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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파즈 Feb 10. 2020

현금 1,000원을 20분 기다린 남자

에세이 #31

대학에 가서 처음 노가다를 했습니다. 꽤 추웠던 초겨울 새벽 5시경 인력사무소에서 일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술이 없으면 노가다 판에서 '잡부'입니다. 그야말로 잡일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봉고를 타고 아파트 공사 현장에 도착해서 폐기물을 치우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폐기물을 나르는데 운동 근육과 일 근육은 쓰는 방법이 다른데 그것을 알리 없는 저는 힘만 쓰며 힘들게 일했습니다.


노가다 판에서 경험이 많아 보이는 A가 물었습니다. '뭐하러 이 새벽에 일하러 나왔냐고?'. 저는 학비를 벌려고 나왔다고 답했는데 그러고 다시 물었습니다. '어디 학교 다니는데?'. 'D 대학교 다니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욕을 하셨습니다. (속으로 뭐 이런 미친 X이 다 있나 했습니다.)


노가다가 끝날 때까지 제 이름은 'XX 대학생'이었습니다. 폐기물을 위치를 알려줄 때, 참을 먹을 때, 식사할 때, 오침을 할 때도 동일하게 불렸습니다. 왜 그렇게 불려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하는 동안 참고 있었습니다.


시간은 흐르고 일은 마쳤습니다. 그런데 인력사무소에서 봉고차 시간이 맞지 않으니 대중교통으로 들어오고 차비는 빼주겠다고 했습니다. 당시 현금이 없 빌릴 수밖에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A가 저에게 천 원을 빌려주신 겁니다. (ㅠㅠ;;)


듣지 않을 욕까지 먹고 짜증이 났었는데, '이제 곧 볼 일 없는데..'라고 생각하며 인력사무소로 복귀했고 일당을 받을 순서를 기다렸습니다. 사람이 많아 정산을 하는데 시간이 걸렸고 현장 한 곳에서 문제가 있어서 더 지연되었습니다.


일당 50,000원 중 사무소 수수료(10%) 떼고 차비 1,000원을 더해서 46,000원을 받았습니다. 집으로 가려고 1층으로 내려가는데 A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순간 1,000원을 빌렸다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피곤함과 기다림에 지쳐서.


1층에서 기다리는 A를 보니 아차 싶어서 서둘러 천 원을 꺼내서 드렸습니다. 속으로 '또 욕을 하겠구나.. 퍼뜩 듣고 가자..'라고 생각했는데 A는 수줍은 듯 고맙다고 말하고 돌아서 갈 길을 갔습니다.


'... 뭐지?'


A는 노가다 현장에서 보여준 당당함무례함은 사라지고 선량한 40대 아저씨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두 모습 전부 A의 모습일 겁니다.


만약 제가 일을 하며 20분이 늦었다면 불호령이 떨어졌겠지만 일은 끝났고 돈을 빌려줬음에도 받아야 하는 입장에 서자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꽤 오래전 일인데 선명하게 그의 뒷모습이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얼굴과 목소리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A가 왜 그랬을지 어렴풋이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저의 추정에 불과하고 A를 만나 물어볼 수 없으니 알 길은 없습니다. 그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한참 지켜봤었습니다.


현금 1,000원을 20분간 기다리고 고맙다고 말하는 A가 불쌍하거나 안쓰러운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돈이 뭐지..'라는 생각에 하염없이 서있었습니다.


찬바람이 부는 겨울,  흘리며 번 차가운 돈을 매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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