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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켠 Sep 22. 2024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1930년대, 카프KAPF작가와 여공의 투쟁과 사랑

유령들이 조선을 떠돌고 있다. 본정(本町)의 밤에 네온사인이 돋으면 발 없는 혼부라들이 미쓰코시 백화점 쇼윈도 마네킨걸의 새빨간 에나멜 구두를 구경한다. 모던보이는 룸펜이 되고 모던걸은 현모양처가 되련마는 오늘밤은 카페에서 ‘코히- 다이스키-(커피가 좋아)'. 어저께 시골서 올라온 아귀들은 공동묘지 토막굴에 몸을 뉜다. 묘지 소각장에서는 시체 태우는 악취가 튀밥처럼 날리고 사람 살도 고기라고 횟배가 동한다. 파리한 얼굴, 곱은 손, 독에 절은 귀신들이 공장에서 나와 어린애를 어른다. 그네들은 피로에 절어 반은 시체, 반은 인간 반인반시 시인(屍人)이 된다. 소시 적에 비단치마 입었다던 기생은 기둥서방 잘못 만나 백납분에 상한 얼굴 헝클어진 머리로 찢어진 무명치마 둘러 입고 동냥구걸 다니다가 불법으로 모루히네(모르핀) 주사 놓는 주사옥에 흘러 든다. 주사옥 마당에는 폐병환자들 모루히네 맞으면서 흰 눈 위에 각혈하여 히노마루(일장기)를 그린다. 무산자에 사상을 주입해야 할 혁명가는 제 몸에 모루히네 주사하는 자신귀(刺身鬼)가 되어 버렸다. 차가운 계절에 얇은 세비로 소매 걷어 올린 앙상한 팔뚝에 선명한 주사자국 보고 돌아서려던 차에 자신귀가 나를 불렀다.


“이담 씨.”


“내 이름은 ‘이담’이 아니외다.”


“알고 있습니다. 배후를 대라며 고문 당하다가 혼절하면서 몽롱한 정신으로 ‘이담 씨’라고 중얼거렸는데, 며칠 뒤에 순사를 농락했다며 거꾸로 매달렸으니까요. 덕분에 동지들은 몸을 피할 시간을 벌었지요. 이담 씨, 형무소 있을 때 나를 버티게 한 건 막스도 레닌도 아닌 이담 씨였습니다. 형무소에서 나오자마자 단성사(영화관)로 갔었지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모루히네가 혈관에 흐르는 손이 내 손을 맞잡았다.


“내가 동지의 아지트키퍼(공산당원이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평범한 부부로 위장할 때 배우자 역을 맡은 상대방)요. 우리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공장의 파업을 하려고 하니, 학습 모임을 지도하고 파업을 지원해 주시오.”


“기꺼이 그리하지요. 내 필명은 ‘주적’이오. ‘붉을 주(朱)’에 ‘붉을 적(赤)’이요.”



내가 그를 구했다고 믿었다. 간도로 가던 기차를 다 타지 아니하고 경성역에 홀로 내렸던 날, 교복 입은 학생들을 보며 나도 경성에선 학교도 다니고 신여성이 되어야지 했다. 갈 곳 없어 종로 네 거리에서 서성이다가 학생들이 가는 대로 단성사까지 갔다. 비장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학생들에게서 ‘대한 독립 만세’가 터져 나왔다. ‘병합은 짐이 한 바가 아니다.’ 황제는 죽기 전에 그렇게 말했다. 유폐되어 말하지 못했던 황제의 장례식에서 청년들은 곡하지 아니하였다. 칠 년 전에도 그러했다. 일경들이 만세 부르던 팔을 꺾고 달려 나가던 발을 밟았다. 교복을 입고 있던 학생의 겁먹은 눈빛을 마주쳤다.


“나 좀…”


일경보다 빨리 그를 안았다. 깍지 낀 손으로 그를 붙잡았다. 달싹이던 입술을 내 입술로 짓눌렀다. 일경이 ‘요즘 어린 것들’을 경멸했다. 나도 일경을 노려보았다. 더는 죽을 황제가 없어 마지막이 된 만세가 사그라들어 적막해진 거리에서 그를 놓아 주었다.


그를 다시 만나려고 매일 단성사 앞으로 갔다. 조선 인민의 아편은 활동사진이었다. 썩어가는 입, 검붉은 잇몸, 시커먼 목구멍으로 토해내는 울음들 속에서 그의 말간 얼굴을 다시 만났다. 말없는 그의 손을 잡고 활동사진을 볼 때 누군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관객 속에 앉아 있던 순사가 뛰쳐나와 만세 부른 자를 잡아갔다. 나는 그의 손을 더 힘주어 잡았다. 그때까지도 나는 믿었다. 내가 그를 구했다고.


누가 잡혀가든 말든 활동사진은 돌아갔다. 변사가 끌려나가는 관객 등 뒤로 주제가를 불렀다. 싸우다 아니 되면 이 세상에다 불을 지르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주인공 영진이 묶인 손으로 아리랑 고개를 넘어갔다. 시큼한 땀내와 오줌지린내와 후덥지근한 체취가 들끓던 극장에서 나와 밝은 거리에서 그가 내 이름을 물었다.


“이름이…?”


예쁠 것도 귀할 것도 없는 이름, 순이. 나도 주연 여배우인 ‘신홍련’ 같은 이름이면 선뜻 답했으련마는.


“이담, 이다음에…”


“알아듣기 어려워서, 다시 말씀해 주시면…”


나는 도망쳤다. 그 후로 그를 만나지 못했다. 그도 나도, 광막한 광야를 달렸다.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무엇을 찾으려 다녔을까.



