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할 수 있는 방식 내에서.
폭포처럼 빠르게 쏟아져 흘러가는 삶의 순간들에서, 시간의 흐름에 깎여 모서리가 둥글어진 '상처'들을 그물망으로 건져내 하나씩 손에 올려 찬찬히 살펴보곤 한다.
상처는 애석하게도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 상처는 내가 주고 싶지 않았다 하더라도 상대방에게는 상처로 남고, 내가 받고 싶지 않았다 하더라도 상처로 다가와 마음이 절로 쓰라려진다. 이는 각 개인의 기대와 해석의 차이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반대로 나는 상처를 줬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방은 괘념치 않을 수 있고, 상대방이 내게 상처를 줬을까 마음을 한껏 졸이고 있다고 해도 내가 크게 개의치 않는 경우도 있다.
상처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면, 어떻게 해야 최대한 나와 상대방 모두의 마음을 다치게 않게 할 수 있을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닥친다면, 주는 방식을 상대방이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내 마음에 상처가 지울 수 없는 낙인으로 남지 않도록 '기대와 해석의 방식을 조율'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상처받지 않도록 타인에게 기대하지 않고 해석을 바꾸는 일은 비교적 수월하다. 오로지 내 마음에만 집중하면 된다. 하지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음에도 줄 수밖에 없는 경우는 다르다. 나는 상대방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수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해지도록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다. 그 부분은 오롯이 상대방의 몫이다.
결국 인간관계는 상처를 '서로 수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주고받을 수 있는지에 따라 이어질 수도, 끝날 수도 있다. 내가 크게 상처받는다고 해도, 상대방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이유를 고려한다면 그의 옆에 계속 남아있을 것이다. 반면에, 나의 방식을 수용할 수 없는 사람은 유유히 내 곁을 떠나게 될 것이다.
뜻하지 않게 나의 기대와 상대방의 행동이 어긋나 한동안 쓰라린 상처를 붙잡고 아파했던 경험들을 되돌아보면, 나 또한 누군가에게는 작든 크든 무수한 상처를 새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상처받지 않으려 상대방에게 걸었던 기대를 조금씩 덜어내는 일보다,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방식'에 훨씬 많이 신경을 쓰게 된다.
앞으로도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은 계속 들이닥칠 것이다. 부디 '나'라는 존재가 지워질 수 없는 상처로 남지 않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