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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켠 Sep 22. 2024

천석만석 부려주소서

집에 재복을 주시는 가신을 ‘업’이라 하니라. 

집에 재복을 주시는 가신을 ‘업’이라 하니라. 업님은 구렁이 모양으로 고방에 사시니라. 이를 '업구렁이'라고도 하니라. 업이 사람에게 붙으면 ‘인업’이라 하니라.


본디 이 댁은 낙향거사의 자손이라. 이 댁 조상들은 흉년에는 굴뚝에 연기를 피우지 아니하시고 밤에는 쌀독을 문 앞에 내놓아 굶주린 이들이 남모르게 퍼 가게 하셨니라. 이리도 청빈하고 덕 있는 집안에 어찌 그리 흉한 후손이 나왔는고. 아마도 혼란 때에 역도로 몰린 친우를 변론치 아니하시고 홀로 은거해버린 조상의 업보가 아닐까 하노라.


이 댁 나으리 나실 적에 점쟁이가 와 보고는 “아기님이 인업이니 재복이 있다” 했니라. 큰마님께서는 일찍이 지아비를 여의시고 청상과부가 되어 유복자를 낳으셨니라. 빈궁한 집안에 지아비마저 없으니 당장 미역도 없어 해산한 산모가 겨우 좁쌀죽을 끓여 드시다가 점쟁이 말을 듣고 기꺼워 하셨더라. 나으리 소시 적에 글공부는 열심히 하셨으나 조상의 당파가 문제되어 과거에는 매번 떨어지시는고로, 남몰래 홀로 탄식하시더라.


나으리 십육 세 되시던 해에 장가를 드시니라. 그 해 봄에 근방에 큰 가뭄이 드니 큰마님이 손뼉을 치시며 “때가 왔노라”하시더라. 즉시 새색시가 혼수로 해 온 은가락지며 옥비녀며 삼작노리개며 녹의홍상 비단옷까지 홀딱 벗겨 팔아 먼 고을에서 쌀을 사 오시니라. 굶주린 부모가 누렇게 뜬 아이를 안고 업고 문간에 바글바글하니 그 참상을 어찌 눈 뜨고 보겠는고. 큰마님께서 고리대로 쌀을 내 주시면 온 식구가 감사히 절 하고 받아 쌀뜨물 같은 흰죽을 쑤어 연명하니라. 가을이 되니 집집마다 종놈을 보내 쌀을 갚으라 하시니라. 봄에 가뭄이 들었으니 그 해 가을은 응당 대흉이라. 갚을 쌀은 커녕 다음해 심을 종자도 없니라. 당장 목숨줄을 붙들려고 뜻 모를 빚문서에 손도장 찍었던 까막눈이 가혹하여 땅 있는 자는 땅을 뺏기고 땅 없는 자는 노비가 되니라. 이에 다들 이 댁 작은 마님이 인업이라, 시집오시자마자 재산이 불어나는고나 하였는데 진짜 인업은 나으리였니라. 나으리가 아들 하나 딸 하나 낳고 살면서도 집안에 재물이 풍족하니 주색잡기에 빠져드시니라. 끝내 기생과 눈이 맞아 다른 집 살림을 차려 나가시니 지척에 살면서도 본가에는 얼씬도 아니 하시더라. 그리 되니 그 많던 재산이 나으리를 따라 꼬챙이에서 곶감 빼먹듯 줄어들더라.


큰 마님이 업을 다시 불러들일 묘책을 고심하시던 차에 이 댁에 업둥이가 드니라. 그 때가 동지섣달 춥디추운 밤이었는데 아기 우는 소리에 큰마님이 나가시니 비단강보에 싸인 귀히 생긴 사내아이가 있더라. 작은 마님이 질색하시며 분명 그 기생년의 자식새끼라 도로 갖다 주든지 길바닥에 내버려두라 하시더라. 큰마님께서 질책하시되 업둥이가 들면 그 집에 재복이 따라붙나니, 이는 업둥이를 들인 인덕에 하늘이 감읍하는 것이라 하시니라. 큰마님께서 고방에 들어가 제수를 차려놓고 비손하시되,


“업님이여, 업님이여, 천석만석 부려주소서. 자손대대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소서.”


하시니라. 고방 문이 굳게 잠기고, 큰마님 간절히 비는 소리에 묻혀 여린 발목을 꺾어 부러뜨리는 소리와 아기 우는 소리는 밖에서 들리지 않더라.