“죄책감이었습니다. 벗들이 퇴학을 당해가며 만세운동을 조직했을 때 나는 겁을 먹었지요. 남들이 만세를 부를 때 나는 침묵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문학에 투신한 건 그 때 하지 아니했던 말을 글로 하려 했던 겁니다. 작가는 총이요, 글은 탄환입니다. 푸로예술(프롤레타리아 예술)을 무기로 막스주의를 선전하려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가인 나부터 무산계급의 일원으로서 투쟁의 전위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 이후엔, 자리가 사람을 만들었지요. 다들 잡혀가는 바람에 순식간에 요직에 올랐으니까요.”


얼어붙은 가파른 오르막길에서 그는 아주 작은 바람에도 촛불처럼 흔들렸다. 그 때 내 이름을 알려 주었으면, 만세 부르고 몇 달만 감옥에서 살다 나왔으면, 그는 겉만 빨갛고 속은 하얀 능금처럼, 능글능글 잘 살았을까. 나는 이제 그에게 내 바람을 얹을 수가 없다. 그가 다시 휘청였다. 밑창이 닳은 낡은 구두가 자꾸 미끄러졌다. 업으면 그의 발이 땅에 끌릴 것 같아 마주보고 두 팔로 잡았다.


“그 구두로는 못 걸으니 내 발 위에 올라서시오. 내가 앞을 보고 갈 터이니 날 잡고 내게 기대요.”


그가 내 어깨를 잡고 나는 그의 허리를 잡고 나는 ‘사의 찬미’를 흥얼대고 달밤의 블루스처럼 우리는 노래에 맞춰 한 발 한 발 눈 위에 한 쌍의 발자국을 찍었다. 거의 다 와서 넘어지는 바람에 눈 속에 파묻혀 버리자 그가 “여기가 현해탄인가”하고 농담 했다. 문이 빼뚜름해 겨울이 침입하는 방 안에선 마네킹걸이 고단한 발을 주물렀다.


‘이제 그만 나가 주.’


마네킹걸은 벗어뒀던 빨간 에나멜 구두를 신고 내 발자국을 그대로 되밟아 나갔다.


“나는 배우가 될까 했었다오. 형무소 간 줄도 모르고. 활동사진에서 날 봤음 하고. 그런데 나는 신홍련이 만치 곱지는 않으니까. 그 담엔 데파트걸이 되려고 했는데, 식모살이하다 보니 학교를 가지 못 하였고 어찌 하다 보니 지금은 고무공장 노동자가 되었고, 늘 글을 배우려 하였는데 잘 안 되었소.”


“글을 배우면 뭘 하려 합니까?”


“소설을 쓰고 싶소. 그런데 뭘 쓸지는 아직 정하지 못 하였소.”


“공황으로 발생한 초과이윤을 조선에 전가하기 위해 조선인을 착취하고 노동자를 억압하는 일본 제국주의 뿌르(부르주아)들을 척결하는 푸로레타리아의 투쟁과 승리를 소설로 보여주시오. 노동자의 참상을 생생하게 쓰기에 노동자 그 자신만큼 적합한 작가는 없습니다.”


“있는 걸 그대로 쓸 거면 르뽀를 쓰지 무엇 하러 소설을 쓴단 말요.”


“아직까지 조선에서 투쟁의 방향성을 제시할 만치 성공한 쟁의가 없으니, 소설에서라도 ‘로망’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로망을 쓸 거면 푸로문학이 아니라 요새 인기 있는 연애소설을 쓰지. 작가님은 뭘 쓰시오?”


“극작을 합니다. 인민의 수준과 흥미에 맞는 문예로 계급투쟁을 선동하려면, 활동사진이나 연극만한 게 없지요. 글을 모르는 무산자도 이입하기 쉬우니까요.”


“동지가 활동사진을 찍으면 나는 그걸 소설로 써도 되겠소. 요새는 활동사진 인기가 좋아서 그런 소설이 유행한다더이다.”


“변사가 있었을 땐 모호하게 찍어서 일단 검열을 통과한 다음에 순사 눈치 보면서 극장에서 대사를 바꿀 수 있었는데, 요새는 변사가 없어져서 모든 극장에 동일하게 상영될 대본이 사전에 나와야 하니, 내가 생전에 검열을 통과할 대본을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둘이 자려면 모로 누워야 하는 방에서 그는 그대로 옷을 입고 누웠다.


“내 몸에는 흉터가 많아요. 날 보고 겁을 먹거나 가여워 하는 걸 원치 않습니다.”


“다 형무소에서 생긴 겁니까?”


그가 동그랗게 움츠렸다. 방 안에 달이 들었다. 달을 품에 안았다. 따듯했다.


“심문을 할 때 먼저 옷을 홀딱 벗기지요. 그럼 사람이 수치심에 움츠러듭니다. 그 상태에서 결박당하여 모욕당할 때 사람의 언어가 아닌 짐승의 비명을 지르는 게 작가란 말입니까. 나는 달아나지 않기 위해 씁니다. 용감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며 나약한 나를 잊으려고.”


“그럼 우리 공장 노동쟁의 얘기 쓰시면 되겠소.”


“두렵지 아니합니까.”


“모르겠소, 아직은.”


달이 사위었는가. 자리가 차워서 눈을 떴더니 그의 자리가 비었다. 벤또가 머리맡에 놓였다.


“낮에는 소제(청소)도 해 놓아야겠습니다. 방 꼴이 형사가 가택수색하고 난 자리 같으니. 나는 이제 잡혀가면 입 다물고 버틸 수 있는 게 하루 밖에 안 될 것 같은데, 하루 안에 신변정리하고 도주하려면 방구석을 이 모양으로 도깨비 소굴로 두면 아니 되지요.“


“내가 너무 주적 동지를 착취하는 거 같은데.”


“노동하는 사람에게 가사까지 하라는 게 도리어 착취 아닙니까.”


그가 품에서 내 신발을 꺼내 놓았다. 부끄러워 확 낚아챘다.


