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 경성, 늑대인간은 친일파 처단 현장에서 구미호와 재회한다.
별도 달도 없던 밤에 적막고요 하던 밤에 고대광실 너른 집엔 사람들은 아니 뵈고 쥐새끼도 숨었으니 이때 어서 돌아갔음 좋으련만. 복면 쓰고 흰옷 입은 젊은 청년 대여섯 명 야음을 기회 삼아 담을 넘어 침입하여 나라 팔고 작위 얻어 일인에게 충성하고 조선사람 핍박하던 최부자를 찾았더라. 아비되는 매국노는 사랑채에 정좌하고 불청객에 호통치니,
“요구했던 돈은 건넌방 금고에 있으나 순순히 내어줄 순 없다. 강도질이라니 부끄럽지 않느냐! 이 불한당 놈들!”
이 때에 아들되는 무뢰한은 별채에서 새로 얻은 기생첩의 버들 같은 허리를 끌어안고 꽃 같은 입술을 탐하며 “이리 오너라 벗고 놀자”하며 희롱할 새 기생첩이 몸을 빼며 단호하게 고하나니,
“나는 노류장화(路柳牆花)가 아니오.”
“이 년, 건방진 년, 여학생도 아닌 것이 비싸게 구는구나. 성질머리 완악하여 내비 두면 퇴기될 년, 큰돈내고 낙적시켜 집도 주고 옷도 줘도 은혜도 모르는 년!”
“누가 그리 해달랬소? 유학까지 다녀와서 침대에 책상에 거처만 서양식으로 꾸미면 무엇 하오. 언행과 정신은 구식 조선 사내나 진배 없는데.”
난봉꾼이 어이없어 헛웃음 짓다 생각하니 ‘이년이 단둘이 있으니 새삼 부끄럽다고 앙탈인가’ 함이라.
“웃음 팔고 소리 팔던 년이 말도 잘 하는구나. 이 년, 사랑가나 불러 보거라. 오늘 나와 놀아보자.”
“싫소.”
“그만 뻐튕기고 내 말 들어라.”
“나는 네 말을 듣는 꽃이 아니오. 내 말을 하는 짐승이지.”
기생이 목을 가다듬고 춘향가에 어사출도 하는 대목을 부르니,
“그 때의 조종들이 구경꾼에 섞여섰다 어사또 거동보고 벌떼같이 모여든다. 육모방망이 둘러메고소리좋은 청파역졸 다 모아 묶어질러, 암행어사 출도여! 암행어사 출도여! 두세번 외는 소리 하늘 덥쑥 무너지고 땅이 툭 꺼지난듯 밟히나니 음식이요, 깨지나니 북장고라 장고통이 요절나고 북통을 차구르며 뇌고소리 절로난다. 저금 줄 끊어지고 젓대 밟혀 깨어지고 기생은 비녀잃고 화젓가락 질렀으며 취수는 나발잃고 주먹대고 흥앵흥앵 대포수 포를 잃고 입방포로 쿵 이마가 서로 닿쳐 코 터지고 박터지고 피죽죽 흘리난 놈 발등 밟혀 자빠져서 아이고 아이고 우난 놈 아무일 없는 놈도 우르르르 달음박질!”
아들놈이 저러할 때에 아비놈을 붙잡은 무리 중 하나가 복면을 내리고 벼락치듯 일갈하니,
“2천만 민족이 노예가 되었는데, 일인(日人)에 빌붙어 호가호위, 호의호식하며 수치도 모르니, 너처럼 금수만도 못한 놈은 죽어야 마땅하다. 네가 동양척식 더불어서 토지조사 한답시고 빈농을 기만하여 일가족이 자살하고, 유리걸식 하는 자가 속출하니, 금준미주는 천일혈이오, 옥반가효는 만성고라, 촉루낙시 민루낙이요, 가성고처 원성고라. 조금이나마 너의 죄를 씻을 길은 부당하게 모은 돈을 독립투쟁에 희사하는 것 뿐이로다. 일전에 통고문을 보냈어도 돈을 내지 아니하니, 마땅히 조선민족의 이름으로 너를 처단하여 악덕 민족 배반자들에게 본을 보이리로다!”
무리가 일제히 달려들어 걷어차고 포박하여 금고 있는 건넌방에 가려 하니 묶인 자가 분통 터져 소리소리 질러대니,
“이놈들! 이 후레자식들! 애비 뻘 되는 어른에게 버릇없이 이게 무슨 짓이냐!”
그 소리를 신호 삼아 어디서 등롱을 든 일경(日警)들이 우르르 쏟아져 총검을 휘두르며 곤봉으로 구타하니 예서 으악 제서 아고 나 죽네 곡소리가 난무한다. 무리 중 하나가 폭탄을 던졌으나, 아뿔사, 불발탄이로다. 또 한 명이 육혈포를 탕탕 쏘니 하늘에 탕, 처마에 탕, 벽장에 탕, 기둥에 탕, 금고에 탕, 마당에 탕, 모두 다 오발탄이로다. 일경들이 일순간에 청년들을 제압하여 굴비 엮듯 줄줄 엮어 끌고 가며 선고하니,
“폭도들을 공갈, 살인미수, 강도, 총포화약류 단속령 위반, 보안법 위반으로 체포한다!”
귀족깨나 되는 놈이 묶인 채로 발구르고 데굴대며 체신 없이 낄낄대는 꼴이 차마 못봐 줄 추태더라.
“내가 군자금 내놓으란 편지를 장난이라 여기지 아니하고 신고한 것이 용하게 들어맞았구나! 한놈도 빠짐없이 감옥소나 들어가라 이놈들아! 하나, 두이, 서이, 너이…한 놈은 왜 여태 안 잡히누? 그래봤자 독안에 든 쥐새끼, 날 밝기 전엔 잡히겠지. 그러게 왜 치기어린,…부, 부, 불이야! 불이야!”
