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켠 Sep 22. 2024

지귀, 불귀신

지귀가 선덕여왕을 사모한 나머지 마음에 불이 일어 탑을 태웠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서럽더라. 서럽다, 우리들이여. 공덕 닦으러 오다.


푸다 푸다 푸다. 푸다, 우(愚)하더라. 우하다, 우리들이여. 욕념 퍼내러 오다.


붓다 붓다 붓다. 붓다, 채우더라. 채우다, 우리들이여. 큰뜻 채우러 오다.


덮다 덮다 덮다. 덮다, 길하더라. 길하다. 우리들이여. 경운(卿雲) 띄우러 오다.”(향가 '풍요')


아직 허리께까지 물이 남은 연못에 풍덩 파문이 일더니, 두두리들의 손발이 멈추고 노래가 멎었나이다.


“이 몸 위에 흙을 덮어 이 자리에 영영 묻히오리다. 이대로 불전 아래 묻혀 호법룡 되어지이다. 이 자리를 무덤 삼아 불전을 이는 무거움이 하룻밤에 연못을 메우는 고됨보다 나으리이다.”


연못에 든 지귀가 탈을 벗어 던지고 옷을 훌훌 벗으니 물동이를 지던 어깨는 쓸려서 살갗이 벗어졌고 흙을 파내던 손은 나무옹이처럼 굳을 살이 박였고 굶주림에 지친 등은 뱃가죽과 맞닿을 지경이니 두두리들이 차마 그 참혹한 몸뚱이를 매정하게 매장하지 못하였나이다. 지귀가 합을 들어 그 안에 든 진액을 부으니 연못물이 금빛으로 물들었나이다.


“다들 들어오시게. 관음보살께서 목욕하신 금물에 씻으면 몸이 금빛으로 면해 연화대좌에 앉아 미륵존상 된다 하니, 마소처럼 이고지고 고된 공덕 쌓지 말고, 이 물에 몸 담그고 큰 깨달음 얻으시게나들.”


이 소란에 두두리들을 다스리는 비형랑이 수하들과 연못에 뛰어들어 채찍을 휘둘렀나이다.


“내 집도 절도 없는 고아들을 모아다 먹이고 입히고 기회를 주었거늘, 네가 감히…”


분기탱천하여 지귀를 매질하니 온몸이 화끈하고 눈 앞이 번쩍이고 피와 물이 사방으로 튀었나이다. 황금빛 연못에 핏방울이 떨어지니 지켜보는 눈에서도 눈물이 그렁하여 참경이 어룽대었나이다. 지귀는 살이 찢기우면서도 발악하듯 비명처럼 속엣말을 토해냈나이다.


“낭의 어미께서 돌아가신 임금님과 동침하시어 오색구름 속에서 낭을 잉태하였단 이야길 지어내셔도, 고아들을 두두리라 꾸미어 하룻밤에 다리를 놓아도, 낭께서 집사보다 높은 관직에 발끝이라도 디밀어 볼 수 있을 것 같소? 도화녀의 아들로 나서 임금의 눈에 들어 궁에서 자랐으면 되었지 않소. 이제 제발 그만 하시오. 귀신인 척 두두리인 척 하느라 하룻밤 만에 몸이 부서져라 다리를 놓고 절을 짓느라 죽고 다친 사람이 몇이오? 낮에는 나오지도 못하여 어둔 밤에 발을 헛디딘 사람이 몇이오? 나는 귀신도 두두리도 아닌, 사람이오. 귀신을 부린단 낭의 신묘한 거짓말에 장단 맞춰 놀아주는데 질렸소. 나도 길달처럼 죽여보시오. 그럼 나 같은 의지가지 없는 귀신들은 낭을 더 두려워하여 달아나버릴 거요. 낭께서 평생 왕명을 받들어 다리 놓고 집 짓고 탑 쌓아도 사골인지 진골인지 하는 놈들은 낭을 임금의 아들이 아니라 발톱에 낀 때로나 여길 것이고.”


“길달은 네놈처럼 두두리였으나 나의 천거로 각간의 양자가 되고 집사 벼슬을 받았음에도 배은망덕하게 백제의 세작질을 하려 달아나서 죽인 게다. 네가 입에 담을 자가 아니다.”


“길달이 아무리 나라에 충성하고 정직하여도 결국 사람은 못 되었소. 각간의 양자가 되면 무엇하오. 두두리라고 괄시당하느라 그 집안에도 못 들어가고 흥륜사 문간에서나 자야 하는 신세였소. 그런 길달이 낭과 같은 집사 벼슬을 받으니 낭께서 그를 세작으로 몰아 죽여 버렸소. 흉년에 외적의 침입에 백성의 울음이 커지면 나라는 망하니, 목탑은 불타고 석탑은 무너져 절터엔 다북쑥 무성할 터, 불상에 금칠할 양곡으로 백성들 배에 기름칠이나 해 달라고 하는 길달을, 여우가 사람 꼴을 하여 나라 망하게 하려 운다고 몰아세우니 달아나지 않고 배기겠소. 그걸 세작질이라 모함했단 말이오? 그래, 두두리 한 놈 죽여서 낭의 벼슬이 높아지더이까?”


비형랑이 더는 참지 못하고 칼과 창을 들고 벽력같이 노성을 지르며 야차와 같은 수하들을 거느리고 지귀에게 달려들었나이다.


“낭께선 평생 문간이나 지키지 마당에도 들어오지 못할 사천왕이로소이다.”


곧 벌어질 가혹하고 참혹할 광경에 겁먹은 두두리들이 토우처럼 말이 없을 새, 영묘사의 스님이 지귀를 불러냈나이다.


“지귀야, 지귀야, 네 속의 화가 삼독(三毒)이 되어 너를 태울까 두렵구나.”