“더럽고 냄새 나는 걸 뭐 하러…”


“노동하는 발이 부끄러울 게 뭐 있습니까. 가는 길에 발 시리지 않게 가십시오.”


하루 종일 쭈그리고 접착제 냄새에 눈이 시리고 머리가 멍하고 양쌀에 된장뿐인 벤또밥을 씹지도 아니하고 삼켜도 먼지 구덩이에서 머리칼이 백발 되고 숨이 가빠도 신발 속에서 발을 꼼지락거릴 때마다 여간 행복스럽지 아니했다. 손이 저리고 다리가 무거워도 건성건성 일한다고 감독관이 트집잡아 뺨을 치고 멀쩡한 고무신을 2등품으로 후려쳐 임은을 깎아도 관계치 아니했다. 맞은편에서 일하던 여직공이 품에서 빨간 구두를 꺼내 보이며 내 눈을 빤히 봐도 시선을 피하지 아니했다. 허리 한 번 못 펴고 바람 한 번 못 쐬고 밖이 밝은지 어둔지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 모르고 변소도 제대로 못 가고 열여섯 시간을 꼬박 노동해도 힘들지 아니했다.



내 방에는 고양이가 있다. 고양이는 저 혼자 종일 빈 방에서 이것저것 어지르며 놀다가 몸을 웅크리고 졸다가 나를 맞는다. 고양이의 보드라운 털을 애만지면 어느새 무릎에 기대어 골골댄다.


내 방에는 그가 있다. 바닥에 엎질러진 밀가루풀이 말라붙고 부업으로 붙이다 만 봉투가 흩어졌다. 말라서 척추 마디가 짚일 듯 한 등을 쓸면 내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모히-모히-“ 신음한다. 차라리 중독이라도 되었으면. 너무 통증이 심하면 중독도 되지 아니 한댔다.



우리에겐 생활이 결여되어 있었다. 공장에 일이 없는 날이면 카페에 갔다. 10전을 벌면 코히를 마시고 40전을 모으면 삐루(맥주)를 먹지 밥을 왜 먹어. 공장마냥 어두침침한 카페에서 쨔즈를 들으며 레뷰딴스를 구경했다. 몸이 망가진 그는 딴스를 보는 것도 추는 것도 좋아했다. 루즈를 바른 여급이 빨간 구두를 신고 다리를 번쩍 들며 탭댄스를 추다가 내게 다가왔다.


‘신여성은 부담스럽고 기생은 구식이고 요새는 여급이 연애상대로 최고라던데. 배우가 되어 봤자 일 없으면 카페에서 여급이나 하지.’


여급은 무대로 돌아가고 그가 내 손을 끌었다. 경성에선 밤마다 카페마다 가정집마다 금지된 딴스를 추었다. 5전이나 10전을 내면 하룻밤 동안 퇴폐적인 자본주의의 향락을 누릴 수 있었다. 외국 배우들처럼 실크 중절모에 양복 입고 단장 짚은 모던보이와 여우목도리에 금시계 찬 모던걸이 쌍쌍이 몸을 기대고 가슴을 맞대고 다리를 얽었다.


“구여성도 아니고 신여성도 아니고 모던걸도 아니고 여학생도 아니고 부인도 아니고 나는 대체 무얼까.”


“우리 같은 사람들을 막스걸, 막스보이라 합디다.”


가진 것 없는 막스보이와 빤드의 쨔즈에 맞춰 스윙딴스를 추었다. 원 스텝에 삶이 위협하고 투 스텝에 죽음이 유혹했다.


“내 생각 어데까지 했소.”


“갈 데까지.”


“그게 어데까지요. 북간도? 연해주?”


“아침을 내가 하고 저녁을 동지가 하고, 내가 소제를 하고 동지가 빨래를 하고, 낮에는 노동하고 밤에는 글 써서 현상문예도 당선되고, 서로 부은 발을 주물러 주고…돌벽을 긁다가 뭉툭해진 손톱으로, 맞잡은 두 손을 상상했습니다. 거칠어진 손이 투박해지고 어느새 그 손 사이에 작고 어린 손도 끼어들고, 주름져 쪼글쪼글해질 때까지 놓지 않는 손들을.”


“그렇게 살면 아니 되오?”


“내가 이 몸으로는 일 년을 버틸지 못 버틸지 모릅니다.”



새벽별 뜰 때 아이에 젖 물리고 빽빽 우는 아이 아랫목에 뉘고 헐레벌떡 벤또 보자기 싸들고 출근했다 퇴근하는 언니네 단칸방에 아이 구경하러 온 양 둘러 앉아 파업얘기를 했다. 그는 심각하게 방바닥을 짚었다.


“기금 모아놨습니까? 해고당한 후에 생활의 방도가 있습니까? 경기가 어렵다 어렵다 해도 자본가들은 노동자보다 더 오래 버틸 수 있어요. 기금도 어느 정도 있었고, 시내 각 부문 노동자들이 모두 연대하여 원산 전체가 단결하여 쟁의했던 원산노련도 실패했습니다. 일개 공장 파업 정도는 분쇄하기가 어렵지 아니합니다. 요새 경성에는 이농하고 올라온 농민 출신 실업자가 널렸습니다. 전부 다 해고해도 대체하여 고용할 사람 많습니다. 대체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상황에서 서둘러 파업하려는 이유가 뭡니까?”


“지금 고무신 한 켤레에 2전 5리씩 하루에 삼사십 족을 만드는데 공장에서는 이제 한 켤레에 2전만 주겠다 하여요. 쌀값도 올랐는데 이걸로는 생활이 안 되어요.”


“해고당하면 그 2전도 못 받습니다.”


“파업하면 당하는 손해보다는 5리의 임은을 깎지 아니하는 게 손해가 덜 나지 않을까요?”