누가 던진 등롱불이 반질반질 기름먹인 대청마루 옮겨 붙어 붉은 불꽃 넘실넘실 기둥부터 휘감고서 지붕 덥쑥 무너지고 마루 툭 꺼지난 듯. 식솔들은 발만 동동 숨어있던 일꾼놈들 뛰쳐나와 우왕좌왕 허둥대고 일경들은 허찔린 듯 잡은 놈들 팽개치고 불난 데로 달려가고 묶인 놈은 하릴없이 펄떡대니 석쇠 위에 개구리 꼴.
“아이고 집 다 타네! 이게 다 어떻게 모은 돈으로 지은 집인데! 내 이 수모를 꼭 갚고야 말 것이다! 이 육시럴 놈들!”
지랄발광 하기 전에 뒤쪽이나 살폈으면 좋았을 걸. 어느 결에 네발 짐승 몸을 날려 덮쳐 드니 보이는 건 형형하니 두 개 안광(眼光)뿐이더라. 훅 끼치는 짐승냄새 고개 돌릴 틈도 없이 주먹만한 송곳니가 목울대를 크게 무니 발악하던 목소리가 일순간에 멎었더라. 앞발로 시체를 꽉 누르고 억센 이로 찢어 발겨 으득으득 뼈를 씹고 피가 뚝뚝 살코기를 송곳니로 물고 뜯어 씹지 않고 삼키다가 문득 뭐가 생각난 듯 팔다리가 덜렁대는 고깃덩이 버려두고 별채로 달려간다.
금고를 들어낸다 패물을 챙겨온다 본채는 불 끄느라 야단법석 시끌벅적 난리난리 났건마는 불 꺼진 별채는 아무 소리 없으니 발소리를 죽여가며 몸을 낮춰 소리 없이 달려들매 별채주인 간이 배 밖으로 나왔더라. 서양의사 수술마냥 사무라이 할복마냥 배를 갈라 열어두고 생간 꺼내 씹던 기생 피투성이 얼굴 들어 죽은 놈 옷에 피 묻은 손 닦으면서 선홍 같은 입술에 백옥 같은 뾰족니로 웃으면서 한단 말이,
“오랜만이오.”
그리운 이 만난 차에 정신이 아득하여 아무 말 못하고 가만히 섰는 것을 기생이 재주 넘어 구미호로 변신하여 재촉하니,
“쪽문을 알려줄 터이니 나와 함께 나갑시다.”
늑대가 정신 차려 구미호의 목덜미를 여의주나 되는 양 조심스레 물고 훌쩍 몸을 날려 불타는 집 벗어나니 어느새 구름을 헤치고 나온 달빛은 교교하고 별빛은 총총하더라.
“내 일전에 인간세상에 나가보니 전깃불이라는 것이 들어와 밤이 낮처럼 밝아지고 쇳덩이가 날짐승보다도 빨리 달리니 우리 같은 종족들은 약해지고 말 것이다. 이제 짐승으로는 살 수가 없다. 너는 사람이 되어라. 백정놈도 학교만 나오면 사람처럼 살 수 있는 세상이 왔다. 이제는 자식에게 신분을 물려주지 않고 공부하면 출세하고 족보 대신 호적에 이름을 올리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왔다. 그러니 너는 산을 내려가 사람이 되어라.”
아비가 어린 아들 머리카락 손수 잘라주고 글을 가르치고 등을 떠밀으니, 패랭이 쓰고 상투에 검은 띠를 두르던 백정도 갓 쓰고 두루마기 입던 양반도 머리를 짧게 깎고 양복을 입는 세상에서는 외양으로 구별되지 않음이라.
“내가 일전에 종로에서 본 바로는 백정이 관민 앞에서 당당히 나서서 이국과 편민의 길을 말하며 차일을 한개의 장대로 받치면 역부족이나 많은 장대로 받치면 공고하다 하였으니 너는 장대 중의 하나가 되어라.”
가진 기술이라고는 짐승 잡는 기술밖에 없어 산을 내려가면 백정이 되어 천대받고 살아야 하기에 낭인(狼人) 중에 사람이 되는 자는 극히 드물었더라. 그러나 이제 시대가 변하였으니, 더는 짐승으로 살 수 없고 더는 백정으로 살지 않아도 되고, 설혹 백정이어도 관계치 않는 새 시대가 도래했더라.
새 시대는 아직 오지 아니하였느니, 황제는 백정이 연설을 하는 세상을 원치 아니함이라. 백정이 제 아무리 황제의 성덕에 보답하고, 국운이 만만세 이어지게 하자고 해도 황제는 백성이 다스리는 나라를 원치 않음이라. 보부상이 방망이를 들고 종로 바닥의 백성들을 죽어라 개 패듯 일망타진할 때에 황제는 폭력배들에게 돈과 밥을 하사했으니, 황제가 외국에 밀사를 보내고 대사를 임명하며 되찾으려 했던 나라가 무엇인지 누가 알겠는고.
늑대들은 산에서 죽었건만, 의병에게 죽었는지, 의병을 토벌하러 산속까지 들어온 일본 헌병에 죽었는지 아무도 모르니 이제 누가 소년에게 인간이 되는 법을 가르쳐 주겠느뇨. 소년이 도살장에서 황소의 목을 물어 선지피를 받는데, 어인 일인지 갈증이 극심하여 바께스에 받은 피를 마시다가 팽개치고 벌어진 모가지에 입을 대고 꿀떡거려도 갈급이 나니 핏방울 하나라도 핥으려 무릎 꿇고 바닥을 기어 다녀 누가 보면 네 발 짐승인가 할 모양새라. 죽은 황소의 종지만한 두 눈알을 후비어 삼키고 혀를 빼내어 씹으나 굶주림은 매한가지라. 소 배때지를 갈라 고개를 처박고 기름줄줄 대창부터 질깃질깃 소창까지 따듯하고 비릿한 소 내장을 날것으로 파먹어도 여전히 배가 곯아 속이 빈 소 안에 기어들어 웅크리니 죽은 숫소 새끼밴 듯. 텅 빈 소는 무덤 같고 관짝 같고 자궁 같고 갓 태어난 아기마냥 피와 찌꺼기로 뒤덮이어 탯줄 대신 쇠좆 뽑아 뿌리부터 쫙 펼치니 석 자는 족히 될 는지라.