그제야 비형랑이 물러나고 지귀가 연못에서 나오자 두두리들이 남은 물을 퍼내고 흙과 돌을 부으니 연못이 하룻밤에 땅이 되었나이다. 여러 두두리들이 한몸처럼 발구르고 뜀뛰고 다지고 공그르니 절터가 평평판판하여 이후 공사가 평평탄탄하였나이다. 스님이 피와 진액을 씻어주며 지귀에게 가로되,


“늬 어찌 그 귀한 황칠나무 진액을 연못에 풀어 넣었느냐.”


하니 지귀가 대꾸하였나이다.


“황칠나무 진액 발라 금빛으로 빛난다는 금드리댁 기둥에 발리려 칼 맞고 상처에서 진액 내는 황칠나무 신세가 내 신세 같사오니, 금드리댁이 황금빛으로 번쩍여도 황칠나무에 남는 건 칼자욱 뿐이고 왕경에 절이 밤하늘 별만큼 많고 탑이 기러기 날 듯 줄지어도 복록을 받는 건 발원한 진골들일 뿐, 등골 빠지게 일한 내게 남는 건 고단한 육신 밖에 없음이로이다.”


“이생에 공덕을 쌓으면 내세에 귀한 사람으로 나지 않겠느냐.”


“경전을 나르던 소가 그 공덕으로 인간으로 났으나, 과부가 되어 열두 살이 되도록 말을 하지 못하는 아들을 낳았다 하였으니, 사람이로되 사람 취급 못 받고 절 짓고 집 짓는 두두리는 다음생에 어디서 무엇으로 다시 나리이까.”


“그 과부의 아들은 말을 하게 된 이후에 모친의 시신을 지고 지하 연화장으로 갔으니 소의 공덕이 헛된 게 아니니라. 지귀야, 보아라. 네가 닦은 터에 삼층 불각이 오르는구나. 설혹 저 불각이 언젠가 다북쑥 우거진 폐허가 된다 해도 지금 중생을 위무한다면 그걸로도 족하지 않느냐.”


“저 삼층 불각이 삼독(三毒)이오니, 일층은 욕심, 탐(貪)이요, 이층은 성냄, 즉 진(瞋)이요, 3층은 어리석음, 하여 치(癡)로 이루어지나이다.”


두두리들이 기와와 벽돌을 빚어 전탑을 쌓으니 흙덩이를 개고 둥글리고 반죽하고 밀고 밟고 주물러 틀에 넣어 찍어내고 구워내니 비형랑을 닮은 사천왕이 벽돌에 갇히었나이다. 지귀가 틀에 사천왕을 조각하며 뇌까리되,


“어린아이가 장난 삼아 모래탑을 쌓아도 한량없는 복락을 받아 부처가 된다고 하였으니, 이렇게 벽돌 하나하나 빚어 전탑을 쌓으면 나도 부처 될 수 있지 않겠나이까. 스님, 나도 스님처럼 머리 깎게 해 주오.”


“늬는 속에 화가 많아 아니 된다.”


“내 화가 어디서 왔는지 스님은 아시나이다.”


“지귀야, 네가 재주가 많으나 기회가 없구나. 당나라에 가서 빈공과에 급제하겠느냐.”


“당인이 아니면 빈공과에 급제하여도 미관말직만 떠돈다 들었나이다. 당장 당나라까지 갈 뱃삯도 없나이다.”


“늬는 신분이 미천하여 화랑도 될 수 없으니 이 나라에 늬를 받아줄 곳이 없구나.”


“출가하면 종놈도 귀족이랑 동등하게 수행하고 국사(國師)가 될 수 있나이다. 속세에 있을 때 무엇하던 놈이건 불문에선 다 한가지로이다.”


“늬 마음에 있는 말이 무엇이냐. 내가 출가 전에 종놈이었단 말을 하고 싶으냐.”


“출가 전 높았던 나으리나 미천했던 종놈이나 똑같이 수행하고 깨달음은 각자 얻나이다. 그러나 그걸로 질서가 흐트러졌나이까? 변고가 생겼나이까? 종놈이던 스님께서 국통이 되었다고 나라가 망하더이까? 왜 속세에선 뼛골에 박힌 신분대로만 살아야 하니이까.”


“지귀야, 마음에 불을 품으면 삶이 괴로우니라.”


“마음에 불이 있어도 없어도, 사는 것도 죽는 것도 고통이로이다."


“아무래도 늬는 절 짓고 탑 쌓는 공덕은 못 닦겠구나. 이리와 연등을 만들려무나. 연은 진창에 뿌리 내려도 더럽혀지지 아니하고 맑은 심성으로 고결한 꽃을 피우나니 늬도 이 나라에서 연과 같이 살려무나.”


지귀가 개신개신 느릿느릿 꼼질대니 스님이 “해찰부리느라 해탈은 못할 놈이로고.” 하며 지귀를 남겨두고 나갔나이다. 스님이 나가자 지귀가 연등 만들던 색지를 오리고 접고 손 사이에 비비고 돌돌 말고 살짝 잡아 구기고 주름잡고 꽃잎을 겹겹이 겹치고 꽃술을 하나하나 심고 숨을 불어넣어 모란꽃을 만드니 마치 새벽에 이슬 맺힌 듯 생생하고 자태가 위풍당당하여 과연 꽃 중의 꽃 화왕(花王)다웠나이다. 법당 안 연화대좌에는 부처님이 앉으시고 부처님 무릎 위엔 종이모란을 품은 지귀가 앉고 절 마당엔 연등이 걸리고 탑돌이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손마다 연등이 들렸나이다. 연등만발하여 밤이 낮같이 환하고 이곳이 극락인가 싶으니 이날이 중춘 보름이라. 지귀가 밖을 구경하다가 두두리의 탈을 쓰고 홀로 연등 없이 반대방향으로 탑돌이를 하여 사람을 놀래키고 꽃 사이 벌처럼 사람 사이를 누비며 다니어도 사람들이 한 방향을 볼 새, 임금이 신하들을 이끌고 탑돌이를 하였나이다. 임금이 간절하게 나라의 평안과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나 진지왕의 손자요, 천명공주의 아들인 김춘추란 자가 곁에서 앙잘거리니,


“선왕께서 아들이 없으셔서 국인들이 그 따님을 왕으로 세우니, 이는 법도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라, 나라에 가뭄이 들고 지진이 나고 백제가 변경을 침입하고 밤만한 우박이 떨어진다고들 하옵니다.”