“자본가들은 임은지출보다 노동자들의 단결을 더 꺼립니다.”


“원산노련은 함남노동회의 훼방과 나약한 지도자 동지의 타협시도로 실패하였지만은, 우리는 아사동맹도 불사할 거여요.”


“각자 사정이 다 다른데, 개심하는 동지가 참말로 하나도 없을 것 같습니까?“


“왜 시작도 전에 패배주의적 태도를 견지하시오? 설날에 물량이 몰릴 때를 기해 쟁의를 하니 효과가 클 것이오만.”


“준비했다가 추석을 노리십시오.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까?”


“노동자를 해고하려는 감독관을 해고하려 하오이다.”


“악독한 마름을 해고하면 더 악랄한 놈이 오고, 조선인 지주를 몰아내면 일본인 지주가 그 땅을 차지하는 게 세상입니다.”


“혜린이가 감독에게 겁탈당했소. 혜린이가 공장을 나가 실업자가 되게 두지는 않을 거요. 감독관을 해고하고, 다음 번 감독관이 이악한 놈이면 그 놈도 해고할 거요. 감독관이 이 위기를 타개하려고 공장장에게 임은 문제를 들고 나온 흉의에도 말려들지 않을 거요. 하루라도 속히 공장에서 그 놈을 아니 보겠소.”


“그렇다면 파업을 미룰 수도 아니할 수도 없지요. 현장을 잘 아는 건 여러분이니 파업은 여러분이 주도하고 당에서는 지원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나에게 학습모임을 지도해 달라고 하였지요. 왜 사상을 학습하려 하십니까?”


“우리의 생각을 명확하게 표현할 사상의 언어가 필요하여요.”


“사상보다 가갸거겨를 먼저 배우는 게 어떠합니까? 내가 주입식으로 빠르게 사상을 학습시킬 순 있지만, 글자를 배우면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책을 읽고 사상을 소화시킬 수 있습니다.”


공장의 기계가 입을 다물고 뽀얀 먼지가 눈을 감고 무거운 공기가 귀를 막은 밤에 공장 뒷편 마당에선 각자 집에서 덜어 나온 기름으로 불을 밝혔다. 피곤한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올려 별을 띄웠다. 그가 송판으로 만든 칠판의 글자를 짚었다.


“이게 기역입니다.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 할 때 그 기역입니다.”



오빠는 낫으로 일본인 지주와 조선인 마름의 목을 그었다. 까막눈이던 아버지는 면서기가 들이민 서류에 하란 대로 이름을 그리고 땅을 뺏겼다. 그게 한이 되어 남은 땅마저 모두 팔아 오빠를 읍내 학교에 보냈다. 오빠가 글을 배우고 졸업하여 면서기가 되면 땅을 되찾을 거라 했다. 그런 오빠는 만세운동에 휩쓸렸다. 빼앗긴 땅에 황금벼가 열리는데 왜 기름진 쌀은 밤새워 짠 가마니에 실려 일본으로 가고 우리는 조와 보리만 먹는가. 왜 시골에선 쌀을 수탈해 가고 경성에선 양쌀을 수입해 먹는가. 왜 일본인 지주는 풍년 든 땅에 수리시설을 해 준다며 조선인 지주의 땅을 헐값에 앗아 가는가. 왜 자기 땅에서 마름이 된 조선인은 땅을 판 푼돈을 춘궁기 소작농에게 빌려주어 돈놀음을 하고, 돈을 못 갚는 소작농 애비는 절망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다 딸을 빚 대신 기생으로 팔아 넘기는가. 왜 그 딸은 오빠가 사랑하던 순하고 곱던 사람인가. 왜 우리는 하루 종일 낫질을 하여도 손에 쥘 쌀 한 줌이 없는가. 대지처럼 굳세던 농민들을 나무 껍질을 벗겨 먹으며 떠돌게 한 유산계급은 죄가 없는데, 왜 그들을 죽인 우리 오빠는 살인자가 되어 목이 졸리는가. 왜 일본인은 백주에 조선 땅을 사고 조선인은 야밤에 간도 가는 기차를 타는가.


오빠가 죽던 날 들판에 불을 놓았다. 농민들이 가질 수 없는 쌀은 지주도 가질 수 없어야 했다. 들판은 동트듯 타올랐다. 농민들은 고향을 떠나고 지주는 들판에 공장을 세우고 신작로를 놓았다. 오빠는 졸업하고 돈을 벌면 누이동생들 학교부터 보내주겠다 했다. 오빠의 동생인 나는 간도로 도망치지 않고 홀로 경성에 내렸다. 낫을 들고 나서던 오빠의 소매를 잡지 아니했던 나는 만세 부르려던 그의 입을 막고 손을 잡았다.



그가 먼저 읽고 노동자들이 따라 읽었다.


“가갸거겨”


“가갸거겨”


그는 이를 악물었다.


“고교구규그기”


“고교구규그기”


주먹을 쥐었다.


“나냐너녀”


“나냐너녀”


미간을 찌푸렸다. 남들이 글자를 읽는 동안 그가 고통을 참는 모습을 새겼다. 그는 다음 시간까지 자기 이름을 써 오라는 숙제를 냈다.


“나 필명 하나 지어 주.”


“내가 정신이 혼미한 중에 동지의 이름을 발설해 버리면 어찌합니까.”


“그럼 주적 동지가 외롭지 아니할 거요. 내가 감옥의 옆방으로 가면 되니까.”


“동지는 감옥 오지 말고 멀리 가십시오. 나는 죽어서까지 관에 갇히기는 싫으니까 내 유해를 동지가 가시는 걸음마다 이국의 바다와 땅에 뿌려 주십시오그려.”


“아주 멀리 가도 되오? 갈데까지?”


“어데까지 가려합니까?”


