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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파즈 Feb 14. 2020

당황스러운 역사의 현장, 베를린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시사 #07

역사는 당황스럽고 비참하리만큼 비합리적입니다.


1945년 나치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하고 미국, 영국, 소련이 얄타 회담으로 합의하여 프랑스까지 더해 4개국이 독일의 최고 통치권을 이어받았습니다.


당시 얄타 회담은 전후 국제적 혼란을 정리하기 위한 역사적 회담이었습니다. 그러나 각국의 정상은 그야말로 그런 역사적 판단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화려하고 완벽한 연설, 통찰력 넘치는 정책으로 미국을 위대한 국가로 만들었던 루스벨트는 1939년 고혈압 진단을 시작으로 당시 혈관성 치매를 앓고 있었고 얄타 회담 종료 2개월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을 뜨기 2개월 전에 전 세계의 운명을 건 회담을 했다는 것이 참담하기 그지없습니다.


영국의 지도자 윈스턴 처칠은 종전 후 인지장애, 혈관성 치매, 뇌졸중 증세가 악화되어 총리직에서 물러납니다.


얄타 회담의 최대 수혜자는 스탈린이었습니다.


소련은 회담 결과 체코, 헝가리 등 동유럽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러일 전쟁으로 잃었던 지금도 영토 분쟁이 있는 쿠릴열도와 사할린을 되찾습니다.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나 전성기 시절 루스벨트와 윈스턴 처칠이라면 이런 황당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어쩌면 한반도는 신탁통치를 겪지 않고 분단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1945년 2월  개최된 얄타회담 모습, 좌측부터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의 모습이다. >  (사진출처 : 경향신문)


1946년 12월 독일에서 미국과 영국은 각 점령지구의 경제적 통합을 이뤄내어 동서 분열의 방아쇠를 당기게 되었고 이후, 동-서간의 구분은 독일 최대 이슈였습니다.

동독과 서독 간의 분단이 고착화되자 동독에서 서독으로 넘어오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동독 정부는 소련의 제안을 받아 베를린 장벽을 만들었습니다.


소련의 제안으로 지어졌던 장벽이 2020년 오늘 미국에서도 볼 수 있다는 사실 또한 당황스러운 역사의 한 장면이자 '역사는 반복된다.'는 문장을 뒷받침하는 근거입니다.


1961년 베를린에 장벽이 세워졌고 1961년부터 1989년까지 5,000여 명이 장벽을 넘기 위해 목숨을 걸었고 이 중 100~200명가량은 사망했습니다.

베를린 장벽을 놓고 만들어졌을 수많은 이야기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히 흐르는 강물은 고요하고 평화롭습니다.

흉물처럼 남아버린 벽을 캔버스 삼아 예술가들이 그림으로 가득 채워 갤러리가 된 것은 어찌 보면 아름답지만 어찌 보면 아이러니입니다.


지금과 그때는 무엇이 달랐기에 같은 지구인으로 태어나 누구는 이 벽을 넘기 위해 생명을 걸어야 하고 누구는 몇 날 며칠을 앉아서 그림을 그려도 문제가 없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답하기 어렵습니다.


이 곳에 처음 와서 느낀 감정은 "역사의 당황스러움"입니다.


Berlin East Side Gallery를 알려주는 표지판입니다. 흉물스러운 장벽을 전 세계 예술가들이 벽화로 만들었고 이 곳은 지금도 평화롭게 역사의 한 장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벽 하나를 놓고 왼쪽은 동독, 오른쪽은 서독입니다. 저 벽 하나를 놓고 서로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도대체, 저 벽이 무엇이길래... 하는 생각이 끊이지 않습니다.


'형제의 키스.' 너무 유명한 그림입니다. 키스를 나누는 한 사람은 국가평의회 의장을 지낸 당시 동독의 최고 권력자 호네커이고 다른 한 사람은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브레즈네프입니다.


베를린 장벽을 넘는 독일인입니다. 바지는 파란색이고 재킷은 붉은색입니다.


Freedom. 자유. 베를린 장벽은 자유를 빼앗아 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벽을 넘은 이유 중 하나는 '돈'이었습니다. 통일 이후 화폐가치가 하락한 동독 돈을 버리고 서독 마르크를 확보하기 위해 수많은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몰려갔기 때문입니다.


자유의 다른 이름은 생존일 것이고 그들이 생존에 필요한 돈을 좇아 장벽을 넘었다는 사실이 현실적으로 다가왔고 매우 진솔하게 느껴졌습니다.

미국은 현대사회에 도대체 어떤 국가일까요? 지금도 광화문에서 성조기와 태극기를 들고 미국이 무엇인가를 해주기를 기다리는 분들이 있는데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21세기 초강대국 미국, 그리고 미국인이 던지는 한 표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가늠하기 힘듭니다.


한 무리의 개인이 벽을 지나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이들의 얼굴이 비슷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집단은 개인처럼, 개인은 집단처럼, 역사의 파도가 밀려오면 개인은 어떤 발버둥을 쳐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베를린 장벽의 잔재를 보며 조국을 생각했습니다. 분단 70여 년. 분단을 물과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한국인으로 살아온 시간이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작금의 분단 상황은 6.25 전쟁 이후 권력 찬탈에 눈이 멀었던 무능한 정치인들의 선택들이 쌓인 것이 아닌지.


한반도가 분단되는 촉매제 역할을 했던 얄타 회담에 참가한 최고 권력가들이 불안한 육체와 정신이었다는 것도 황당하기 그지없는데


이토록 멍청하고 비합리적인 선택이 70여 년 가까이 이 땅을 살았을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조차 역사적으로 명백한 사실이기에 참으로 인간의 합리성에 대해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조선 왕조 600년을 살펴봐도 왜란과 호란을 겪고서도 권력에 눈이 먼 양반들이었고 조선의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초기에 정조는 조선을 바로 세우기 위해 개혁을 시행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국운은 완전히 기울어져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이고 광복 이후 친일파들이 공직에 그대로 나서며 이어진 통한의 역사가 분단을 더욱 단단하게 한 것은 아닌지.


베를린에서 마주한 당황스러운 역사는 오늘날 한반도와 왜 이토록 닮아있는지. 어처구니없는 상황과 멍청한 선택이 빚어낸 당황스러운 역사는 오늘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참고자료]

1. https://www.yna.co.kr/view/AKR20170814091700797 

2.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2/08/01/2012080100024.html




*얄타 회담 사진을 제외하고는 전부 본인이 촬영한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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