임금이 의연히 대하시니,


“홀아비와 과부, 고아와 노인을 구제하고, 죄수를 사면하고, 금년의 조세를 면제하고,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으니 사람의 덕에 하늘이 감읍하시고 부처님의 지혜가 사방을 비추기를 기다리노라.”


“임금이 여자라,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어 당태종이 업수이 여겨 조공을 받고서도 답례로 꽃씨 석 되와 모란 그림만 보냈은즉 이는 일국 군주의 지혜를 시험하는 것이라. 임금께서는 뭐라 답하시겠사옵니까.”


“꽃에 날아드는 나비와 벌이 그려져 있지 않으니 모란은 향기 없는 꽃이라. 당태종이 내게 후사를 잇게 해 줄 남편이 없음을 희롱하여 향기 없는 꽃을 그려 보내고 그 씨앗을 심어 확인케 하는 심사를 내 모르겠는가. 어떤가, 공의 뜻도 이와 같은가.”


“무슨 뜻을 말씀하시옵니까.”


“선택할 수도 바꿀 수도 없는 여인이란 점을 들어 으르는 저의가 무엇인가. 공의 조부처럼 폐위시키기라도 하려는가.”


“소신은 그저 이 나라를 염려할 뿐이옵니다. 소신의 충심을 의심치 마옵소서.”


“공의 나라를 향한 충절은 의심치 않으나 공이 어떤 신하인지는 모르노라. 신하에는 중신과 권신이 있고 충신과 직신이 있고 간신과 사신이 있으니, 중신은 일신을 돌보지 않고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있을 때에도 충을 다 하여 나라를 안정시키는 신하이며, 권신은 권력을 좇아 사욕을 채우는 자이고, 충신은 군주와의 의리를 지켜 사를 잊고 공을 추구하며, 간신은 임금을 기만하고 농락하여 백성을 우롱하고 사익을 챙기나, 직신은 임금에게 숨김이 없이 간하여 바른 길로 이끌고, 사신은 간사하여 아첨하니, 공은 어떤 신하인가. 직신인 척 하는 간신이요, 중신인 척 하는 권신이요, 충신인 척 하는 사신 아닌가. 지금도 조부가 폐위되지 않았으면 공의 머리에 얹었을 금관을 허공에 그리고 있지 않은가.”


“말씀대로 소신이 임금의 자리를 탐한다면 외침에 시달리는 약한 나라보다는 삼국을 통일할 강한 나라의 임금 자리를 원하오니, 국가의 중신이 되고 임금의 충신이 되어 나라를 부강케 하고자 하옵니다.”


“그러려면 당의 원조가 필요하고, 당에서 괄시하는 여자는 왕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뜻인가.”


“성골 남자가 없으면 진골 남자 중에서라도 왕을 세우고 당에 사신을 보냄이 어떠하옵니까.”


“국인들이 성조황고라 칭하며 세운 왕을 황제의 가벼운 말대로 바꾸려는가. 두어라. 홀로 부처님께 절하며 마음을 맑게 가라앉히겠으니, 모두 물러가라.”


지귀가 한발 앞서 불당으로 돌아와 어릴 적처럼 불상에 업혀 부처님 등 뒤에 숨으니 절하는 임금은 보이지 않고 다만 소리만 들렸나이다. 허리를 굽힐 때 붉은 비단옷이 서걱이고 무릎을 꿇을 때 녹옥이 달랑대며 고두례할 때 금팔찌가 잘강잘강. 불상 뒤에서 주령구를 똑또그르 굴리니 ‘흰 여우를 좇으라’. 임금이 놀라 고개를 드니 지귀가 흰옷 입고 탈을 쓰고 곁문으로 나갔나이다. 임금이 급히 지귀의 그림자를 밟으니 지귀가 재주 넘고 공중제비를 돌며 날듯이 솔숲으로 들었나이다. 어느새 새벽안개가 희부윰하여 귀기가 깃든 듯 한 검은 소나무 숲에서 지귀가 진달래 핀 바위에 앉아 돌아보며 노래를 불렀나이다.


“붉은 바위 끝에 잡은 손 놓해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시던


꽃을 꺾어 바치오리이다."(향가 '헌화가')


임금이 허락하자 지귀가 품에서 꺼내 바친 종이 모란 세 송이가 희고 붉고 자줏빛이니 당태종이 보낸 그림 속 모란이 나타난 듯 현현하였나이다.


“모란은 부귀영화를 상징하니 나라가 평안하고 백성이 풍요로우며, 또한 모란은 꽃의 왕이니 세 송이 모란을 보건대 신라에 여자 임금이 셋이나 나오며, 흰 색은 상서로우니 왕의 즉위가 나라에 길한 일이며, 붉은 색은 벽사의 의미가 있으니 나라의 적이 물러나며, 자줏빛은 존귀함을 뜻하니 임금의 치세 내내 칭송받으실 지어다.”


“종이꽃은 향기가 없어 벌과 나비가 날아들지 않나니,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꽃나무는 가지를 꺾어 심어도 잎이 나고 꽃이 피니 본줄기가 강건하면 구태여 꽃과 나비가 필요치 않으며, 모란은 이미 왕의 풍모를 갖추었으니 구태여 향기가 필요치 않음이오니다.”