“영국에 가서 여권운동자들 만나서 투표권 투쟁을 성공한 비결을 듣고,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수학하여 이론적으로도 무장하려 하오. 무산자이지만 무식자는 아니 되려고. 그럴 때마다 날 소개할 이름이 필요하오.”


그가 흰 눈 위에 ‘불’이란 뜻의 한자를 두 번 썼다. 손끝의 온기를 따라 눈이 녹았다.


“되고픈 것도 하고픈 것도 많으니 불꽃처럼 사셔야 겠습니다그려. ’아름다울 담(炎)’은 ‘불꽃 염(炎)’이랑 같은 글자입니다. 성은, 붉을 홍(紅)으로 하지요. 홍이란 글자는 옛날 중국에서 수공업하는 여성 노동자를 뜻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홍염’. 마음에 드십니까.”


그를 따라 눈 위에 몇 번이고 이름을 따라 썼다. 홍염. 붉은 불꽃. 주적. 붉고 붉다.


“글자 공부하는 게 재밌습니까.”


“여지껏 글자도 모르는 게 부끄러워서 속히 학습하려고…”


그가 늘 끼고 다니던 노트를 펼쳤다. 영어처럼 생긴 글자가 빽빽했다.


“나는 에스페란토 어를 공부하지요. 글자 배우는 게 무어 부끄럽습니까.”


“에스페란토가 무어요?”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할 때에 어느 나라 말로 소통하여야 겠습니까. 어느 누구도 자국어를 타국민에게 강요할 수 없으니, 모든 인류가 강압 없이 평화롭게 대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언어가 에스페란토입니다.”


“조선글자 다 배우면 에스페란토 어도 갈쳐 줄 수 있소?”


“그러지요. 우리가 에스페란토 말로 대화도 하고 편지도 쓰면 퍽 재미나겠습니다. 남들 앞에서 비밀 얘기도 할 수 있고.”



공장 언니들은 종종 애들을 데려 와서 같이 공부를 했다. 월사금이 없어 학교를 보내지 못 하니 여기서라도 글자를 학습시키려 했다. 그는 미래의 기수들에게 퍽 다정하게 묻곤 했다.


“우리 어린 피오닐은 커서 무엇이 되련.”


“은행에 취업해서 돈 많이 벌어서 옴마 호강시켜 드릴 테야요.”


“공산혁명을 하면 은행가들이 없어지고 국가에서 운영하는 은행밖에 없고 사유재산도 없어지고 돈도 쓸모 없어질 터인데?”


“나는 의사가 되어 아픈 사람 돈 안 받고 치료해줄 테야요.”


“이중에 커서 노동자가 되고픈 사람은 아무도 없고나.”


“오빠는 커서 무엇이 되어요?”


“나는 다 커서 이제 아무것도 계획할 수도 없고 약속할 수도 없단다. 동지 여러분들은 무엇이 되려 하십니까?”


“일단은 노동쟁의를 성공으로 이끌려 하여요.”


“여러분은 꽃입니다. 열매가 맺히지 못할 수도 있고, 맺힌다 하여도 꽃이 다 진 이후입니다. 그래도 쟁의를 하려 하십니까?”


“여성이 꽃이라니, 너무 진부한 수사 아니요? 그럼 주적 동지는 무엇이오?”


“나는 거름입니다. 내 시체를 썩혀서 꽃을 피우십시오. 쟁의가 시작되면, 일경은 자본가 편을 들어 중재하겠다며 개입하여 선동한 수모자를 대라고 할 겁니다. 그들은 여성 노동자들이 주도적으로 쟁의를 했다고는 믿지 아니하고 배후를 대라고 할 겁니다. 그럼 내 이름을 대십시오. 내가 잡혀 들어가면 수모자로 지목된 수 명은 금방 풀려날 것이외다. 그러고나면 아무 일 없었던 듯 도로 취업하십시오.”


눈 위에 피로 쓴 글자처럼, 목에서 피를 토하듯 소릴 질렀다.


“소영웅 놀음 집어치우시오!”


“희생을 최소화할 방도를 알려드리는 겁니다. 이 공장에서 아무도 형무소로 보내지 않으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좀 덜 맞아보겠다고 동지의 이름과 내 목숨을 저울질하는 비굴함을 압니까?”


“퇴근 때마다 훔치는 게 없나 점검한다는 핑계로 감독관이 저고리 안에 손을 넣을 때 해고를 우려하여 아무 말 못 하는 비굴함을 알고, 다른 노동자가 이유 없이 치마가 찢길 정도로 맞을 때에 내가 아님을 안도하며 감독 눈에 띄지 않으려 아무 것도 못 본 척 고개를 처박고 작업하는 비참함을 아오. 이제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쟁의를 하는 것이니 경험이 있는 주적 동지가 파업전략을 모색하라는 거요. 우리는, 누구도 희생시키지 아니할 거요.”


누구도 거름으로 쓰지 아니할 거다. 척박한 붉은 흙에서도 동백이 피고 산딸기가 열린다. 꽃이 핀다. 눈물이 마른다. 피 눈물이 마른다.


“쟁의가 시작되면 공장 측에서는 한 명씩 불러서 회유코자 할 겁니다. 지금 취업하면 파업을 용서해 줄 것이고, 취업치 아니하면 해고할 것이라고. 그러면 다같이 단결하여 취업치 아니하겠다고, 혹은 몸이 아파 일을 못 하겠다고 해야 하지만 그 중에 형편이 어려운 사람이 하나라도 개심하면, 출근하는 자가 둘로, 셋으로 늘어나고, 파업은 실패하게 됩니다.”


강철 같은 위대하고 용감한 각오가 없어도 붉은 심장 하나 가지고 우리는 투쟁해야 한다. 공장 노동자들 속에서 퍼머넨트 머리를 하고 루즈를 바른 여배우를 건너다 보면서 나도 입술을 물었다가 떼었다.