육포마냥 말려두니 나무처럼 단단하되 가죽처럼 탄력 있어 납조각을 매달으니, 일경이 조선인을 꽁꽁 묶고 일인을 쳐다본다 의병을 숨겨준다 노역을 아니한다 억울타고 시위한다 이리저리 트집잡아 볼기짝을 후려칠 때 생살이 찢기우고 살점이 떨어지니 참연한 그 정경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리오. 쇠좆매 납품하던 소년이 분분이 흩어진 볼기살을 한 점 몰래 맛보니 허기가 가라앉거늘 태형 받다 죽은 자의 시체를 뜯어먹어 배를 채우고 남몰래 산에 올라 허공 보며 우짖으나 이미 늑대의 긴 울음은 나지 않고 미약한 인간의 소리만 나더라.
“아아, 나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괴물이 되었고나.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세상이 올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고나.”
메아리는 돌아오지 아니하니, 소년이 외로이 산마루에서 흐느끼다 내려올 때 청년이 되었더라.
일경이 쇠좆매를 한 번 휘두를 때에 신작로 트여 쇠당나귀 나다니고 두 번 휘두를 때에 철로 놓여 쇠배암이 내달리니 길마다 점점이 조선인의 눈물이요 살점이라. 저 우렁찬 기차소리 무지몽매 조선인을 깨우는 문명의 소리라 할 때에 무지몰각한 낭인청년은 ‘문명이라는 것이 나처럼 사람 잡아먹는 괴물인가’ 하더라. 청년이 거리를 떠돌며 사람 되는 방법을 구할 때에 민족의 선각자라 자칭하는 자들이 저마다 청년들을 붙잡고 문명진보 설파하니,
“다윈 씨가 우승열패를 논하여 경쟁하여 이기는 자가 진화한다 하였으니, 약육강식은 자연의 이치요 문명한 나라가 미개한 나라를 점령하는 것은 만국사를 살펴봐도 만고불변이오. 청년을 깨우쳐 구습을 타파하고 새사람이 되어야만 우리도 속히 일본처럼 문명강국이 되어 구미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니 조선의 미래는 실로 자강불식하는 청년들의 수양과 공부에 달려있다 할 것이외다.”
청년이 가만히 생각하니 교육을 받아 문명개화하여야만 사람이 되는가 보다, 하다가 궁구하되, 그렇담 청년들이 공부하여 문명국이 되면 일본처럼 부강대국이 되어 독립한 연후에 다른 나라를 도둑질할 터인 즉, 그리 되도록 일본이 놔둘 것인가 하며, 또 약소국을 돕지 아니하고 노예로 삼는 게 소위 ‘문명국’이라 하면, 무식한 동포를 등쳐먹는 것이 ‘문명’이요 우매한 동포를 가르치는 게 도리어 ‘미개’ 아닌가. 산에 살 적을 생각해 보면 강한 짐승이 약한 짐승을 잡아먹기는 하나 그것은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함이지 탐욕을 부려 늑대가 토끼굴에 들어앉아 토끼를 노역시키지는 않으니 사람으로 사는 것이 짐승으로 사는 것보다 하등 나을 것이 없어 보이는지라. 또 골몰하되, 일인들이 조선인을 도륙하며 문명이라 하는데, 세상 사람들이 다 문명에 침심하고 문명함이 사람됨이라 하니 과연 문명이 무엇하는 놈인지 그 괴물을 내가 알고 싶다 하던 참에 기생들 수백 명이 양산 들고 행렬하니, 앞선 기생 선창하고 뒷선 기생 화답한다.
“금일부로 오십일 간 시정 5년 기념하여 문명발전 전시코저 공진회를 개최하니 합병 이후 오년 간에 산업발달 부력증진(富力增進) 보려거든 경복궁에 관람 오소.”
“언제까지 눈뜬장님 짚신신고 팔자걸음 구식으로 살려 하오. 웅대미려 일본물산 보고나서 자각하여 우승열국 되어야지 아니하오.”
“연예관을 개관하여 격일로 야간에 기생공연 있사오니 검무승무 조선아악 가야금에 소리까지 요릿집 갈 필요 없이 공진회서 기생 보소.”
청년이 바람결에 기생들 분내 향내 맡다가 문득 짐승냄새 감지하니 이상타 어이하여 기생에게 저런 냄새 나는가 하다가 공진회에 가면은 문명을 알 수 있나 하여 쇠좆매 판 돈을 내고 경복궁 공진회장 들어간다. 경복궁은 근정전 경회루만 남기고 허물어져 서양식 전시관을 지었으니 황제의 아비는 일백년도 못 갈 궁궐 짓느라고 백성 원성 들었던가. 근정전 용상에 조선총독 올라앉아 개회선언 한 이후에 조선인들 일본인들 시골사람 도시사람 구경꾼들 득실대고 경탄하고 감탄하며 요열하게 복닥대니 입구에서 한단 말이,
“공진회장 곳곳에서 변장한 기생 찾아 확인도장 받아오면 가장 많이 찾은 사람에게 상품증정 있소이다!”
입장객들 키득대며 수군대니,
“제 아무리 여학생이나 가정부인으로 분했다 한들 기생 교태 숨길 수가 있겠느냐.”