“법당에서 기도하던 중 나타났기에 부처님의 현신인 줄 알고 따라왔거늘 꿀처럼 달큼한 말만 하니 귀신인가 간신인가.”


“나는 누구의 신하가 못될 귀신이오니다.”


“어떤 연유로 나에게 모습을 보였느냐.”


“나는 재주가 있으나 기회가 없고 임금은 위엄이 없으나 덕이 있고 신분이 귀하나 여자의 몸이니 같은 처지오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관직을 주랴 재물을 주랴.”


“집사 정도 줄 거면 관직은 말씀도 마소서. 상대등 아니면 관심 없으니. 내게 줄 재물이면 백성이나 구휼하소서. 다만 임금의 신임을 원하니 증표 하나면 족하오니다.”


임금이 손목에서 팔찌 하나를 빼내어 건네니 지귀가 받아 들고 몸을 솟구쳐 굽은 소나무 위로 올라 안개 속으로 사라지니 용이 승천하는 형상 같았나이다. 임금이 팔찌를 빼낸 쪽 손 안에서 주령구를 굴리다 손을 펼쳐보니 ‘혼자 노래 부르고 크게 웃으라’하여 “붉은 바위 끝에 잡은 손 놓해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시던 꽃을 꺾어 바치오리이다” 노래하니 끝에는 울음이라 이슬에 신발이 젖고 안개에 지화가 시들며 눈물에 금팔찌가 녹슬고 봄비에 연등이 빛을 잃었나이다.


지귀가 아침에야 돌아오니 스님이 돌아보며 “늬 어딜 다녀 왔느냐”하고


“솔숲에 다녀왔나이다”대답을 들으니


고개를 끄덕이며


“탑돌이 하다가 남녀가 눈 맞으면 몸 맞대는 일도 흔하니 네가 낮에는 출가하겠다 하고 밤에는 장가가겠다 하느냐.”


농을 건네나 지귀가 한숨을 쉬며


“나라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도 괴로움이 있으면 정녕 괴롭지 않은 사람은 없단 말이오니까.”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사람의 세상에는 시기와 질투와 욕심이 있으니 임금이라 하더라도 이를 피할 수는 없느니라.”


“길달도 지금쯤이면 무엇으로 다시 태어났으려나. 지금쯤이면 다시 난 길달이 몇 살일지 헤아리고 그 또래 아이들을 보면 누가 길달일까 찾아보다가도 아예 태어나지 말고, 태어났음 늙지도 병들지도 죽지도 않기를 바라오니다.”


“늬 아직도 길달을 생각하느냐.”


“길달이 임금 곁에 있었으면 중신은 못되더라도 충신은 되었을 것이나 이 나라에서는 그를 받아주지 않으니, 선화공주님 혼인하실 때 따라가 백제에서 뜻을 펼치려도 하였으나 그만 죽었으니 이른바 하늘의 뜻이라는 게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나이다.”


“늬 아직도 그 일을 곱씹느냐.”


“길달처럼 두두리에서 벗어나 왕궁에서 직신이 되고 싶었으나 비형랑이 그를 시기하는고로 다시는 두두리를 천거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애꿎은 길달을 원망하였으니 악업이요, 길달이 군공을 세울 마음을 품고 낭산에 올라 백제군의 동태를 살필 때 말리지 않아 비형랑이 그를 모함할 빌미를 주었으니 악업이요, 비형랑이 그를 죽이라 두두리들을 보낼 때 명을 받들어 갔으니 악업이요, 가서도 구해내지 못하였으니 악업이요, 죽고 나서 돌아보지 않았으니 악업이요. 이리도 악업을 쌓았으니 나는 죽어서 영영 팔열지옥에서 헤매리이다.”


“늬 길달과 친했느냐.”


“길달이 스님과 같은 말을 했나이다. 지귀야, 너나 나나 재주가 있으나 기회가 없구나. 길달이 죽기 전 내게는 혹여나 기회가 올 지 모른다며 백제로 몰래 넘어갈 길을 알려주었나이다. 그 길로 가려 하나이다.”


“왜 이제사 떠나려느냐.”


“임금을 뵈었더니 사람에 한계를 두는 나라가 더욱 싫어졌나이다.”


지귀가 스님 전에 절하고 그날 밤 비형랑 몰래 절을 떠났나이다. 궁에서는 임금이 병이 들었는데 백약이 무효하니 이벌찬을 보내 나라 안을 두루 돌며 백성을 구휼케 하고 황룡사에서 승려를 모아 불경을 강론케 하매 황룡사의 기도가 옥체에는 닿지 아니하고 하늘에는 닿았나이다. 여름에 해가 쨍쨍하고 날이 덥고 태풍이 없으니 가을에 수확이 차고 넘쳐 배를 두드리나 동해 바닷물은 핏물든 듯 물들어 물고기가 배를 허옇게 뒤집어 떠오르니 백성과 신하들이 금빛 수확은 하늘에 감사하고 붉은 바다는 임금의 부덕을 의심하나이다.


지귀가 백제로 넘어갈 기회를 보느라 길달이 알려준 대로 여근곡에 머물 즈음 숨어있는 백제군을 발견하니 백제군에 길을 알려줄까 왕궁에 매복을 알릴까 고심했나이다. 지귀가 이윽고 마음을 정하고 왕궁으로 향하니 마음에서 죽은 길달을 쫓고 산 임금을 좇음이며 노래 끝에 울음 울던 임금을 회상했음이었나이다.


“임금이시여! 임금이시여! 고할 말이 있나이다! 저의 말을 들으소서!”


지귀가 백주대로에 임금이 다니는 행차의 끝을 따르며 닫힌 궁궐 문을 두드리며 땅을 치고 가슴을 치며 외칠 적에 군졸들이 지귀를 임금을 사모하다가 미쳐버린 작자라 하며 끌어내고 밀어내고 내몰아 치워버리니 간절한 목소리가 임금의 귀에는 닿지 않았나이다. 지귀가 영묘사로 돌아와 비형랑 앞에 무릎 꿇고 임금을 뵙게 하고 말을 전해달라 하나 비형랑 또한 지귀를 미치광이 취급하였나이다.