“언니들, 우리끼리는 재미스럽게 합시다. 주적 동지가 감독관 역을 맡을 겁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을 연기하는 배우가 되어요. 주령 언니는 강주령 역을 연기하는 배우가 되는 거여요. 주적 동지는 작가니까, 우리가 하는 말을 대사로 쓰시오. 그 대사를 가지고 입에 붙을 때까지 연습하여 감독관과 공장주 앞에서 떨지 않고 연극을 할 거여요.”


그는 의자에 앉아 노트를 펼쳤다.


“나는 아무 대사도 하지 않고 듣기만 할 겁니다. 여러분이 말씀하십시오.”


홍염 : (단단한 의지와 열망으로) 우리는 임은을 켤레당 2전 5리로 보전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오. 다른 고무공장 남성노동자와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위하여 임은을 인상해 주시오. 하루 8시간 노동하고 매주 1일의 유급휴가를 주시오. 여성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야간작업의 폐지와 산전산후 3주의 휴가, 탁아소의 설치를 요구하오.


현순임 : (홍염에게 속삭이며) 얘, 너무 많은 걸 들이미는 거 아니니?


홍염 : 우리가 퇴근길에 소원 하나씩 말할 때 다 했던 말들인데 이제 와서 뭘 새삼스레 놀라우.


주적 : (감독관인 듯 얄밉게) 너무 이상적인 거 아닌가?


홍염 : 로망이 없으면 어떻게 혁명을 하오? 우리가 지금 요구하면 자식세대가 노동할 때는 이런 세상이 올 거요. 그리고, 감독관은 입 다무시오. 우리가 말할 테니.


(홍염 퇴장하고 강주령 입장한다.)


강주령 : 우리는 단순히 일개 공장의 임은 인하를 우려치 아니 합니다. 이 일개 공장의 임은 인하가 경성 시내, 조선 반도, 만국 공장 푸로레타리아의 임은 인하와 착취로 번질까 저어하여 저항함이외다.


이정금 : 우는 아이 젖먹이고 자는 아이 깨워 새벽밥 먹이느라 1분을 늦어도 5전, 벌금을 매기고, 환기 아니 되는 공장에서 감기 걸려 코 풀고 기침하면 일 아니한다고 10전, 별 보며 출근하여 달 보며 퇴근하다 낮에 잠깐 졸면 15전 벌금을 매기고서 (점점 격해지며) 지는 공장주랑 밤마다 15원 짜리 마작판을 다니냐, 이 개새끼야!


박양희 : 벌금을 못 내도 패고, 내도 패고, 지 기분 시원찮으면 손 올리고, 일 갈쳐 준다며 뒤에서 잡고 주물럭대고, 우리는 감독관 네 놈과 하루라도 같은 공장에 있을 수 없으니 네가 나가라!


김혜린 : (감독관 앞에 나서기도 전부터 느껴 울다가 울음을 못 그치고) 다른 언니가 먼저 하셔요.


강주령 : (썩 나서며) 감독관이 추근댈 때 우리는 그게 가당치 않은 수작질이라는 걸 알았지만 적당히 참으며 임은을 받았소. 감독관이 지분거릴 때 싫은 기색을 내면 머리채를 잡히고 옷도 벗기어 맞았지만 어찌할 방도가 없다며 고갤 숙이고 체념 하였소.


현순임 : (우는 김혜린을 와락 안으며 같이 운다.) 얘, 미안타. 미안해. 내가 잘못했다. 감독관이 얌전한 너한테 세루치마도 사다주고 신발물량도 몰아줄 때, 물정 모르는 네가 원래 이런 줄만 알고 가만히 있을 때, 나는 네가 아양 떤다고 뒤에서 욕을 하였다. 내가 그러지 아니하였으면, 시골서 올라온 철모르는 애가 유성기 보여준다는 말에 감독관 방에 가지 않고, 누구든 잡고 언니 언니 하면서 뭔가 이상타고 상의했을 터인데…


김혜린 : 아아, 언니들, 내가 잘못하였소. 내 잘못이요. 내가 허영에 취해 김용순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혜린이로 살려고 해서 이리 되었어요. 감독관이 나한테만 잘해주는 게 다른 의도가 있는 줄을 눈치 못 챘어요. 바보같이. 언니들이 나 때문에 해고되면 어찌 되어요? 명예보다 생활이 더 중요하잖아요.


홍염 :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혜린을 에워싸며) 넌 잘못한 거 없으니 겁먹지 마라. 우리가 진작에 이게 아니라고 말하고, 저놈 몰아내자고 작당하였어야 했는데, 우리는 같이 일하면서도 안개 속에서, 다른 이가 보이지 않는다고 혼자 헤매며 참으려고만 했소. 혜린아, 우리는 이제 아무도 안개 속에 두지 않을 거다. (주적 퇴장하고 주적의 자리에 감독관이 앉는다.) 우리는, 1인씩 협상하지 아니할 거외다. 우리에게는 수모자가 없소. 모든 협상은 단결된 노동자 전체가 아니면 하지 아니합니다.


그 다음 날부터 아무도 출근을 하지 아니하였다. 공장 측에서는 끈질기게 집집마다 찾아와 회유도 하고 사람을 보내어 신변을 감시하기도 하였다. 노동자들은 제멋대로 집안에 들어오는 감독관에게 정신차리라고 찬물을 바가지로 끼얹었다. 직공들은 몇 명씩 손잡고 공장정문 앞에서 요구조건을 외치다가 기마순사가 달려오면 일시에 손을 놓고 골목으로 산으로 신나게 달음박질쳤다. 그는 방 안에 틀어박혀 공장에서 쓰던 극본을 이어 쓰고 고쳐 썼다.