이 댁 식솔들이 고방 한 구석에 업동가리를 쌓고 업님을 모시어 날마다 흰쌀죽을 공양하며 극진히 섬기니라. 업님이 사람 눈에 띄면 집에서 나가 집안을 망하게 할 징조라. 업동가리 앞에 쌀죽을 두고 물러가면 업님이 쌀죽을 드시고 반드시 조금 남기시니라. 다른 집 사람이 남은 쌀죽을 들면 그 집으로 복이 간다 하여 오직 큰마님만 쌀죽을 음복하시니라. 업님이 드신 후부터 신기하게 이 댁 논에 풍년이 들어 고방에 쌀가마니가 그득그득 쌓이니라.


이 댁에 어린 계집종이 있으니 흉년에 쌀을 빌어먹고 갚을 길이 난망하여 일가가 투신하여 노비가 된 아이라. 이 아이가 어려서부터 매일 새벽마다 고 조그만 손으로 찬물에 흰쌀을 미감수가 맑아질 때까지 씻고 헹구느라 아침이면 손이 쭈글쭈글 불어 터지니라. 이 쌀을 두어 시간 불렸다가 참기름 한두 방울 넣고 갈아서 솥에 물을 넉넉히 붓고 눌어붙지 않게 저어가며 끓여내니라. 겨울에는 찬물에 손이 트고 여름에는 불 앞에서 땀이 한 됫박이라. 빈속에 고소한 쌀죽 냄새를 맡으니 얼마나 회가 동할고. 그러나 이 댁 사람들이 늘 가로되, 업구렁이가 먹을 죽에 사람이 먼저 입을 대면 업구렁이가 그 사람을 또아리로 칭칭 감아 아가리를 벌려 칵 물어서 머리부터 통째로 잡아 먹노라, 하니라. 어린 아이가 겁을 먹고 어두운 고방 한 구석에 죽그릇을 손끝으로 밀어두고 꽁지 빠지게 도망 나왔다가 한 식경이 지난 후에 발끝으로 종종종 들어가 요강과 죽그릇을 후다닥 챙겨 나오니라. 남은 죽은 큰마님께 올리고 요강은 비워 다시 고방에 두고 나오는 몇 년 동안 한번도 업구렁이 코빼기도 못 보았니라.


어느 해인가 이 고을에 대가뭄이 드니라. 큰 마님이 고방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시고서 사람들이 주릴 때를 기다리시니라. 사람들이 분명 가을에 땅을 내놓거나 자식을 노비로 보낼 것을 알면서도 당장의 기아가 무서워 고리대로 쌀을 빌리니라. 그나마 쌀을 빌릴 것도 없는 가노비들은 마님과 도련님과 아기씨께서 이밥에 고깃국을 드시는 동안 빈 그릇을 긁니라. 도련님은 어릴 적부터 식욕이 없고 온갖 병이 들러붙어 골골함에도 아랫것들에게 남은 밥 한 톨 안 주고 아끼는 강아지 밥그릇에 잔반을 부으시더라.


업님을 돌보는 계집종의 어미는 찬비라. 배고파서 울 힘도 없는 막내가 가여워 감자 하나를 부엌에서 훔쳐 나오다 들켜 매를 맞았니라. 땅은 갈라지고 농작물은 타들어가는데 불쌍한 어미는 살이 터지도록 얻어 맞았니라. 어미가 아프니 어린 자식들은 더욱 가련한지라.


사람이 사흘을 굶으면 호랑이도 무섭지 않거늘 업구렁이가 두렵겠느냐. 계집종이 이 날은 흰쌀죽을 두고 물러나지 않고 조심조심 한 술 뜨다가 허겁지겁 퍼먹더라. 허기를 면하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업님이 배로 바닥을 밀며 업동가리에서 기어 나오셨니라. 계집종이 두려워 하면서도 실눈을 떠 업님을 보니라.


“천…석…만…석…부..려…주…소…서…”


업님께서 큰마님께 수없이 들은 그 말을 흉내내시니라.


“어? 사람이네?”