“그리 성내고 달아나 넓은 세상 나가니 네 분수를 알겠느냐. 네놈이 여기서는 두두리나 될 것을 밖에서는 빌어 먹는 거지 밖에 더 되겠느냐. 내가 집사 밖에 못 되거늘 너는 무어 그리 대단한 게 될 줄 알았더냐. 출세를 하려거든 차라리 여기서 공덕 닦아 다시 태어남이 빠르리라.”


지귀가 울분이 치어올라 목구멍이 막히고 가슴에 불덩이가 얹힌 것 같거늘 모란꽃 품었던 자리에 금팔찌를 문지르며 차가운 금붙이로 뜨거운 심화를 가라앉히려 하나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나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 하릴없이 애먼 옥문지에 돌을 던지니 얼음장 깨지고 겨울잠 개구리가 깨어나니 한겨울에 개구리가 성난 군병처럼 사납게 울어댄 까닭이 여기 있었나이다. 이 소식에 임금께서 영묘사에 행차하시니 손 안에 든 주령구에 ‘흰 여우를 좇으라’만 닳았더이다.



임금께서 주위를 물리시고 홀로 법당에서 주령구를 굴리시니 지귀가 탈 쓰지 않은 얼굴을 드러냈나이다. 금팔찌를 내보이고 여근곡에서 본 바를 상세히 고하며 섧게 아뢰되,


“개구리 소리는 들리고 사람 목소린 안 들리시옵니까.”


“들려도 고갤 돌릴 수 없도다.”


“고귀하신 임금이 미천한 백성에게 조언을 들었다곤 하실 순 없는 것이옵니까. 차라리 귀신이나 미물이 신묘한 이적을 행했다 함이 임금의 말씀으로 적당하옵니까. 이럴 줄 알았다면 탈을 쓴 두두리로 남지 얼굴을 드러낸 사람으로 나서지 말 걸 그랬사옵니다.”


“무엇을 바라 내 앞에 나섰느냐.”


“임금께서 원하시는 것을 원하고 바라시는 바를 바라고 싶사옵니다.”


“금드리댁을 지으라면 짓고 궁궐을 세우라면 세우고 탑을 올리라면 올리겠느냐.”


“그리하겠사옵니다.”


“무엇을 지어도 좋다. 영영 무너지지 않을 것을 지으라.”


“그런 것은 없사옵니다. 나무는 불타고 돌은 마모되며 종내는 흙 속에 파묻힐 것이옵니다.”


“세상의 질서 또한 그런가. 영원한 건 없으니, 여자는 왕이 될 수 없다 하였으나 내가 왕이 되었고 내가 죽으면 성골이 아니어도 왕이 되겠는가.”


“석가모니께서 열반하시고 56억 7천 만년이 지나 미륵부처님께서 사바세계에 오시면 사람이 8만 세를 산다 하였으니, 과연 그 때에도 남녀가 있고 신분이 있겠사옵니까.”


“그 때가 너무 멀구나.”


“그리하면 현세에서 재물과 벼슬을 주옵소서. 임금의 옆자리를 원하옵니다.”


“임금에겐 위엄이 있어야 하니 아래와 뒤에는 둘 수 있어도 옆자리에 누구도 둘 수 없다. 진흥왕께서는 서축의 아육왕에게서 철과 금을 받아 황룡사에 장륙존상을 모시었고 진평왕께오선 하늘에서 옥대를 받으셨으니 나는 황룡사에 구층 목탑을 올려 삼보를 완성하리라. 삼보가 있는 나라는 하늘과 부처님의 살핌을 받는 고로 사람이 감히 침략할 수 없다고들 하니 이로써 누구도 여왕의 치세를 염려치 못하게 하고 백성을 안심시키고자 하니 그 탑이 오를 때까지 두두리로 살아라.”


“덕만으로는 족하지 않아 위엄이 있어야만 임금이 되옵니까. 임금이 누구인지도 몰라도 부른 배 두드리며 걱정이 없게 하는 임금이 성군이요, 어진 인재를 두루 등용하여 나라를 평안케 하는 임금이 명군이요, 뜻은 있으나 어리석어 간신 모리배를 기용하는 임금이 혼군이요,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제멋대로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하는 임금이 폭군이오니 임금께서는 어떠하시옵니까.”


“나라에 변란이 끊이지 않으니 성군은 못 되고 인재를 내치진 않으나 찾아서 기용하지도 아니 하니 명군도 아니요, 혼군이나 폭군만 겨우 면하여 나라를 무사히 지켜 신라가 천년만년 이어지게만 하면 임금의 자리가 칭송받을 만 하지는 아니어도 부끄럽지는 않으리라. 바라건대 전란이 그치고 나라에 꽃과 향이 가득하거든 금관을 벗고 양위하고 출가하여 불문에 귀의코자 하노라.”


“그 때에 낭산 남쪽에 초가를 지어두면 오시겠사옵니까. 한 세상만 살다 가려고 부러 썩어 없어질 초가를 짓사옵니다. 임금이시여, 그 때까지 부디 성군이 되소서.”


임금이 궁으로 돌아가 신하들을 마주하고 명하니,


“개구리 시끄럽게 우는 소리가 병사들 군장 부딪는 소리와 유사하니 한겨울에 개구리가 노해서 우는 뜻은 적이 침입함을 경고함이라. 개구리가 옥문지에서 우니 옥문은 다른말로 여근이라. 여자는 음이고, 음은 흰색이고 흰색은 서쪽이라. 서쪽에 가면 여근곡이란 곳이 있으니 그곳에 각간 알천과 필탄을 보내 적군을 기습하라.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힘을 잃는 법이니 적군이 전멸하리라.”