“다 쓰면 신건설사에 투고할 겁니다. 하루 8시간만 노동하고 퇴근 후에 연극 연습을 하고, 주 1일 유급휴가일에 극장무대에 올라 노동자들이 그들의 언어로 자신을 직접 연기 하면 배우나 관객 모두 얼마나 이입이 잘 되겠습니까.”


“단성사에서 공연하오?”


“거기는 요새 신파극이나 하지요. 카프 서기장이 검열을 피하려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극장을 알아본답디다.”


“누가 주인공이오?”


“동지가 말했지요. 주인공은 없다고.”


“주적 배우도 출연하오?”


“대사 없이 무대에 앉아서 받아적는 연기만 합니다.”


“그럼 나랑 주적 배우 키스 장면을 넣어주시오. 대사가 없으면 뭐라도 해야지, 출연료를 날로 먹을 거요? 요새 외국영화에서 키스가 나오면 영화관이 조용하니 관객들 눈이 커지고 침 삼키는 소리만 들린다던데. 아무리 대중에 계급이념을 고취시키기 위한 연극이래도 제작비는 건져야지 않겠소.”


“그런 건 홍염 작가가 나중에 소설에다가 쓰시오.”


“좋은 작가가 되려면 경험이 많아야 한다지 않소.”


그가 내 소매를 움켜 잡았다. 여윈 몸이 다가왔다. 그를 여의고 싶지 않았다.


“좋은 작가도 되고 훌륭한 혁명가도 되고, 되고 싶은 거 다 되고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십시오. 홍염 씨, 평생의 동지가 되어 달란 말도 아내가 되어 달란 말도 나는 못 하겠으니, 대신에, 나 대신에 오래 살아서, 맘껏 사랑하고, 하고픈 말 다 하고 읽고픈 거 다 읽고 먹고픈 거 다 먹고, 추고픈 춤 다 추고 새처럼 훨훨 날아다니십시오. 홍염 씨는 용감한 사람이니까.”


셋째 손가락 첫마디에 굳은 살이 박힌 작가의 손을 노동자의 단단한 손으로 잡았다. 그 때 내가 그에게 입맞춤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했겠지요.”


그가 떨리는 내 턱에 손가락을 대고 달싹이는 내 입술을 자기 입술로 가만히 눌렀다. 어릴 적에 봉숭아 꽃잎을 짓이겨 손톱에 물을 들인 적이 있었다. 첫눈 올 때까지 손톱에 초승달만큼이라도 꽃물이 남아 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댔다. 그 때 내 손톱에 희미한 붉은 달이 걸려 있었던가.



공장 측에서는 항복을 선언했다. 우리가 승리했다고 믿었다. 8시간 근무에 맞추어 느지막히 나섰다. 그는 여전히 머리맡에 벤또를 놓아 두었다.


“오늘은 외출을 좀 할 거니까…퇴근 시간 맛춰서 공장 앞에서 봅시다.”


외국영화에서 봤던 배우처럼, 그는 출근하는 내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배웅해주었다.




감독관은 그대로였다. 공장주 옆에는 순사가 서 있었다. 감독관이 노동자 명부를 뒤적였다.


“경찰서에서는 우리 공장에서 외부인을 개입시켜 공산주의 지도이론을 연구하고 적색노조를 조직코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제보를 입수하였든 바,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위장취업했던 일부 직공만 제하고 나머지는 파업의 책임을 묻지 아니하고 공장주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로 재취업을 시키기로 하였다. 에-이로써 우리 공장에서는 한 켤레에 2전씩으로 회계한 임은협상이 타결됨을 선언한다. 호명하는 직공부터 공장 안으로 들어가 작업에 착수하기 바란다. 먼저, 애가 셋인 이정금이, 서방이 간도 가서 소식이 없는 강주령이, 남동생들 학비 대는 김혜린이,”


기만당하면 안 된다. 회유당하면 안 된다. 생활이 의지를 집어삼켰다고 동지를 비난하면 아니된다.공장 내에 스파이가 있다고 의심하면 아니 된다. 분열하면 아니 된다. 단결된 노동자의 힘만큼 위대한 건 없다.


“우리는 공산주의건, 적색노조건 아무것도 몰라요. 그냥 다시 다같이 일하게 해 주셔요.”


혜린이가 벌벌 떨며 빌었다. 순임 언니가 거들었다.


“노동자 하나라도 해고하고 다시 뽑으려면, 일손 하나가 줄어든 기간 동안은 공장에도 손해 아닙니까? 일단은 전원 취업시키고 새로 고용하면 그 때 가서 해고하든가 하면 되지 않아요.”


양희 언니가 나섰다.


“무지렁이 노동자들이 무얼 알겠습니까. 그냥 임은이 줄어드니까 살기 힘들어서 욱 하는 마음에 파업한 거 뿐이지. 지렁이가 꿈틀한 거 이상도 이하도 아니우.”


노동자들은 일단 모두 공장으로 돌아갔다. 글자를 아는 노동자들은 벤또 뚜껑에, 치마폭에 숨겨 은밀히 쪽지를 돌렸다. 그동안의 손해를 벌충한다는 핑계로, 일하는 게 재미스럽다는 거짓말로, 노예적 노동을 하던 노동자들은 감독관이 퇴근하자마자 공장 문을 닫아 걸었다.


“이거는 망할 놈의 서방 볼기짝이다!”


“이거는 재수 없는 감독관 면상이다!”


“이거는 파업 막는 순사놈들 거시기다!”