계집이 손을 뻗어 파리한 또래 사내의 백옥으로 깎은 듯 고운 얼굴을 만져 보니라. 발 없는 사내가 자기 얼굴에 닿는 또래의 거친 손을 잡아 보니라. 계집이 사내의 더벅머리를 빗어서 땋아주고 사내가 계집의 댕기머리를 헝클어 놓으니라. 사람이 업님에게 말을 가르치니라. 업님이 손가락을 사람의 입술에 대고 입속에 넣으시며 말을 배우고 사람이 업님의 죽을 배 속에 채우니라. 계집이 사내를 안아 올리고 곁을 부축하고 겨드랑이에 팔을 껴 들어올려 일으켜 세우려 할 때에 계집의 뽀얀 숨소리가 사내의 귓바퀴를 발갛게 물들이니라.


“나가고 싶어. 날 데리고 나가 줘.”


“아버지가 몰래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이 댁 소도 종놈종년보단 잘 먹고 덜 맞을 거라고 하시면서, 상전을 죽이고 이 집을 불태워 노비문서를 없애고 야반도주해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면 다시 양인이 된대. 흉년에는 죽는 사람이 많아서 빈 집도 많고 숨어들어 살기도 좋다고. 자식의 신분은 어미를 따르니 내가 양인이 되면 내 자식들도 양인이 된대.”


업님은 머리가 명석하고 재주가 비상하신지라. 계집종과 계책을 꾸미시니라. 계집종이 부러 큰마님과 도련님 계신 자리에서 업님 얘기를 하니라. 큰마님은 업님이 남기는 죽이 거의 없는 게 업님이 부쩍 자란 때문이라 여기시니라. 도련님은 아직 어리셔서 한창 만용을 부리실 나이라,


“뒷걸음질치느라 잘 못 봤는데, 업님 그림자가 고방만 했어요! 그림자만 봤는데도 뾰족한 이가 무시무시했다니까요!”


“네년이 헛것을 보았구나. 호들갑 떨지 마라.”


“우리 도련님은 그런 거 안 무서우시지요? 우리 도련님은 용감하신데, 이 종년이 겁이 많아서요.”


“업님은 누구도 보아서는 안 된다. 절대 고방엔 가지 마라.”


이런 말을 들으시고 큰마님이 고방 출입을 엄히 금하실수록 호기심이 생겨 밤에 홀로 몰래 고방에 가시니라. 과연 업님이 기다리고 계시다가 업동가리에 숨어 괴성을 지르시니 도련님이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치시고 그 날로 자리보전하시어 “무서워 무서워”만 중얼거리며 크게 앓으시니라. 큰마님께서 대노하시어 고방으로 가셨으나 말없이 나오시니라. 이는 업님께서 계집종이 몰래 준 부싯돌을 손에 쥐시고 “내 고방을 다 태우고 나도 타 죽어 사라지면 이 집안이 온전할까 보냐”고 겁박하심이라. 업님이 겁주신 말씀을 큰마님이 작은 마님께 전하시니라.


“내 비록 업구렁이 구실을 하나 사람의 마음을 지녔니라. 나도 장가 들 나이가 되었으니 이 집 딸을 나에게 시집오게 하라. 그리해야 내가 이 집을 떠나지 않고, 가문이 쇠하지 않고 계속 재물이 들지 않겠느냐. 그리 아니하면 내 저주를 내려 이 집 아들의 목숨을 앗아가리라”


작은마님이 파랗게 질려 펄펄 뛰시면서 “남편도 나간 마당에 어린 아들은 몸져 눕고 이제는 딸까지 내놓으라 하시니 내 어찌 살란 말인가”하시니라. 그러다가 문득 계책을 내놓으시니라.


“업구렁이가 우리 딸을 보신 적은 없은 즉, 종년을 하나 꾸며서 들이밀어도 업님은 아실 길이 없고 종년도 이 집을 떠나지 못 하니, 업님께서 이 집에 영영 붙어계시고 그 후손도 이 집 자손들을 대대로 지켜주리라.”


이에 쌀죽 끓이는 계집종에게 혼례복을 지어 입히고 나으리 장가드실 때 입었던 사모관대와 간장 종지와 물그릇과 술동이를 들려 고방에 들여 보내니라. 계집종의 부모가 슬피 울며 “목구멍이 지옥이라 쌀 한 그릇 받아먹은 벌이 혹독하도다” 탄식하니라.


