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루체른은 소도시가 아니었다.
가는 날이 다 되어서야 상상했던 그대로의 뷰를 보여주는 우리 숙소. 날이 맑아지니 더 떠나기가 싫어졌다.
스위스에서 돈 많이 썼다고 후회하는 사람은 못 봤다는 누군가의 글이 생각났다.
정말 그랬다. 오기 전에는 하루 숙박요금, 머무는 동안의 교통비에 기겁을 했는데, 막상 와보니 하루가 가는 게 그저 아쉽기만 하다.
미련이 남아 숙소 근처라도 걸을까 싶었는데, 엄마가 습관처럼 간이역으로 달려가 막 떠나려는 기차를 잡아버렸다. 그러면 인터라켄에서 커피라도 한 잔 할까 싶었는데, 공휴일이라 문을 연 카페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머물고 싶던 소박한 마음을 남겨둔 채, 별 수 없이 새로운 도시로 향했다.
아, 기차에서 멀미를 한 건 처음이었다.
인터라켄에서 루체른으로 가는 기차가 너무 심하게 덜컹거려서 인생 최악의 멀미를 경험할 수 있었다. 경치는 예뻤지만 다시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도 다행히 멀미가 나면 잠이 드는 체질이라, 엎드려 잠을 청했다. 어느새 루체른에 도착했다.
오잉, 근데 루체른, 되게 크네…?
내 기억에 루체른은 다리와 호수밖에 없는 아기자기한 소도시였는데 생각보다 너무 큰 도시라 놀랬다. 아마 몽트뢰와 헷갈린 모양이다. 내 기억이 왜곡된 거였구나.
기억이란 정말 놀랍다. 내가 다시 스위스에 오지 않았더라면, 내 기억에 루체른은 호수에서 백조와 사람들이 뛰노는 자그맣고 평화로운 소도시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실제로는 관광객들이 들끓는 꽤 큰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체크인을 하고, 숙소에 세탁기가 없어서 남편과 아이와 함께 빨래방을 가기로 했다.
빨래를 넣고 처음 보는 기계 앞에서 우왕좌왕 하니, 이번에도 어김없이 현지인이 다가와 도와주려 했다. 스위스는 어느 도시, 어느 때건 곳곳에 남을 도울 준비가 된 사람들이 넘친다.
세탁을 마치고 건조기를 돌리고 나서야 빨래 주머니에 립스틱을 넣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간에 정지하면 지불한 돈을 잃는다는 안내가 뜨는데, 그래도 빨래 전체를 망칠 수는 없어서 돈을 다시 낼 생각으로 정지를 해버렸다.
그런데 다행히 추가금 없이 건조기를 다시 돌릴 수 있었다. 안내와 달라 이래도 되는 건가 찝찝하긴 했지만 뜻밖의 행운이었다.
빨래가 도는 동안 근처 놀이터에서 아이를 잠시 놀게 하고, 아기 옷도 보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양이 많아서 그런지 한 시간 정도 건조기를 돌렸는데도 빨래가 다 마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건조기를 또 돌리기에는 돈도 돈이고 시간도 시간이라, 그냥 숙소 여기저기에 덜 마른빨래를 널어놓을 생각으로 돌아갔다.
빨래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 다리를 건너며 본 루체른은 작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예뻤다.
집에 돌아와 모두가 둘러앉아 삼겹살과 진저비어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는 나의 허황 된 꿈이었나 보다.
정신을 차려보니 밤 산책 중이었다.
아이가 잠투정이 늘어 안 잔다고 악을 쓰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남편과 아기를 데리고 밖에 나왔다.
아이는 나오자마자 금세 잠이 들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애써 나온 게 조금 억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