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아무것도 안 보이지만 행복한 뮈렌
기차에 관련된 수다를 떨며 라우터브루넨에서 다 같이 모여 출발했다. 141번 버스를 타고 슈테첼베르크에서 내려 케이블카를 탔다.
그런데 조짐이 좋지 않았다. 비가 내리고 안개가 끼어 한 치 앞도 보이지가 않는다.
사실 엄마는 가는 데마다 맑은 날씨 요정이었지만, 내 남편은 어딜 가나 비를 부르는 비의 화신이다. 엄마의 날씨 요정도 젊은 기 앞에서는 영 힘을 못 쓰나 보네.
부모님은 이런 날씨에도 트래킹을 하겠다고 했다. 고소공포증 있는 남편도 케이블카를 타느니 트래킹을 하겠다고 했다.
어이, 다들 진심이냐고…?
심지어 시간이 지날수록 날은 더 안 좋아졌다.
하지만 엄마는 스위스에 오니 이런 비 오는 길마저 너무 좋다며 진심으로 행복해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엄마를 보니 나도 웃음이 났다.
비가 오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양은 풀을 뜯고 있었으며, 시냇물은 흘렀고, 야생화는 그곳에 있었으며, 집집마다 꾸며놓은 조경들도 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그래,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가 보는 풍경도 비 오는 날에는 이랬겠지!“ 하며 신나게 걸었다. 단 한 명, 아이를 안고 등산을 하던 남편만 빼고.
비를 맞아가며 결국 뮈렌에 도착한 우리는, 케이블카 근처 식당에서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통나무로 만든 산장 같은 느낌의 포근하고 따듯한 식당이었다.
맥주 세 잔과 커피, 감자튀김을 시켜 먹었다. 감자튀김 한 그릇이 뭐라고, 이게 그렇게 맛있었다. 아이가 가만히 앉아있으니 또 울려고 발동을 걸길래 그냥 감자튀김을 먹여버렸다.
이야. 너 돌도 안 된 애가 별 걸 다 먹고 가네 진짜. 무염식이니 뭐니 엄마로서 걱정도 되지만, 감자튀김의 짜디짠 소금 간만큼 너도 같이 즐거우면 됐지.
당연히 아이는 기억도 못 하겠지만, 그래도 이날의 포근함이 은근히 마음 한편에 머물러 있는 걸까. 이후로 아이의 소울푸드는 감자튀김이 된다. 귀국을 한 후로도, 귀국 후 네팔 여행을 하면서도, 아이가 무언가를 못 먹거나 안 먹을 때는 감자튀김을 주면 아주 잘 먹는다. 나는 그때마다 이 날, 우리만의 뮈렌이 바로 어제처럼 생각난다.
그렇게 빗길 산행을 마쳤다.
끝끝내 날은 안 좋았지만 나는 엄마의 들뜨고 설렌 모습을 봐서 기분이 퍽 좋았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흐린 뮈렌이었지만, 그래도 오길 참 잘했다.
라우터브루넨에서 기사님께 다시 우리의 간이역 이름을 외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엄마는 기사님께 직접 역 이름 얘기하는 것에 재미가 들려서, 이번에도 엄마가 얘기하려고 대기하다가 부끄러워졌는지 갑자기 나한테 얘기하라며 등을 떠밀었다. 그런 수줍은 모습이 소녀 같고 귀여웠다.
이제 나도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여기가 말이 안 통하는 해외라 그런지, 내가 부모님의 보호자 역할을 하게 될 때가 있다. 부모님이 나를 의지하며 따르는 모습은, 참 복잡 미묘하다. 그들도 그럴 테지. 한 편으로는 내가 자랑스럽기도 하려나.
간이역에서 내리는데 한국인으로 보이는 한 분이 같이 내리셨다. 우리가 내리는 걸 보고 실수로 내리신 것 같은데, 우리도 뒤늦게 알아채서 앞집 아줌마처럼 말리지는 못했다.
나중에서야 상황을 파악하고 쫓아가서 길을 알려드리려고 했는데, 다른 역 쪽으로 잘 찾아가시길래 그냥 돌아왔다. 이미 너무 멀리 가셔서 뛰지 않으면 못 잡을 거리이기도 했고, 역 찾아가는 길의 풍경이 또 참 좋아서. 그 또한 여행 중에 만난 뜻밖의 즐거움이라 생각하시길 바라며.
그분을 쫓아갔다 돌아오는 길에 찍은 들꽃들. 들꽃은 정말 우리 숙소 앞이 제일 예쁘다. 길을 잃은 중에 만난 소소한 선물이 되어드려라.
내일은 정든 라우터브루넨을 떠난다.
오기 전에는 미리 유모차를 가지고 트래킹 하기에 좋다는 코스를 알아보았었는데, 정작 뮈렌 외에는 아무 곳도 가지 못 했다.
그 좋다는 33번 길, 37번 길 트래킹도 못하고, 꼭 해야지 생각했던 트륌멜바흐 폭포 가는 길 산책도 못 했다. 융프라우요흐도 못 보고 뮈렌에서는 흐리고 비가 왔지만, 그럼에도 스위스는 스윗스윗해서 행복한, 우리의 라우터브루넨이었다.
일정을 더 길게 잡을 걸 그랬나. 떠나는 것이 너무 아쉽다. 나야 스위스에 다시 올 수 있을 줄 몰랐지만 이렇게 다시 온 것처럼, 마음만 먹으면 언젠가 기회가 또 있을 텐데 부모님에게는 진짜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게 아쉬웠다.
더 충분히, 더 많이 즐기고 갔으면 좋겠는데 내가 뒷받침을 제대로 해주지 못한 것 같아 아쉽고, 또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