“아버지 어머니 걱정 마세요. 업님이 악귀도 아니고, 이런 혼인이 아니면 내 어찌 혼례복을 입어보고 정화수라도 떠 놓고 혼례를 치러 보리이까.”


계집종이 부모를 위로하고 고방에서 업님과 혼례를 치르니라. 업님께서 혼수를 보고 한탄하시되


“합환주 안주로 간장이나 찍어 먹으란 뜻이냐. 마님 정성이 갸륵하다.”


하시니라. 새색시가 수줍게 업님께 기대며 묻니라.


"아기씨가 아니라 내가 와서 서운하니."


이에 업님이 각시를 휘감듯 안으며 말씀하시니라.


“이미 이럴 줄 다 예상했지. 내 이 집을 쇠하게 하고 너와 함께 세상에 나가려 하였느니, 일단 내 진짜 어미라는 기생부터 찾아가 보자. 날 도울 수 있는지.”


계집종이 술동이를 비우고 업님을 숨겨 밤에 몰래 나으리댁을 찾아 가니라. 나으리의 기첩이 술동이를 열어 업님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묵주와 십자가와 성경책을 쥐어주니라.


“내 너를 천한 서얼로 만들 수 없어 큰마님의 인덕에 의탁했거늘…내 진작 주님을 영접하였으면 하느님의 세상엔 서얼도 없고 귀천도 없고 모두 신앙 안에 형제자매이며 우리 모두 하느님의 종임을 알았을 터인데…내 너를 위해 늘 기도하였니라. 그러니 너도 어리석은 미신을 믿지 말고, 입교하여, 죽어서 천당에서 우리 모자가 상봉케 해 다오.”


“하느님인지 뭔지가 구렁이도 좋아하신답니까. 죽어서 천당에 가는 게 무슨 상관이오. 살아서 이 세상을 들어 엎을 수 없다면. 이 가뭄에 비도 못 내리고, 그렇게 열심히 믿는 여인의 자식의 발을 잘라 버린 하느님이란 게 대체 다 뭐란 말이요.”


계집종이 끼어들었니라.


“하느님을 믿으면, 죽어서 천당에 간다고요?”


“천당은, 고통도 괴로움도 없는 만복지소니라.”


업님께서 고개를 저으시니라.


“자식 버린 어미도 갈 수 있는 곳이 천당이라면, 나는 아니 가겠소.”


술동이가 다시 고방에 돌아오고, 업님은 십자가와 묵주와 성경책을 던져버리시니라. 계집종은 또 어김없이 흰쌀을 씻었니라. 아침이 되니 집안이 시끄럽더라. 도련님이 숨을 몰아 쉬다가 급사하시니 오랜 병환이 드디어 끝났음이라. 계집종은 어제 업님이 집안을 나가 도련님이 죽은 게 아닐까 저어하니라. 작은마님은 넋이 나가 혼절했다가 정신이 들었다 만을 반복하시며 쌀죽 한 술도 못 뜨시니라.


“작은마님, 사람이 죽으면 천당이란 데 간다고 하니, 도련님도 고통도 괴로움도 없는 만복지소에 가셨을 거예요.”


계집종이 몰래 작은마님 머리맡에 성경과 묵주와 십자가를 놓고 오니라.


이 해에는 대가뭄이 들어도 쌀을 빌러 오는 이가 확연히 줄었니라. 사람들이 이 댁에 쌀을 빌러 오는 대신 하느님께 기도하였니라.


“하느님 하느님, 우리를 고통이 가득한 이 곳에서 구하시어 얼른 천당만당 데려가 주소서. 그곳에는 가뭄도 홍수도 양반도 없나니…“


이 때에 조정에서는 천주쟁이들을 잡아들이니라. 누군가 이 댁 나으리의 기첩이 천주쟁이라 관아에 밀고하였니라. 고을 수령이 천주쟁이를 잡아다 조정에 바치고, 이 댁 재산을 풀어 구휼하고서는 조정에서 상을 받으려 했다는 말도 떠돌았니라. 업님은 아무 말씀 없으셨니라. 기첩은 배교하지 아니하였고, 나으리도 기첩에게 교화되어 천주를 모셨음을, 입교하신 이후로 둘이 남매처럼 순결하게 살았음을 고백하시니라. 그 댁에는 신위도 없이 성모상만 있었니라. 관에서 자식 잃은 어미를 취조하며 네 서방이 천주쟁이였니라, 하니 작은마님이 순순히 성경과 묵주를 보이시며 “내 진작 미신 따위 믿지 아니하고 하느님 앞에 기도하였으면 죽어서 천당에서 모자가 상봉하였으리라. 그곳은 고통도 괴로움도 없는 만복지소라.” 하시며 관에 끌려가시더라.