“내가 기똥찬 구별법을 아는데, 손 잡을 때 쑥스러워 몸을 빼면 여염규수요, 답쑥 안겨오면 기생 아니겠소?”
“임자 있는 기생이면 분명 아양 떨고 앙탈 부려 비싼 옷감 끊어다가 새 옷 지어 입을 테니 넘어진 척 안으면서 치맛자락 들춰 보면 알겠구먼.”
청년이 둘러보매 누가 기생이고 누가 여학생이고 누가 가정부인인지 모르겠거늘 다른 사람들은 다 알겠다 하니 그럼 저 사람들은 누가 사람이고 누가 낭인인지도 알까 하여 절로 몸이 움츠러 들더라. 공진회를 둘러보니 조선 것은 어딘지 낡고 졸악하여 물산도 국운 따라 조락하는가, 하고 반면에 일본 것은 같은 물건이어도 고상하고 세련되니 전시관이 서양신식 건물이어서 더 그리 보이는가, 싶기도 하였다. 심고하되, 문명이라는 게 고작 신식 서양 물건 갖다 놓고 비싸고 때깔 고운 물건을 두르고 편리하게 사는 것 뿐인가. 생산성이 높아지는 게 문명이면 조선 제일 부자가 조선 최고 문명인인가. 공부하면 깨어나서 눈을 뜨고 문명진보한다더니 계몽된 일본이 개최한 공진회의 여흥이란 게 기생놀음 뿐이던가. 하릴없이 품계석을 툭툭차며 왕이 있던 시절에는 양반들만 과거보고 출세하였건만 이제는 조선인은 아무도 출세치 못 하게 되었으니 과연 공평한 세상이구나, 쓰게 웃을 뿐이로다. 왕이 살던 궁궐에다 축산전시 한답시고 돈사계사 똥냄새가 풀풀 나니 제 아무리 사람이라 자부해도 일본인들 눈에 조선인은 짐승일러라.
“기생년 주제에 변장하면 모를 줄 알았느냐! 요사이 기생들이 여학생이나 양반집 규수 흉내를 낸다던데 그래 봤자 겉모습만 비슷하지 속내는 구식 여인일 뿐이라 보면 안다, 요것아.”
“내 속내를, 보면 아시오? 그럼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맞춰나 보시오.”
축사 옆에서 신식 양복 말쑥하게 차려 입은 사내가 옥색 치마저고리 단정하게 입은 여인을 희롱하니 청년이 보건대 여인이 뒷짐 진 손으로 축사 잠금쇠를 남몰래 풀고 있더라. 청년이 쑥 나서서 끼어들며,
“여보시오, 이 사람은 기생 아니오. 내가 아는 사람이오.”
하는 사이 여인이 잠금쇠를 풀어버리니 알 잘 낳는 암탉이며 빨리 찌는 돼지 등이 풀려나서 잠시잠깐 어리둥절 하다 이내 제 세상이랍시고 공진회장 휘젓나니 양복사내 돼지에 받히고 꿀꿀꽥꽥 일대소란 나는 틈에 여인이 청년을 회장 밖에 끌고 가서,
“백정이 궁궐 안에 들어와서 기생이랑 말도 섞고, 역시 발전한 세상이구려.”
“내가 백정이란 건 어찌 알았소?”
“짐승 냄새가 나니까.”
목덜미에 향수를 발랐어도 동족의 코는 속일 수 없나니, 청년도 여인의 정체를 눈치채었도다.
“여우가 궁에 들어오면 나라가 망한다더니.”
“이미 망한 나라 마음대로 드나들면 뭐 어떻소. 몇 해 전에 낭인(浪人)이 궁궐을 유린하였더니 오늘날엔 낭인(狼人)이 궁궐 정문으로 드나드는구려.”
“아까 하던 생각이 그 생각이었소?”
“아까는 속으로 그 사내를 비웃었소. 조선놈은 신도덕의 가정질서 교란한단 기생더러 춘향논개 잔다르크 본받으라 말만하니 매국하는 놈 따로 애국하는 년 따로런가. 흥, 그래 봤자 조선의 얼굴은 에그조틱(exotic)한 기생이오. 조선놈은 기생이 천하다면서도 일본놈들이 기생이 경복궁 앞에서 춤추는 공진회 포스터를 뿌려도, 기생 사진 찍어서 이게 조선여자라며 일본사내들에 팔아먹어도 분개하지 아니하고, 일본놈이 기생을 창부 취급하여 경시청 소속으로 두고 건강검진 모욕 줘도 양반놈만 품던 기생 나도 한번 품어보자 흥앵흥앵 좋다고 요릿집에 드나든단 말이오.”
구미호는 하산하면 재주 많고 야행성이라 밤에 기예를 파는 기생이 된다더니 과연 그 말이 참말이구나 하면서도 ‘에그조틱’이란 말을 쓰니 거 참 ‘하이칼라’구나, 싶어 흥미가 난다.
“이름이 무엇이오.”
“그대를 동하게 하였으니 ‘만월(滿月)’이라 할까. 그대 이름은 무엇이오.”
“낭인이 만월에 동한다는 것은 옛말이오. 나는 아무때나 변신하오. 그대가 만월이니 나는 ‘성하(星河)’라고 할까.”
이렇게 통성명을 한 연후 청춘남녀인지 암수인지 만났으니 자유연애 하여볼까 하여 경성 시내 갈 곳을 모색하다 요사이 나들이객 많다 하는 창경원에 놀러 가니 여기도 궁궐이 동물원 되었더라. 낭인과 구미호가 우리 너머 동물을 보니 과연 이쪽이 우리 안인가 밖인가. 산 속에 살 적에는 범이 가장 무섭더니 창경원에 호랑이는 우리 안에 갇히어서 왔다 갔다 세네 걸음 좁은 우리 쉴새 없이 오가며 여기저기 쿵쿵 제 머리를 찧더라. 번득여얄 눈은 이채를 잃고 터벅터벅 발걸음엔 강기가 없나니.
