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정치다.

회사인으로 보낸 10년 #02

by 토파즈
정치력을 잃은 개인과 조직은 위기가 시작됩니다.


정치인을 혐오하는 한국인의 특성상 대체로 정치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네 삶에 정치행위없는 의사결정이 많지 않습니다. 하다못해 친구들끼리 무엇을 먹을까를 결정하는 과정도 가만히 살펴보면 정치행위입니다. 더 가까운 친구나 더 가까워지고 싶은 친구가 좋아하는 메뉴를 추전 하거나 은근히 자기가 좋아하는 메뉴를 흘리고 알아주기를 기다리는 친구부터 다양합니다. 대체로 목소리 큰 친구가 '야야, 그냥 고기나 굽자!'라고 하면 고깃집으로 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상 목소리 큰 친구는 친구 사이에 리더십도 있고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인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을 먹을까?를 고민하는 과정도 정치인데 우리 일상을 채우고 있는 일은 오죽하겠나 싶습니다.


여야가 대립하는 국회를 쳐다보기도 싫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꼴 보기 싫은 국회의원 300명을 대표해 국회의장이 방망이 세 번 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합니다. 국민 80~90% 이상이 찬성하는 유치원 3법도 동일합니다. 여소야대의 지형과 민간조직의 끊임없는 로비가 빚어낸 파워게임에서 여당이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야당을 비난한들 불쾌한 감정을 처리하는 것 외에는 어떤 기대도 할 수 없습니다. 결국 300명 중 180명 이상이 찬성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네 일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회의를 하며 밀고 당기고 의견 교환과 소통이라는 단어로 포장하지만 서로 비난하기 일 수입니다. 예전에 팀 회의에서 오고 갔던 의견 중에 재미있는 대화가 있었습니다. 용역 업체 선정과 관련하여 실무자가 말한 내용입니다.



1. 팀장님 의견에 적극 동의합니다.

2. 다만,

3. 업체 선정에 있어서

4. 이전에 추진했던 용역 결과를 세밀하게 살펴보시는 것도

5. 필요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일상적인 의견이지만 정치적인 표현입니다. 나름의 통역이 필요합니다.

저 말을 한 번 분석해서 곱씹어보겠습니다


(1) 팀장님 의견에 적극 동의합니다.

의례상 하는 말입니다. 동의라기보다 시작부터 팀장 의견에 반대하고 싶지 않다는 완곡한 의사표현입니다. ‘팀장님 의견을 존중한다고 제가 분명히 말했습니다.’ 정도로 읽을 수 있습니다. 저는 팀장님 의견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동의한다고 밝혔다고 말하며 출구를 마련해놨습니다.


(2) 다만,

여기부터 자기 의견입니다. 혹은 유의어로 그러나, 반면에는, 한편, 그럼에도.. 등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선호하며 사용하는 단어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대체로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이란 말을 왕왕 사용합니다.


(3) 업체 선정에 있어서

'저는 이 업체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여러모로 부족하고 이 업체와 업무를 하기 싫습니다.’라고 의견을 밝히고 있습니다. 원하는 업체였다면 이런 대화 자체가 시작되지 않았을 겁니다.


(4) 이전에 추진했던 용역 결과를 세밀하게 살펴보시는 것도

보고자료에 나온 과거 추진실적과 결과를 팀장이 세밀하게 검토하지 않았고 결재한 것은 아니냐라는 은근한 힐책입니다. 실무자는 속으로 ‘왜 이번 업체가 여러모로 부족한지를 이전에 했던 일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그것도 살펴보지 않았냐?’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부드러운 톤으로 말했을 것입니다.


(5) 필요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인 것 같습니다.'는 한국인 가장 사랑하는 표현 중에 하나입니다. 중간자 태도를 취하면서 객관적인 의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최종 책임에서 약간 비켜서는 듯한 느낌도 줍니다. 얼마나 느낌 있는 표현입니까? 한국어를 알면 알수록 말맛이 살아있는 언어입니다. 만약에 이 업체를 그대로 선정해서 가서 일을 잘못될 경우 그것은 당연히 너, 팀장 책임이다.라고 은연히 밝히고 있습니다.



위와 같은 통역이 불편하신가요? 아니면 일정 부분 과장이 있다고 생각하시는가요? 어떻든 우리는 이런 말의 전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도 정치 아닌가요? 거창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만이 정치라는 편견을 던져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끊임없이 개인 수준에서, 조직 수준에 정치력을 점검해야 합니다.


결국, 말과 글입니다.


녹록지 않습니다. 언변과 글쓰기 역량을 적절한 수준까지 높이는 것은.

정치력을 상실하는 시작을 알리는 신호는 자기 의견의 상실입니다. 조직은 자기 의제를 잃고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개인은 침묵으로 일관하며 책임도 권한도 마다합니다. 폭망이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자기 의견이 없다는 것은 관심은 고사하고 고민이 없다는 뜻입니다. 어디에서 일하든 어떤 이슈에 대해서 자기 의견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자기 생각을 글로 써서 자신을 무장하고 상대를 쉬운 말로 설득해야 합니다. 쉬운 말로 상대를 설득하는 능력이 정치력입니다. 정치력을 로비나 아부로 판단하면 그것은 폭망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인생은 한 끗 차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정치를 로비와 아부로 인식하고 노력을 더해 쌓은 탑은 언제나 외풍으로 무너집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주도권의 자기 안이 아니라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말과 글로 쌓은 정치력은 외풍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주도권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말과 글로 정치력을 쌓아가는 것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가장 배우고 싶고 무서운 사람은 근육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말과 글이 담백하고 무엇보다 행동으로 자기 말을 실천해나가는 사람입니다. 비록 자기가 손해를 보더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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