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이 지나면 긴 어둠이 찾아온다. 아픔이라는 그늘의 끝에는 밝은 빛이 아닌 우울이라는 긴 어둠의 터널이 기다리고 있었다. 더 이상 슬프지 않지만, 기쁨과 행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잊어버린 시간이 지속되는 길고 긴 우울의 시간. 슬픔이라는 감정이 모두 타서 사라지는 동안, 기쁨 행복 그리고 내가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이 슬픔과 함께 타버려 텅 빈 공간만이 비어버린 심장 박동을 채워주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약 5년의 시간 동안 약을 복용했다. 처음에는 약조차 쉽지 않았다. 모든 감정이 사라졌다고 믿었지만, 약은 공허 안에 남아 있는 작은 감정의 찌꺼기마저도 지워버렸다. 파란 하늘도 따뜻한 햇살도 푸른 파다도 모두 흑백 사진이 되어 버렸다. 세상의 색을 모두 지워버렸다.
약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했다. 약을 복용하고 나면 두어 시간 정도는 나라는 존재의 물질적인 기억이 지워졌다. 내가 움직이는 손가락, 말을 하고 있는 입, 머리카락. 모든 것이 마치 가상화면에서 보고 있는 게임 캐릭터의 일부라고 생각되었다. 아니, 정확히는 나 스스로라는 것이 무엇인지 나라는 본질은 무엇인지에 대한 의구심을 들게 했다.
처음 1년은 한 가지만 생각했다. 살고 싶다. 다시 살고 싶다.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 내가 되어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시간을 살아야 한다. 내가 사라졌던 공간은 시간이 메꾸어갔다. 커다란 바위들 사이를 흐르는 물처럼 시간은 텅 빈 나의 감정과 의식 사이를 메꾸고 사라지고, 그나마 갖고 있던 작은 감정조차도 쓸어 가져갔다. 기억은 약과 시간이 뒤섞여 마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진득한 가래침 마냥 기분 나쁜 흔적만을 남기고 형체가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2년은 기억을 재조립하는 시간이었다. 힘들어도 억지로 친구의 이름을 입 밖으로 불러보고. 힘들어도 억지로 친구와의 시간을 떠올려 얘기해 보고. 말하고 나면 슬픔만 남더라도, 친구와 함께 했던 여행을 떠올리며, 친구의 마지막 기억 위에 함께 했던 기억을 덮어 씌우는 과정의 반복이었다.
그렇게 홀로 싸운 7년 약에 의존한 3년이 지나며 조금씩 공허함에 익숙해졌다. 두 번에 한 번의 공허는 열 번에 한 번으로 바뀌고, 스무 번의 한 번으로 바뀌고. 어느새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숫자로 조금씩 줄어들었다. 매일 꿈에 나와 잠에서 깰 때마다 긴 악몽을 꾸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친구는 가끔은 꿈에 나오지 않기 시작했고, 이틀에 한번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으로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더 또렸해졌다. 지금의 시간이. 그리고 친구와 함께 했던 시간이. 그의 목소리가. 그의 땀냄새가. 그리고 함께 했던 모든 것들이 또력한 기억이 되었다.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그가 사라진 공허가 날카로운 칼날로 박히지 않았다. 그 공허를 둘러싼 좋았던 기억들이 칼날을 무디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추억들이 나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결국 그가 떠나며 남긴 아픔을 치료해 준 것은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