“가축이야 외양간에 둔다지만 들짐승을 가두고 희롱하는 건 생각지도 못 했으니, 서양 선교사들 말대로 인간이 만물을 지배하라는 게 저 꼴이었소? 저 호랑이의 신세가 공진회에 기생이나 다를 것이 없소.”
“비명소리 낭자하니 본보기로 태형 맞는 조선인과도 같은 신세요. 어차피 다 나 아니요, 남이고 구경거리요.”
날카로운 저 송곳니 죽은 닭을 먹으려니 화살처럼 빠른 다리 달리지를 못 하려니 강골한 저 성미로 감금되어 있으려니 미치고 않고서는 어찌 버티겠는고. 듣자 하니 어미는 죽이고 어린 호랑이를 들고 와 키웠다는데 사람 손에 길들여지지 아니하고 저렇게 미쳐버렸다더라. 만월이 사연을 알고 토로하되
"미물이라는 여우도 부모잃은 새끼를 거두거늘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라면서 부모잃은 구미호 새끼를 기생집에 팔더이다."
감옥소에 갇힌 범을 풀어줘도 사살되지 아니하면 도로 잡혀 영영 다시는 나오지 못 할 것이 뻔하니 진짜 호랑이를 구경한다 감탄하며 환호하는 어린아이 사이에서 차마 짐승의 말도 사람의 말도 아무 것도 하지 못 하는 채로 서로 마음이 통하여 손을 잡으니, 이제 영영 짐승으로는 살지 못하겠구나, 한가지로 생각더라.
“늑대가 길들여지면 개가 되는데 낭인도 길들여질 수 있으려나. 낭인을 길들이면 뭐가 되는가.”
“그게 수수께끼라면 정답은, 개새끼 아니오?”
“구미호는 다 그대처럼 영명하오? 혹시 사람이 되는 방법도 알고 있소?”
“구미호는 사람 간을 백 개 먹으면 인간이 된다던데, 그대는 그간 팔아먹은 쇠좆매로 이미 백 명은 족히 잡은 거 같건만 어찌 아직도 사람이 못 되었소?”
"사람이 되어야 하나 어떤 사람이 되얄 지 모르겠소."
"그냥 사람 되지말고 귀한 사람 되시오."
"귀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오?"
"나를 귀히 여기고 남도 귀히 여기는 사람이오."
"그대와 있으면 그런 사람 되게 하여 줄 수 있소?"
만월이 성하에게 다가오고 성하 입에 뭐가 쑥 들어왔다 나가니 사나이 가슴이 두근두근 귓볼이 벌개지고 온몸이 간질간질 다리가 휘청휘청 얼굴이 달아올라 어찌할 바 모르거늘 만월은 인력거에 올라 돌아가 버리더라. 성하가 밤새 뒤척이며 눈 감아도 만월이요 떠도 만월이요 귓가에 만월이요 입술에 만월이니 만천만월이로다. 과연 여우는 요물이요 여우구슬은 신물인가 하더라니 어야뒤여 상사로다. 성하가 벌떡 일어나 경성 요릿집마다 들러 오늘밤 만월을 불러달라 하나 어느 권번에도 그런 기생은 없다더라.
성하가 대경하여 다방골로 급히 달려가니 이미 초저녁 어스름 무렵이라. 초입부터 아찔한 분냄새 은은한 동백기름 향에 양단 치마 사각거리는 소리에 가야금 뜯는 소리 구성진 소리에 옷자락을 사뿐 들고 춤솜씨를 뽐내고 이야기책 읽기도 하니 조선은 겨울인데 여기는 만화방창인가 하노라. 골목 안을 더 깊이 들어가니 인력거꾼 부르는 소리에 ‘오늘밤은 또 어느 놈 비위를 맞추나’ 고단한 몸 일으키며,
“이내 몸은 젊으나 나를 사람으로 봐 주어 사랑할 이 없고나. 이내 신세 기생 신세 늙어 시들어야 벗어날까. 고운 임은 돈이 없고 미운 놈은 돈이 많아 첩으로나 팔려갈까. 남들 자는 밤에 조롱 속의 새가 되고 남들 깨는 새벽 눈밑 검어 돌아오니 다시 태어나면 기생일랑 되지 마오.”
붙잡고 한탄하는 소리에 나직하게 흐느끼며 눈물이 점점이 베개에 번지고 원수로다 원수로다 그깟 돈이 원수로다.
성하가 문간마다 내걸린 장명등 이름자를 하나하나 읽어가며 만월을 찾는데 사군불견 반월이, 독좌유황의 금향이, 남남기상의 봄바람 힐지항지 비연이, 팔월부용의 군자용 만당추수의 연화, 주흥당사 벌매듣 차고 나니 금낭이, 섬섬영자 추월이, 제일 보배 산호주,광한루상 명월야의 사시장천 명월이,독좌한강설 허니 천사만사 이화, 육감삼현을 딱쿵 치니 장삼 소매를 더들어 메고 저정거리던 무선이,단산오동의 그늘 속에 문왕 어루던 채봉이,초산 명옥이, 수원 명옥이, 양 명옥(춘향가 중 '기생점고')이 다 있으되 만월만 없더라. 저 장명등에 이름 말고 기생 되기 전에 부모가 지어준 이름은 무엇이었을고. 기예 따라 짓는 이름 말고 사내들이 좋아하는 이름 말고 제맘대로 지으라면 저 이름이 뭐가 되었을고.
“여기 혹시 만월 씨 계시오.”