과연 임금의 예언대로 백제군 오백 명이 한 명도 남김없이 여근곡에서 죽임 당하니 사람들이 임금을 신묘히 여겼나이다. 임금이 신하들을 이끌고 남산에 올라 바위마다 새겨진 천 분의 부처님이 천 송이 꽃과 천 가지 향으로 화하여 괴로움을 위로하길 기도했나이다. 정상에 올라 낭산이 보이는가 홀로 짚어볼 때에 재매정택 마당에서 연기가 오르나 임금이 짐짓 아무 말 하지 아니 하니 주위 신하들이 안절부절못하여 아뢰었나이다.


“저 불은 유신공이 누이를 태워 죽이는 불이라 하옵나이다.”


임금께서 조소하셨나이다.


“연기만 나고 불길은 보이지 않으니 젖은 나무에 불을 붙인 것이라. 염려치 말라.”


“누이가 혼인하지 않고 잉태하였으니 가문의 수치라 하여 죽인다 하옵니다.”


“유신공의 아비도 야합하였거늘 그 딸이 혼인 전에 남자를 대한 것이 수치스러울 일이더냐. 가문의 수치라면 왜 굳이 마당에 끌어내 죽인단 말이더냐. 안에서 남들 눈에 띄지 않고 정히 죽을 수 있도록 흰 비단을 보내준다 전하라.”


“회임한 아이가 춘추공의 아이라 하옵니다.”


“춘추공은 이미 부인이 있지 않느냐. 그 부인도 곧 산달이라 하지 않았느냐.”


그제야 김춘추가 나섰나이다.


“왕실에 암살과 역모가 흔하듯 산모가 아이 낳다 죽는 일도 흔하옵니다.”


“유신공은 진골이라 하나 망국인 가야의 후손이고 춘추공은 폐위되었다 하나 왕의 손자요 전왕의 사위이니 이 혼인은 격이 맞지 않노라.”


“소신에게 외치를 맡기시고 유신에게 병력을 맡기셨으니 이 혼인으로 서로 신뢰하며 고구려와 백제를 점령하여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고자 하옵니다.”


“신하를 역신으로 몰아 일가붙이를 멸하는 일도 왕실의 암살 못지 않게 흔하거늘 공을 중히 기용한 까닭을 아는가.”


“말씀하시옵소서.”


“공이 임금에겐 충성하지 않아도 나라에는 충성함을 알며, 공이 재주가 있어서 그리 하였느니라. 나라에 성골 여자가 있는데 진골 남자가 왕이 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왕실에 성골 남자가 없어 다음 왕으로 승만을 세우고자 하니 유신공과 더불어 대대손손 더욱 충성하여 나라의 근심을 없게 하라.”


이에 김춘추가 김유신의 누이와 혼인하니 침향목으로 깎아  대모갑으로 장식한 침대를 금박입힌 수레에 싣고 호랑이 가죽으로 덮어 신혼집으로 향하니 거리 가득 침향이 은은하였나이다. 공작미와 비취모 깃으로 지은 옷을 신부에게 입히우고 슬슬전 빗을 꽂으니 자태가 임금 못지 않았나이다. 금은보화가 불로장생 신선들 산다는 삼신산처럼 쌓여 드니 수저와 밥그릇까지도 금이었나이다. 풍악소리 서라벌에 울려 퍼지고 금그릇에 담긴 산해진미 냄새만도 감미로웠나이다.


지귀가 적막한 절간에서 시끄러운 거리를 내다보며 탄식하니,


“아아, 저리하면 되었구나. 한바탕 꿈마냥 거짓놀음 한번이면 되었구나. 그러나 임금의 은덕은 뼈에 품계가 없는 자에게는 미치지 못하리니.”


스님이 기겁하여 지귀를 붙잡았나이다.


“늬 지금 무슨 생각 하느냐.”


지귀가 속마음을 반은 가리고 반은 내보이며 대꾸하였나이다.


“스님, 구걸하던 부부가 어린애는 비형랑에 팔고 자기들은 부잣집에 의탁하여 종이 되었다 들었나이다. 저 금수저 한 벌만 내 줬어도 아이가 부모를 잃지 않았을 터인즉 원통하고 절통하나이다. 금수저로 밥술 뜨는 이들이 위엄이 있으나 덕이 없으니 천불천탑을 세워도 신라는 미륵불께서 오시기 전에 망할 나라이니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십 년이 되던 해에 왕궁 후원의 백모란이 일제히 시들었으니 서쪽 성이 위기에 처할 징조라. 백제가 침략하여 서쪽 성 사십 여 개를 함락시키니 대야성에서 김춘추의 딸과 사위가 죽었나이다. 이는 김춘추의 사위가 부하 검일의 처를 취하여 검일이 이에 원한을 품고 백제와 내통하여 창고에 불을 질러 성문을 열게 한 탓이라, 사위를 벌하지 않은 김춘추의 과도 없지 않다 하겠나이다. 김춘추가 이를 분히 여겨 고구려의 군사를 빌려 백제를 정벌하고자 하나 고구려 왕이 김춘추를 구금하니 임금께서 김유신을 보내 고구려 변경을 밟게 하여 김춘추를 돌려받았나이다.


임금이 고구려의 협조를 얻지 못하자 당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 고승을 급히 귀국케 하였으나 당에서 돌아온 승려는 도리어 임금이 덕이 있으나 위엄이 없어 외적이 신라를 침해한다 하였나이다. 임금이 한탄하되, 곡옥만한 사내들이 이래도 저래도 위엄을 찾으니 크고 높고 우뚝 선 것을 세우면 위의당당하겠느냐 하였나이다.