노동은 싸고 가벼우니 비싸고 무거운 기계를 파괴했다. 박살난 기계로 공장문을 막고 바리케이드를 쳤다. 후련했다. 두려웠다. 땀이 나고 웃음이 나고 눈물이 났다. 공장 문 밖에서 기다릴 그를 생각했다. 오늘따라 더 오래 품고 있다가 내어 줬던 신발을 만져보았다. 그의 극본을 머리 속에서 상연했다. 입술이 간질간질했다. 오늘 외출해서 투고를 했는가. 신건설사에서 원고료를 받았는가. 원고료로 모루히네를 맞으러 갔나. 오늘밤은 어느 카페에서 딴스를 추려 했을까. 아직 날이 차운데 개털 오버코트라도 사 입으면 좋으련만. 노동자들이 직접 무대에 오르게 하겠다던 그의 이상은 당장은 이루어지지 못 하겠지만 배우가 연기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다. 고무신이 안 팔리는 계절에는 하루쯤 시간을 내어 다같이 극장에 가서 연극을 보는 것도 좋을 거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멈춘 공장은 고요했다. 혜린이가 공장 벽에, 문에 귀를 댔다. 기마순사의 말발굽 소리, 경관대의 구두소리, 총검 철컥대는 소리. 심장이 쿵쿵 불안하게 뛰는 소리. 감독관의 방에 달려들어가 유성기를 들고 나왔다. 쨔즈 레코드 하나를 제일 크게 틀었다. 늘 나를 따라 다니던 여자가 내게 자신의 빨간 구두를 벗어서 신겨 주었다.


“동지들, 모두 어깨동무를 합시다! 우리 함께 탭댄스를 춥시다! 이 안에는 남자도 없고 뿌르도 없고, 우리 밖에 없으니 치마 속이 보이건 말건 다리를 높이 들고, 우리가 생산한 고무신을 신고, 바닥을 마음껏 차고 높이 뛰어오르며 저 바깥보다 더 시끄럽게, 우리, 춤을 춥시다!”



문이 부서졌다. 공장에서 해고되었다. 경찰서에선 훈방되었다. 배후가 누군지 심문당하지 아니했다. 그의 극본이 증거물이었다. 감독관이 증언했다. 노동자들이 그의 극본대로 움직였다고. 나는 항변했다. 우리는, 누구의 지령도 받지 않고, 주체적으로 항거하였다고. 그들은 믿지 않았다. 그들은 그에게 치안유지법을 적용했다.


‘국체를 변혁할 것을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한 자는 사형, 무기 혹은 5년 이상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할 것을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하는 자, 결사에 가입하는 자, 또는 결사의 목적 수행을 위한 행위를 하는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



그는 족쇄에 묶여, 새장 속의 두견새처럼 피를 토하며 죽어갔다. 피도 눈물도 없는 흡혈귀들은 그가 다시는 살아나지 못 하도록 심장에 쇠말뚝을 박았다. 춥고 무서운 곳에서 죽은 그의 몸이, 나는 겁나지도 가엾지도 않은데, 그들은 그의 흉터를 만지고 얼굴에 입맞추지도 못 하도록 쇠로 된 관을 단단히 못질하였다.


쿵.


“이담 씨!”


쿵.


“홍염 동지!”


쿵.


그를 묻던 날에는 진눈깨비가 내렸다. 얼굴이 희고 입술이 시뻘건 일경들은 흰 눈을 파 내어 진창 속에 그를 묻을 때까지 비키지 아니했다. 붉게 녹슬어 가는 쇠관을 두드리며 에스페란토 어로 비밀히 말했다. 그의 못다한 마지막 말이 이 말이길 바랐다. 이 말을 하려고, 어느 밝은 날에 놀라게 해 주려고, 그의 노트를 몰래 들추어가며 학습했다. 그 한 마디를 하지 못 했는데, 그가 먼저 홀로 핏빛 노을이 지는 원혼들의 낙원으로 떠나갔다.


“미 아마스 빈.”(에스페란토어로 "사랑해")



세상에서 가장 크고 따듯한 달이 들던 방에는 형사들의 구두 발자국이 어지러웠다. 그의 얇은 세비로도, 그가 붙이던 봉투도, 아직 못다쓴 글이 많은 노트도, 아무것도 없었다. 새빨간 구두 한 켤레만 고이 놓여 있었다. 외출해서 고료를 받고, 봉투를 갖다주고, 전당포에 옷을 잡혔는가. 그 돈으로 빨간 구두를 샀는가. 밑창 닳은 구두를 신고, 얼어붙은 길을, 춤추듯 올랐던 길을 미끄러지며 넘어지며 끌려갔는가. 아침마다 구두를 품었다 내어줄 사람은 발자국마다 뿌릴 유해도 못 남기고 살아서는 갈 수 없는 먼 나라로 떠나갔는가.



핏빛 동이 트는 아침에 그가 남긴 빨간 구두를 신었다. 나는 사유재산이 없다. 어차피 조선의 산업은 일본자본의 손에 장악되었다. 국체를 변혁하진 못 한다면 마음껏 모욕해 주마. 노동쟁의를 계급투쟁으로, 정치투쟁으로 발전시켜 주마. 노동자가 꽃이고 그가 거름이고, 우리의 피오닐들이 열매라면, 조선 민중들이 꽃에 날아들어 열매 맺게 해 주는 나비가 될 게다. 나는 경성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가리라.


남산의 조선 신궁 붉은 도리이에 흰 천을 걸었다. 그를 죽이고 나를 궁핍하게 한 너희들의 천황놈을 떠받든다는 신궁을 내가 깔고 앉아주마. 내 주장을 가장 잘 보일 장소에 오르리라. 나는 조선에서 제일로 낮은 푸로레타리아며, 참말로 용감한 사람이다. 너희가 가장 두려워하는 말을 해 주마.


밧줄처럼 흰 천을 잡고 올랐다. 티 없는 순백의 천이 새벽 해에 붉게 물들었다. 도리이 꼭대기에 앉아 초혼처럼 그를 세 번 불렀다.


“나는 자신을 묶고 있는 족쇄 외에는 잃을 게 없다.


우리에게는 쟁취할 세계가 있다.


푸로레타리아여, 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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