“차림새를 보아하니 돈 없고 애정만 있는 작자로구만. 에그, 딱하여라. 가짜 이름 알려주고 떼어버렸나 보네.”
“오늘은 그믐이오. 만월은 아직이오.”
와하하하 웃음소리 만조처럼 밀려온다. 비명처럼 몰려온다.
갈까부다 갈까부다 임 따라서 갈까부다. 바람도 수여넘고 구름도 수여넘는 수진이 날진이 해동청 보라매 다 수여넘는 동설령 고개라도 임 따라 갈까부다. 성하가 발길 돌려 다방골을 벗어날 제 공연준비 하던 기생 우는 기생 손잡으며,
“마오 마오 그 말 마오. 잘난 사람은 더 잘난 돈, 못난 사람도 더 잘난 돈, 맹상군의 수레바퀴처럼 둥글둥글 생긴 돈, 생살지권을 가진 돈, 부귀공명이 붙은 돈. 사람이 원수지 돈푼이 원수겠소. 에그 형님, 자선연주 생각하오. 똑 같은 춤노래도 온습회에 하던 때는 십원 지폐 내고서는 기생이름 막에 붙여 내가 냈다 생색내던 놈들이 자선연주 때는 같은 십원 내면서도 기생들이 선행한다 갸륵하다 하지 않소. 그 돈 모아 고아원에 기부할 제 어떠했소. 철모르는 어린애들 치마폭에 안겨오며 곱고도 고마운 언니누나라 할 제 우리는 부모 잘못 만나 기생 되었지만 너희는 아예 부모 없으니 거리낄 거 하나 없이 마음대로 훨훨 자라 학교 가고 유학 가서 세계문명 이해하고 조선사람 깨우치는 동량지재 되어다오 축수하지 않았었소.”
성하가 염려하되 만월도 혹시나 어느 놈의 첩으로 팔려 갔을까. 오늘 밤도 원치 않는 술자리에 불려 갈까 저어하다 만월을 구하려면 돈, 돈, 돈 뿐이로다 결론 내고 돈 벌 궁리 하여보니 이제 더는 쇠좆매를 팔지는 못할 듯 하고, 자본도 뒷배도 없는 놈이 일확거부 되려면은 비두고인, 즉 미두 뿐이로다. 그날부로 경인선을 타고서는 인천미두취인소에 가서 보니 백년 넘게 미두하던 일본인을 어찌 이기리오. 대판(오사카)에서 오전 십 회, 오후 칠 회 쌀값 전보 올 때마다 얏다(판다) 돗다(산다) 하는 소리 마음이 철렁하고 심장이 쿵덕쿵덕 머리가 지끈지끈 미두꾼들 공연하게 등락괘선 그려보고 쌀농사는 재천이라 음양오행 살펴보니 적벽에서 동남풍 보던 제갈공명 납시었다. 떡락장이 올 때마다 미두꾼이 마바라(푼돈으로 미두하는 사람)되고 마바라가 합백꾼 되니 손 털고 나가야지 하면서도 일확천금 꿈을 깨지 못하나니 이 때에 성하가 겁 없이 남은 돈 모두 털어 대량구매 하더라니 이는 다 자기의 동물적 감각을 믿음이로다.
노력하는 놈 위에 머리좋은 놈 머리좋은 놈 위에 운수좋은 놈이라더니 과연 성하가 투자한 날로부터 쌀값이 오르니 고기맛보다 좋은 것이 돈맛이요, 지켜보던 미두꾼들 한목소리 가주아! 가주아! 주문처럼 외칠수록 쌀값은 폭등하여 경성에선 노동자들 월급 받아 쌀 살 돈이 없다 하고 농촌에서 농민들은 그딴 쌀값 올라봤자 친일지주 그 돈 들고 미두하지 낙수효과 없다 하고 인천항에 일본상인 조선쌀값 본토보다 비싸지니 마진차익 없다하여 온 나라가 터지려는 밥솥이라. 달도 차면 기울고 꽃도 피면 시드나니 미두라고 천년만년 오를까마는 성하가 다시금 감을 믿고 단물만 쏙 빼먹고 발을 뺄 때 미련한 사람들은 미친 쌀값 예상하다 떡락장에 미두폐인 되었도다.
성하가 이 때 미곡거래 눈을 떠서 곡물상을 차려두고 마당 넓고 담이 높은 집을 짓고 만월을 찾아 다니다 편지요- 소리에 급히 마당에 나가니 편지 아닌 협박문이라. 미두로 모은 재산 나랏일에 쓸 것이니 돈 만원을 내라하고 누구에게 알리거나 돈을 내지 아니하면 처단한다 하니 짐작하되, 미두판의 떨거둥이 회복할 길 찾는구나 하여 박박 찢어 버리려던 차에 이달 첫째 만월까지 돈을 준비하란 말에 설마, 하여 급히 ‘돈도 간도 쓸개도 그대가 필요타면 빼 주겠소’ 휘갈겨 대문 사이 꽂아 두니 그 날 밤에 답장이 홀연히 사라지고 문 앞에 여우 발자국만 찍혔더라. 주위를 둘러보나 여우는 간 데 없고 ‘나는 간도 쓸개도 빼 주는 사내는 필요 없소. 날마다 파 먹혀도 새 간이 돋아나는 희랍의 거인을 원하오. 나에게 돈 말고 불을 가져오시오.’라 적힌 서간만 남았더라. 성하가 약속된 날에 침입자를 기다리니 만월은 아니오고 뜻밖에도 또래 젊은이들이라.
“임꺽정도 홍길동도 아니고, 도둑질을 할 양이면 몰래몰래 하여야지 날짜시간 정하여서 선언문을 보내노면 잡아가라 사정하는 것이오?”
“우리는 도적이 아니오.“
“그럼 강도요?”