임금께서 당에 사신을 보내시니 진골 귀족의 자색 옷을 입은 자라. 사신에 들릴 황칠진액을 마련하느라 바닷가의 황칠나무를 난자하니 나무겉에 칼자욱이 낭자하였나이다. 바닷가 백성들이 낮이면 해풍에 할퀴이고 밤이면 바닷모기에 뜯기며 진액을 받으니 나무마저 금빛 눈물을 뚝뚝 흘리며 통곡하는 듯 하였나이다. 당 태종이 공물을 든 사신에게 하문하되


“내가 세 가지 계책을 제시할 것인즉, 어느 계책을 따를지 답하라. 첫째는 내 거란과 말갈을 거느리고 요동을 치면 1년간은 적국이 신라를 칠 여력이 없을 것이니 그 동안 군대를 정비하여 1년 후에 외적을 막아내는 것이다. 둘째는 신라에 당군의 갑옷과 깃발을 보낼 것인즉 이를 허수아비에 입혀 세워놓으면 고구려와 백제가 멀리서 이를 보고 도망할 것이다. 첫번째와 두 번째는 미봉책이니 너는 세 번째 궁극의 해결책을 듣겠느냐.”


하니 사신이 “예”라고 할 수 밖에 없었나이다.


“너희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았으니 모든 나라가 업수이 여긴 즉, 황족 중 위엄있는 자를 보내 신라의 왕으로 삼고 군대를 보내 보호하면 어느 나라도 감히 신라 국경에 말발굽을 들이지 못할 것이다. 어느 계책을 따르겠는가?”


사신이 “예”라고만 하니 당 태종이 왼고개를 틀어 사신을 보지 않고 탄식하였나이다.


“’예’말고는 할 줄 아는 말이 없으니 어리석고 모자라서 나라의 위급함을 알리고 원조를 청할 만한 인물은 아니로다. 예전에 향기 없는 모란 세 송이 그림을 보내어 왕이 여자임을 조롱하였을 때 ‘모란은 부귀영화를 상징하니 나라가 평안하고 백성이 풍요로우며, 세 송이 모란을 보건대 신라에 여자 임금이 셋이나 나오며, 흰 색은 상서로우니 왕의 즉위가 나라에 길한 일이며, 붉은 색은 벽사의 의미가 있으니 나라의 적이 물러나며, 자줏빛은 존귀함을 뜻하니 임금의 치세 내내 칭송받으며, 꽃나무는 가지를 꺾어 심어도 뿌리를 내리니 구태여 꽃과 나비가 필요치 않다’고 받아치던 기개 있던 나라는 어디로 갔는가.”


당 태종이 고구려에 조서를 보내 신라를 공격치 말라 경고하나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따르지 않겠다 전하였나이다. 임금이 당과 고구려의 뜻을 알고 김유신에게 먼저 백제를 공격하게 하여 일곱 성을 회복하고 백제에 화친을 청하니 백제왕이 장인 아비지를 보내었나이다.


임금이 마침내 황룡사에 구층 목탑을 세워 제1층으로 일본을, 2층으로 중화를, 3층으로 오월을, 4층으로 탁라를, 5층으로 응유를, 6층으로 말갈을, 7층으로 단국을, 8층으로 여적을, 9층으로 예맥의 침입을 막고자 하였나이다. 아비지가 두두리 이백 명을 이끌고 나무를 깎고 조각하여 목탑을 세우던 중 꿈에 백제가 멸망하니 깨어서도 마음이 어지러워 손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나이이다. 이 때에 두두리 지귀가 아비지에게 다가왔나이다.


“황룡사에 호법룡이 있다는 걸 아시오니까. 영묘사 지을 적에 하룻밤 안에 연못을 메워 절터를 닦는 게 고되어 차라리 연못에 묻혀 호법룡 되길 원한 적이 있었나이다. 호법룡은 되지 못 하고 사람도 되지 못하니 신라가 지옥 같고 지옥이 신라 같아 백제로 가려 하였나이다.”


아비지가 지귀와 마주 웃었나이다.


“백제도 신라나 다를 바 없다.”


지귀가 옷깃을 바로잡으며 말했나이다.


“그렇다면 어느 나라가 흥하고 망하건 임금과 신하들이나 관직과 재물을 잃을 뿐이지 우리 같은 백성들은 잃을 게 있겠사오니까.”


“네 말이 옳다.”


아비지가 다시 조각도를 잡고 지귀가 나무를 켜고 나무 껍질을 벗기고 표면을 곱게 다듬어 허연 목탑에 황칠나무 진액을 입혔나이다. 휘황한 금빛 기둥을 세우고 푸른 용마루를 얹으니 임금을 우러르듯 까마득히 높이 봐야 하였나이다. 그 높이와 화려함이 왕경을 위압하니 다시는 누구도 감히 임금에게 위엄이 없다고는 하지 못할 탑이었나이다. 탑이 한 층 한 층 오르던 중에 아비지가 지귀를 불러냈나이다.


“나야 내 이름을 걸고 지으니 진력을 다 하건만 너는 이름도 남지 않고 공덕 쌓는 일도 관심 없고 남들처럼 나라의 안위를 염려치도 않으니 무엇 하러 이리 열심히 하느냐. 목탑을 짓는 일도 연못을 메우는 일 못지 않게 고되거늘.”


“낭산 남쪽에 집을 짓고 같이 살고픈 사람이 있으나 이제까지 전탑만 만들어 봤기로 목탑을 지으며 나무 다루는 법을 익히고자 하나이다.”


“그럼 집 짓는 걸 배우지 무엇하러 목탑 짓는 걸 배우느냐. 목탑과 집은 아주 같진 않은데.”


“그 사람은 태양이고 나는 달이니 영영 만나지는 못할 인연이나이다. 이대로 얼굴 한 번 보지 못할 것임을 아나이다. 이 목탑을 낭산 남쪽 집이라 여기고 짓나이다. 일층에 하나씩 구층이 구천이라 여기고 기원하되 이몸이 죽어 구천을 떠돌며 구중궁궐 위를 훨훨 날아다니길 바라나이다.”


