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쯤, 문자 알림이 울렸다.
"교수님, 저 ***입니다. 오랜만에 연락드립니다. 혹시.. 저.. 기억하시는지요?"
바로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몇 년 전 나에게 심리학 수업을 들은 학생(A)이었다. 학교생활과 진로에 대한 고민에 대해 상담을 받기도 했었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졸업 즈음에도 연락을 주었었다. 어려운 시기를 잘 넘기고 다행히(^^) 졸업을 하게 되었다고. 반가운 마음을 담아 답을 보냈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잘 지냈나요?"
이후로는 문자가 아닌 통화로 이야기를 나눴다. 직장 생활이 어떤지, 지금은 어디서 지내는지 등에 대해. 그리고 잠시 후 이어진 말.
"저.. 교수님.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그래요, 들어봅시다. 어떤 부탁인가요?"
"제가 이직을 준비 중인데요, 추천서가 필요합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지금 첫 직장에서 근무한 지 2년 반쯤 되었는데, 더 이상 일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성실한 성품이어서 쉽게 결정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어느 곳으로 옮기려 하는지 물었다. 그런데 의외였다. 생각하고 있는 회사는 여러 면에서 이전 회사보다 조건이 좋지 않았다. 괜찮겠느냐고, 이유가 있느냐고 물었다.
"사실 꼭 교수님께 추천서를 받고 싶은 이유가 있습니다. 얼마 전부터 이직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교수님께 받았던 수업이 많이 생각났습니다. 소명의식에 대한 내용이요. 배울 때는 '아, 좋은 내용이다' 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직장생활을 해보니 뼈저리게 다가왔습니다. 자신과 맞는 일을 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의미와 목적, 잠재력을 키워나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동료와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서 말이지요. 사실 지금 직장에서는 이 중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저 의미 없이 하루하루 버티고만 있습니다."
매일 밤 가위에 눌린 듯 잠이 깨고, 깨고 나면 다음 날 출근이 걱정되어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제 잘못도 큽니다. 외적인 조건만 중요하게 여기고 다른 부분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었거든요. 일을 시작하면 어떤 분위기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되는지, 인사 관리 시스템은 어떤지 자세하게 알아보지도 않았습니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는데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대신에 회사 인지도가 얼마나 높은가, 연봉은 얼마인가만을 따졌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정말 많이 생각했습니다.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회사와 조직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 나에게 바라는 것,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일하면서 성장해갈 수 있는지, 업무와 관련된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지 등을 중점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옮기려고 하는 곳이 말씀하신 것처럼 외적인 조건은 지금 회사보다 못하지만, 그곳에서는 제가 저 자신을 잃지 않고 중심을 잡아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서류전형, 1차 면접, 2차 면접을 통과하고 최종 면접을 남긴 상황이라고 했다. 그의 고민과 결심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통화를 마친 주말 토요일. 원래 하려고 했던 일을 미루고 책상에 앉았다.
"귀사에 ***를 추천합니다.... "
시간을 들여 정성껏 썼다. 늦은 밤, 완성한 추천서를 인사담당자 이메일로 바로 보냈다.
1주일 후 최종 면접이 진행됐다. 멀리 있었지만 나도 지원자인 것처럼 마음이 떨렸다.
2주 후, A에게 문자가 왔다.
"오늘까지도 회사에서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직 결정이 나지 않은 것 같은데, 생각보다 길어지네요. 혹시 기다리고 계실 것 같아서요..."
다시 2주가 지났다. A에게 문자가 왔다.
"합격했습니다!"
경쟁률이 무려 수백 대 일인 곳이었다. 서류 지원부터 면접, 면접, 면접.... 매 과정마다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까 싶었다.
합격을 축하하며 점심 식사를 함께 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첫 직장 2년 반 동안의 경력은 인정받지 못한다고 했다. 다시 신입이 된 것이다. 아깝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단호했다.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그동안 인생공부 한 셈 치겠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지난주. 이번 학기 경희대학교 심리학 마지막 수업이 있었다.
수업 내용은 마침 삶의 의미와 소명의식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A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A가 학창 시절 심하게 했던 고민과 방황, 취업, 다시 방황, 고민, 이직의 과정을 정리해서 이야기했다. A가 사회생활을 하며 중요성을 깨달았다는 소명의식이 무엇인지, 각자의 삶에서 왜, 얼마만큼 중요한지에 대해서도 열심히 설명했다. 요즘 모두들 진로를 고민을 하면서 지금 잘하고 있는지,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고 힘들겠지만, 그럴수록 자신을 이해하고, 세상의 흐름도 파악하며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방향을 잘 잡아보자고 강조했다.
수업 중에 잠깐 짬을 내어 그룹 GOD의 노래 '길'도 들어봤다. 청춘의 고민과 방황을 이야기하는 노래다. 이 노래가 오래도록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얻고 있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길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아니겠느냐고, 여러분만 그러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이 무얼 특별히 잘 못해서 그러는 것도 아니라고 강조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혹 길을 잘못 들어설 수도 있지만, 그러면 그때부터 다시 생각하고 중심 잡고 나가면 된다는 말도 전했다. 실패가 아닌 잘하기 위한 당연한 과정이니 겁내지 말고, 아니 겁이 나더라도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자꾸 부딪혀보라고 강조했다. 나 역시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살아왔기에 진심을 담아 전할 수 있었다. 학생들은 진지하게 들었다.
수업이 끝날 때쯤 질문이 나왔다.
"우리는 지금 가진 것도 없고 능력도 없는데 타인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가능한가요?"
좋은 질문이다.
우리는 때로 타인에게 도움을 주고 선한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을 어렵고 거창한 것으로 생각한다. 큰돈을 기부하거나, 뛰어난 재능으로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일을 정직하게 성실히 하는 것이 그 시작이다.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않더라도 주변 사람들에게 아픔과 피해를 주지 않으려 조심하는 것도 훌륭한 배려다. 요즘은 이런 태도조차 아쉬울 때가 많다.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이면서 할 수 있는 것들이 조금씩 늘어날 것이고, 하나씩 실천해보면 된다.
종강 후, 한 학생에게 메일들 받았다.
"해주신 말씀 새기며 열심히 살겠습니다. 사회에 나가 맡은 일도 잘하고 타인에게도 도움이 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몇 년 후, 저도 교수님께 추천서를 받으러 가겠습니다. 저를 잊지 말아주세요."
어제, 기말시험을 치렀다. 나는 답안지를 제출하러 나온 그 학생에게 말했다.
"메일 잘 받았습니다. 학생을 꼭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3월에 시작한 한 학기 수업이 모두 끝났다. 학생들과 3달 반 동안 매주 금요일 오후 세 시간을 함께 했다.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 너무 비관적이 되지 않기, 조금 더 긍정적인 마음 가져보기, 일을 통해 성장하기, 타인에게 직/간접적으로 미치는 영향력 고려하기와 관련한 이론과 실천방법을 나누고 토론했다. 자신의 삶을 지키고 단단히 해나가는 데 도움이 되었기를 바란다. 이는 내가 학생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갖는 가장 큰 이유다.
모쪼록 참된 모습으로 성장하며 빛날 수 있기를, 각자의 삶 속에서 고유한 소명의식을 실천해나갈 수 있기를 기대하고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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