“우리는 이 한몸을 바쳐서 짐승 같은 일본을 구축하고 국권을 회복키로 구국결사 하였소이다. 그러기 위해 부자들에 돈을 요구하여 국외 무장단체에 군자금으로 보내려 하오.”
“국권은 회복하여 뭐에 쓰려하오. 국끓일 때 쓰려해도 쓰지 못할 국권, 국권을 회복할 양이면 채권사서 돈이나 벌지. 짐승이 따로 있고 사람이 따로 있소. 돈 많은 놈이 사람이고 없는 놈이 짐승이지. 나는 나라 없어지니 족보도 없어지고 신분도 없어지고 아주 좋소. 옛날 양반들은 일본놈들이 조선인은 벼슬 안 시켜준다고 우는 소리 하더라마는 요즘은 돈이 벼슬이오.”
“조선인이 조선 땅에서 주인 되지 못하고 사는 것에 만족하오?”
“주인되는 것이 무엇이오.”
“자유롭게 사는 거요. 억압되지 아니하고 하고 싶은 말을 하며 되고 싶은 것이 되는 거요. 부모가 정한 혼약 대신 내가 사랑하고 원하는 사람과 연애하여 결혼하듯 내가 살고 싶은 조선을 조선인의 손으로 만드는 거요.”
“그렇담 어떤 나라에 살고 싶소.”
“죄 없이 태형 당하지 아니하는 공정무사한 나라가 좋겠소.”
“누구나 교육도 받고 가정도 꾸리고 직업도 구하는 걱정 없는 나라가 좋겠소.”
“부강대국이 좋겠소.”
“왕도 양반도 귀족도 없고, 백성이 현명한 지도자를 뽑는 나라가 좋겠소.”
성하가 소망한 바를 발설하지 못하다가 겨우 아비가 했던 말을 떠올려 중얼거리니,
“차일을 받치는 여러 개 장대 중 하나처럼, 돈푼이 있나 없나 백정이나 기생이나 누구나 국가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나라였으면 좋겠소.”
이에 젊은이들이 성하와 어울려 친일거부 최부자네 습격할 계획을 세우니 성하는 통고문을 극구반대 하였건만 자기네는 신학문을 공부하여 도덕을 알았으니 금수일본과 다르다며 부득부득 고상하게 선전포고 하자하니, 성하가 오랜만에 늑대무리 돌아온 듯 무리에 껴 있으나 한편으로 실패를 예감하고 심모원려하여 향후계책 골몰하더라. 이 젊은 청년들이 ‘나이브(naive)’하게 여러 집에 통고문을 보냈으나 응한 자는 성하 뿐이고 다른 집은 태우거나 찢거나 일경에게 고했으니, 일경은 아직 특별히 재산피해나 인명살상이 없어 사태를 주시하고 있더라.
본래 재산이 나라보다 귀한지라. 암암리에 애국부자 많으리라 했던 짐작 틀어지니 이대로는 안 되겠다 청년들이 작당하니 거부한 자 본보기로 처단키로 모의터라. 쌀가마니 속에다가 폭탄을 반입하고 육혈포를 암거래로 구해오나 성능은 모르겠고 총탄이 부족하여 연습도 못 하더라. 성하가 이 계획에 빠지고자 하나 단 하나 걸리는 건 근일에 그 집 망나니 아들이 들였다는 기생첩 용모가 만월과 닮은 듯 하나니라. 마침내 어둔 밤을 골라 거사를 일으키나 무참히 실패하여 동지들은 일경에 붙들려 갈 때에 늑대와 구미호는 밤길을 달려 성하의 거처에 닿았더라.
성하가 만월을 물고 와서 대문쪽문 방문을 다 걸어 잠그고 인간으로 변하여 보니 둘다 알몸이라. 짐승이었을 때도 실오라기 하나 걸친 적은 없건마는 이꼴이 되고 보니 가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가린다면 어딜 가려야 하나 애매하여 두룩두룩 눈만 굴리고 섰으니 이윽고 만월이 헛웃음을 지으면서,
“아무것도 안 할 거요?”
“늑대는 일년에 한두달만 교미하오. 사람처럼 저급하게 아무때나 껄떡대지 아니하오.”
“아니, 아직 날이 찬데 털 없는 사람 꼴이니 방에 불을 때든가 옷을 주든가 해야 할 거 아니오.”
그제야 성하가 방 안에 만월을 두고 옷을 구하러 나가는데 일경이 재빨리 붙잡고 취조하나 옷가지는 소각하여 없앴으니 물증 없고, 일전에 받았던 통고문과 빈 금고를 내보이며 나도 사실 피해자라 거짓 읍소 하더라니 신고하러 가는 걸 목격당하면 보복당할까 두려워 신고조차 못하였다 하니 무죄방면 되었더라.
만월이 옷을 입으며 저간 사정을 다 듣고서,
“공짜로 옷을 받을 순 없으니, 내 기예를 사겠소 교태를 사겠소?”
“그대의 말을 사겠소. 나에게 아무말이나 해 주시오. 나는 동지라고 할만한 자들을 배신하였소. 늑대는 무리를 배신치 않는데 나는, 사람이 되었나 보오.”
“여우가 궁에 들어서 나라가 망하는 게 아니오. 짐승은 사람보다 예민하여 앞일을 예견하오. 여우는 망국을 경고하러 입궁하는 것이오. 나는 이 일이 실패할 것을 알았소. 조선 사내들은 요릿집서 술시중 받으면서 망국설움 토로하니 그딴 놈의 구국결단, 진정이 어딨겠소. 유관장 삼영웅이 도원결의하던 때에 기생 손을 잡고 하였소이까. 그대도 짐승이니 실패할 줄 알았을 거요. 그런데도 왜 그 자리에 같이 갔소?”