황룡사 목탑이 완성되는 날까지 임금은 오지 않았나이다. 완성된 탑의 위용이 마치 황룡이 승천하는 듯 하였으나 땅에 붙잡히어 끝내 하늘로 훌쩍 오르지는 못할 모양이기도 하였나이다.


지귀가 황룡사 목탑을 세운 후에 탑돌이를 하며 소원을 빌 때에 발걸음이 어지러웠나이다. 영묘사로 돌아와 전에 없이 맑고 잔잔한 낯으로 기와를 구우니 그 모습이 오히려 태풍 오기 전의 바다 같아 불안하였나이다. 달 밝은 밤에 지귀가 횃불을 들고 영묘사 옥문지 앞을 서성이며 중얼거렸나이다.


“임금께서 원하시고 바라시는 바대로 탑을 세웠으니 이제 나는 원하고 바라는 바가 없고, 황룡사가 있으니 영묘사가 필요치 않고 끝내 집사로 죽은 비형랑도 이미 죽은 길달도 여기서 죽은 두두리의 혼백도 이쯤이면 환생을 하였나이다.”


스님이 지귀를 안쓰러워하니


“늬 아직도 마음의 불이 꺼지질 않았느냐.”


하여 금당과 경루, 남문 낭루에 새끼줄을 금줄처럼 두르며 타일렀나이다.


“심화가 치밀면 애꿎은 민가는 태우지 말고 이 금줄 바깥으로만 태우라. 이로써 마음 속의 불귀신을 멀리 바다 밖에 내쫓아 가까이하지 말아라.”


지귀가 영묘사 석탑의 사천왕 벽돌을 애만지며 눈을 감았나이다.


“오히려 마음의 불이 꺼져 더 이상 이생에 몸이 필요치 않나이다. 임금께서 예 오시면 수막새를 보시라 전해 주시길 청하나이다.”


지귀가 탑을 돌며 발원문을 읽으매 탑을 도는 걸음걸음 눈물이 발자국 안에 고였나이다.


“영묘사의 두두리 지귀가 대자대비하신 부처님 전에 비나이다.

미천한 이 몸을 소신하니

가난한 난타가 머리카락을 팔아 공양한 작은 등불만이

화려한 뭇 등불 가운데 홀로 남음과 같은 공덕을 닦고자 함이오니다.

이로써 내세에 사람으로 나지 않기를 간절히 원하나이다.

진지왕께오선 사후에 귀신으로 화하여 도화녀와 동침하여 비형랑을 내셨으니

원컨대 이몸도 그와 같이 귀신 되어지이다.

길달이 여우로 화하여 도망하였으나 비형랑에게 잡혀 죽은 고로

축생으로 나길 꺼리나이다.

지옥도 극락도 가지 아니하고 인세를 떠도는 귀신되어지이다.

이대로 불귀신으로 화하여 금관을 녹이고 석탑을 태우길 바라나이다.

차라리 불귀신 되어지이다.”


발원문을 사른 지귀가 노래 부르며 춤추며 자기 몸에 불을 붙이니 그 불이 영묘사를 활활 태우나 스님이 금줄을 쳐 둔 곳만은 타지 않았나이다.


“아아, 임금이시여, 임금이시여,

간 봄 그리매 모든 것 시름하는데,

아름다운 얼굴이 주름지도록 세월이 지나더라도

눈 돌이킬 사이에라도 만나지이다.

그리운 마음에 세상은 변치 않아

다북쑥 우거진 초가에서라도 잘 밤이 있으리이까.”(향가 '모죽지랑가')


임금이 영묘사에서 연기 아닌 불길이 치솟음을 보고 급히 오나 검게 탄 재 위에 오직 금팔찌만 타지 않고 사리처럼 반짝였나이다. 뜨거운 불이 목구멍을 막으니 눈물이 왈칵 솟아 임금께서 고개 드니 수막새 인면와당마다 사람의 얼굴이 활짝 웃음지었나이다. 지귀가 이 와당을 만들 적에 옥문지에 제 얼굴을 비춰 보고 손으로 제 얼굴을 만져 보나 웃음이 무엇인지 몰라 휘영청 보름달과 활짝 핀 모란과 부처님의 미소와 임금을 떠올렸더니 와당이 점점 천 송이 꽃과 천 가지 향처럼 웃었나이다. 임금이 주령구를 굴리니 ‘혼자 노래하고 크게 웃으라’가 나와 울며 웃으며 노래할 때 수막새 얼굴이 임금을 마주 보며 크게 더 크게 미소지었나이다.


“죽고 사는 길이 예 있으매 나는 간다 말도 못 하고 가는가.

이른 바람 떨어질 잎은 한가지에 나고서도 가는 곳 모르온저.

도리천에서 만날 날 도닦아 기다리리다.”(향가 '제망매가')


임금이 궁으로 돌아와 신하들에게 명하였나이다.


“내가 죽을 날을 알려줄 터이니 그 날에 나를 도리천에 장사지내라.”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디옵니까.”하니 임금이 “낭산 남쪽이라.”하고 더는 말이 없었나이다. 도리천에서는 남녀의 구별이 있으나 음욕이 오래지 않고, 번뇌가 얕고 잔잔하나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등 비담이 “임금이 위엄이 없다”하여 난을 일으키니 그간의 염려와 근심이 심화(心火)가 되어 임금이 스러졌나이다. 황룡사 구층목탑도 임금을 지키지는 못 하였으니 불길이 사위듯 임금의 명이 사그라들었나이다. 모월 모일 임금께서 말씀하신 날에 큰 별이 지고, 후일에 왕릉 아래 사천왕사가 세워져 낭산 남쪽 왕릉이 도리천이 되었나이다.

이전 08화 해피 고 럭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