“아들과 며느리가 다 천주쟁이거늘, 어찌 그 어미만 아닐 수 있단 말인가.”


큰마님이 고방에 대고 읍소하시니라.


“업님 업님 천석만석 부려주소서. 자손 대대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소서. 우리 아들 살펴 주소서.”


업님이 보이면 집안이 쇠할 징조라. 업님이 남기신 죽을 다른 집 사람이 먹으면 복이 그 집안으로 달아나니라. 업님을 속이면 업님이 노하여 벌을 내리시니라. 큰마님께서 업님을 보셨을 때 업님은 이미 이 댁을 빠져 나가신 것이나 마찬가지였니라. 업님이 남기신 죽을 계집종이 먹었으니 복이 그 쪽으로 도망가니라.


업님과 계집종이 고방 문을 열어 젖히니라. 근방의 주린 자들이 복을 가져가려 몰려드니라. 계집종의 부모형제도 솥에다가 쌀을 퍼가니라. 그렇게 고방이 텅 비었니라.


큰마님은 옥에서 문초를 받았니라. 끝까지 집안의 아무도 천주쟁이가 아니라 우기니 옥졸들이 사금파리 위에 큰마님을 사납게 무릎 꿇리고 댓돌로 누르더라. 감옥은 어둡고 축축하고 아들 며느리의 기도에 묻혀서 큰마님의 다리가 바수어지는 소리는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니라.


업님이 계집종의 등에 업혀 문 밖을 나서시니라. 업님께서 사모관대를 입으시고 문 밖에 쌀가마니를 깔고 앉아 조정대신인 척 집안 노비들에게 다 밖으로 나오라 엄명하시니 업님의 얼굴을 모르는 노비들이 화들짝 놀라 우르르 집 밖으로 달려나가더라.


“이 집안은 나라에 죄를 지었으니 불태우고 집터를 연못으로 만들어 버려라.”


노비들과 마을 사람들이 머뭇거리니 업님이 부싯돌을 치시니라. 불씨가 건조한 나무기둥에 옮겨 붙어 행랑이며 사랑채며 고방이며 노비문서를 집어삼키더라.


“천석을 부려주어도 소용이 없고나. 부디 천당 가시게. 그곳에는 고통도 괴로움도 없나니.”


업님께서 중얼거리며 눈에 불타는 집을 담으시더라. 집이 불탄 자리를 사람들이 파기 시작하니 폐허가 된 고대광실이 땅 밑으로 파묻히니라. 파다 보니 땅 밑에 거대한 뱀이 또아리 튼 형상의 바위가 나오니라. 사람들이 고봉밥을 지어 먹고 힘을 내어 바위를 들어내니라. 거기서 청량한 물이 솟아 나니라. 밤이나 낮이나 가문 날이나 물이 마르지 않으니 사람들이 이 연못을 업님이 주신 호수라 하여 ‘업호’라 부르니라.


나으리와 기첩과 작은 마님은 순교하시고, 큰마님은 옥에서 다리가 망가져서 돌아가시고 아기씨는 관비로 끌려가 수령의 기첩이 되니라. 업님은 사모관대를 호수에 던져 넣으시고 뱀처럼 조용히 마을을 떠나시니라. 업님과 업님의 아내는 먼고을로 떠나 살림을 차리니라. 업님이 있는 곳에 재물이 드니 업님의 아들이 족보를 사서 양반이 되니라.


이 고을은 업님이 떠났으나 업님께서 남겨 주신 호수가 있는 고로, 물이 부족하지 않아 늘 풍년이 들어 부족함이 없니라. 사람들이 밤마다 몰래 모여 기도하니 하느님이 감읍하시어 이 고을에는 오래도록 가뭄도 홍수도 고통도 괴로움도 없었니라. 밤이면 쌀독을 문밖에 놓고 아침에 누군가 주린 자가 쌀을 퍼 가면, 업님이 다녀가셨다 하여 집안에 복이 들어올 거라 기뻐하며 사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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