“그들이 말하는 게 마음에 들었소. 독립하면 백성이 주인 되어 자유롭게 사는 나라를 만들고 싶다 하여 혹하였소. 혹 사람이 되지 못하고 낭인으로 남는다 하여도 외롭지 아니한 나라를 원하였소.”
“나는 여자도 사람인 나라를 원하오. 그런 나라가 과연 오겠소?”
짐승처럼 꽁꽁묶여 일경에 끌려간 청년들 쇠좆매가 벽력같이 내려치니 비명이 난무하고 유혈이 낭자하다. 살점이 떨어질 때마다 하늘이 쪼개지고 땅이 내려앉는 듯. 일평생 공부만 하던 백옥같이 흰 피부가 시뻘겋게 찢기는데, 참혹하고 모질도다 하늘이 무심하고 땅이 매정하다. 그 와중에 간휼한 무리가 곤궁을 면하고자 재산가를 협박하여 돈을 강탈하여 유흥비로 탕진코자 했단 조서에는 죽어도 동의를 안 하니,
“히토쓰(한 대요!)”
만월이 유장하게 십장가를 부르면서 일자 낱을 딱 붙이니,
“일편단심 먹은 마음, 일개형장 웬일이오? 어서 급히 죽여주오.”
“욧쓰(네 대요)!”
“사지를 찢드래도 가망 없고 무가내요.”
“뭇쓰(여섯 대요)!”
“육부에 맺힌 마음 육시를 허여도 무가내요.”
“얏쓰(여덟 대요)!”
“팔방부당 안될 일을 위력 권장 고만허고 어서 급히 죽여주오!”(춘향가 중 '십장가')
몇몇은 옥문 밖을 벗어나지 못하고 절명하고, 몇몇은 재판 끝에 강도살인으로 언도받고 사형당하니, 성하가 참연히
"다시 태어나면 새시대에 태어나오. 죽어 꽃이 되되, 벽도홍(碧桃紅) 삼촌화(三春花) 꽃이 되고,
나도 죽어 범나비되어, 그 꽃보고 좋아라고, 두 날개를 쩍 벌리고, 너울 너울 춤추거드면, 날인 줄 알시오.
죽어 종루 인정이 되고, 나도 죽어 인정마치가 되어, 밤이면 이십 팔 수, 낮이면 삼삽삼천 그져 댕 치거드면
날인 줄 알으시오."(충향가 중 '사랑가')
하더라.
형장에선 흰 눈이 피떡이 된 시신을 덮어 무덤이 되고, 궁에서는 소문이 새어 나오니 “병합을 강요한 자들이 황제를 독살했다”하더라. 나라 밖에선 미국 대통령이 ‘민족 자결’ 주창하니, 실력양성 기다리다 언제 독립한단 말인가. 동경에선 배웠다는 유학생들 만세운동 나서더라. 우리 민족이 모여 독립을 외쳐 이목을 집중시키면 만국열강 동정할 제 민족자결 외교하세, 하나니. 죽은 자들이 꿈꿨던 듯 깨어나 이 소식을 들었으면 그리 성급히 나서지 않았을런가. 만월이 조소하니,
"다람쥐가 모두모여 만세하면 독수리가 감동하여 부엉이를 설득하여 잡아먹지 아니하겠소?"
황제는 이가 모두 사라지고 혀가 녹아 없어져 시커먼 입으로 붕어하였더라.
다방골 기생들은 초혜(짚신)신고 상장달고 소복입고 행진하며,
“이내 신세 처량하듯 나라신세 처연하다.”
만월이 기생행렬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는 사내가 지겹고 사람이 역겹소. 그들의 나라따위 관계치 아니하오. 여자로 사는 건 고단하고 사내로 사는 건 미련하오. 민족대표란 작자들 면면을 보시오. 청년 여자 백정 기생은 민족이 아니오. 나는 사람이 되지 않을 거요."
"그래서 그들을 만류하지 아니하였소?"
"그대처럼 빠져나올 줄 알았지 그리 죽을 줄은 몰랐소."
"나도 내가 이리 비겁할 줄은 닥쳐야 알았소."
"내게 불을 주려 그랬던 것 아니었소?"
성하가 만월을 가만히 안고 만월이 했던대로 입에서 입으로 여우구슬 돌려주며,
"사내가 지겨우면 수컷은 어떠하오. 나는 그대가 귀하오."
탑골공원에 사람들 모였으되
자칭 민족대표란 사람들은 나타나지 아니하고,
황제는 아무 말 아무 소리 내지 못 하고 침묵 속에 눈을 감았다더라.
기다리던 사람 하나 마침내 팔각정에 올라서서 주머니에 들어있던 독립선언 낭독하고,
누군가 큰 소리로 “대한 독립 만세!” 선창하니
늑대일족 아우우우 목울음 내듯 여기저기 사람들이 “대한 독립 만세!” 화답하니
성하도 만월도 마치 산속에서 짐승무리 섞여 살던 그 때처럼 아우우우 소리내도 “만세! 만세!” 화답하여 주니 동족 된 듯 하던 차에, 앞선 기생 짐승처럼 일경에 머리채 잡혀 땅에 질질 끌려가니,
이대로 나가면 다시는 예전처럼 살지를 못 할 것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만월이 쪽진머릴 단발로 자르고 성하의 팔을 끌어마침내 거대한 사람의 파도에 뛰어드니
“대한 독립 만세!”
일경이 천발만발 총을 쏴도 대한독립만세 여섯 자에 담긴 수많은 의미를 감히 이해치 못할러라.
만월과 성하가 손을 잡고 앞으로 앞으로 진보하며 만세를 외치니 이대로 끝없이 나아가서 사람으로든 짐승으로든 살아볼까, 새 시대의 무엇이든 되어서 어떻게든 살아볼까. 삼월이라 꽃샘추위 지나면은 이화춘풍 꽃눈깨비 내리는 날 올까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