로 했다.
그런데 여기서 일이 발생한다. 아침에 아빠가 우스갯소리로 “근데 기사가 까먹고 우리 집 앞에 안 서면 어떡해?”라고 말했던 게, 네,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아빠한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었는데…
간이역을 지나 종점에 도착하자, 역무원이 뛰어와 사과를 하며 우리를 다시 기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사실 이렇게 된 김에 귀찮아져서 안 가고 싶었는데… 그래도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는 게 감사해 거절할 수가 없었다. 기사님도 다시 출발하며 연신 사과를 하셨다.
부모님을 만나 이 얘기를 하니, 부모님도 웃긴 일이 있었다고 했다. 두 분이 간이역에서 내리려 하니 앞집에 사는 아주머니께서 여기서 내리는 거 아니라며, 두 분을 한사코 막아섰다고 했다. 나중에 우리 숙소로 들어가는 두 분을 보며 멋쩍어하셨다고.
하도 관광객이 내리지 않는 곳이라 여기가 숙소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셨던 것 같다. 뭘 잘 모르는 관광객이 아주머니를 따라 내린다고 생각해 부모님을 말렸나 보다. 우리는 또 그게 고마우면서도 웃겼다.
여행이 끝나고도 오래오래 얘기할, 우리만의 이야기가 생겼다. 하여튼 스위스 사람들 정말 스윗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