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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유진 Oct 28. 2017

SBS 스페셜을 통해 본 이승엽

지난 10월 15일 일요일, SBS 스페셜에서 이승엽 선수를 소개했다(492화_승엽의 시대).

일요일 밤 11시가 넘은 늦은 시간이었기에 잠깐만 봐야지.. 했다가 끝까지 다 보았다. 야구선수 이승엽, 인간 이승엽의 삶을 보며 든 마음은 놀라움, 존경, 감사, 그리고 반성과 다짐. 기록하고 나누고 싶어 내용을 정리해보았다.     




이승엽 선수는 야구 선수로 지난 23년간 수많은 기록을 세웠다. 그의 별명은 국민타자, 라이온 킹, 홈런왕. 승짱.      


화면은 은퇴를 불과 얼마 남기지 않은 날, 출근하는 모습에서 시작한다.  

"출근을 제일 먼저 하는 것은 제가 자부합니다. 제가 제일 먼저 야구장에 나가죠."

지난 23년간 한결같았다고 한다.      


야구의 시작은 1982년. 7살 이승엽은 야구중계를 보고 매력에 푹 빠졌다.

"너무나 야구가 좋았습니다. 저는 야구선수가 될 운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직업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야구선수가 안 됐다면 지금쯤 뭐 하고 있을까?’ 하는 질문을 많이 들었는데 그때마다 저는 ‘아주 평범한 회사를 다니면서 야구를 너무 좋아해서 회사를 마치면 야구장에 매일 가는, 관람하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항상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야구 선수가 이전에 사람이 되라는 말을 초등학교 때 처음 들었습니다. 저희는 야구보다 야구 도구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굉장히 혼났습니다. 특히 야구 배트가 (잘못 놓여) 있는데 그냥 지나치면 안 되고 배트를 세워놔야 하고 공이 있으면 발로 차면 안 되고."    


이승엽은 정통 좌완 투수로 성장했고 고교야구를 평정했다. 1995년에는 고졸 신인으로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했다. 그런데 곧 문제가 생겼다. 팔에 있는 굽은 뼈 사이로 뼛조각이 자랐고, 이 때문에 앞으로는 팔이 완전히 펴지지 않을 것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투수 생활은 무리였다. 수술을 피할 수도 없었다. 수술 후 이승엽은 타자로 전향했다. 늦게 시작한 만큼 남들보다 더 많이 쳐야 했다. 이승엽은 남들보다 아주 많이 연습했다. 그 결과 데뷔 첫 해인 1995년에 홈런을 13개 쳤고, 1997년는 홈런을 32개 치며 홈런왕이 되었다. 프로선수 3년 차 21살 나이였다.     


기록은 계속되었다. 1999년 8월 2일. 롯데와의 경기에서 43호 홈런을 치며 시즌 최다 홈런을 기록했다. 한국 신기록였다. 이승엽은 굽은 왼쪽 팔로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

"어차피 팔이 굽어서 죽을 때까지 펴질 수 없는 팔이기 때문에 그걸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거든요. 팔이 굽었기 때문에 남들보다는 공을 맞히고 (멀리) 보내는 능력이, 공을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에, 불리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욕심이 생기죠. 힘들더라도 이겨내자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나는 이 부분에서 많이 놀랐다. '팔이 굽었기 때문에... 불리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라는 말 다음에 '원망하는 마음이 들었다' 든가 '화가 났다',  '방황을 했다'는 말이 나올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어차피 죽을 때까지 펴질 수 없는 팔이라고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 그래서 '더 욕심이 생겼다'라고 했다. 다짐도 강했다.  

99%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1% 때문에 후회하지 말자.


스윙을 하고 또 했다.  


이승엽은 1997년부터 2000년까지 4년 연속 골든 글러브 상을 수상했다. 2003년에는 통산 300호 홈런을 기록하며 야구장에 잠자리채 열풍을 일으켰다. 그가 친 홈런볼을 잡고 싶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잠자리채를 가지고 야구장에 온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즌 56호 홈런을 쳤다. 아시아 신기록이었다.     


2003년 12월. 이승엽은 일본 지바 롯데 마린스에 입단했다. 일본 무대 도전. 하지만 쉽지 않았다.

“2003년 때 사실 너무나 좋은 성적을 올려서 일본 갔어도 사실은 조금 쉽게 봤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일본 야구 수준이) 훨씬 뛰어나더라고요.”    


2004년 진출 첫해의 기록은 좋지 않았다.

“수비 연습을 하고 있는데 수석코치가 와서 8번 지명타자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야구를 하면서 8번을 쳐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거든요, 그때까지는. 그래도 열심히 해야지.. 딱 생각했는데 5분 뒤에 다시 그 수석코치가 오셔서 ‘미안하다. 오늘 벤치에서 시작이다. 게임 못 나간다고 얘기하더라고요. 그때 너무 자존심이 상하더라고요.”    


이승엽은 경기가 끝나고 곧바로 스윙 연습을 했다. 혹독한 훈련을 시작한 것이다.

“제가 선택을 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고 이런 안 좋은 여건 속에서 한번 해보는 것도...”    


당시 지바 롯데 코치였던 김성근 감독은 말한다.

“그 친구(이승엽)는 시합 전에 매일 600개, 700개 쳐요. 1000개를 하면 한 2시간 반에서 3시간 걸려요. 피가 나와서 난리 나요. 손바닥이. 아프다 소리도 못 하고 나한테. 나중에 자기가 자전거 줄로 묶어서 스윙을 했다고...”    


이승엽은 다시 올라왔다. 다음 해인 2005년, 시즌 30호 홈런을 기록한 후 200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데뷔전에서 홈런. 요미우리 4번 타자로 등극. 시즌 41호 홈런을 기록하며 일본 내에서 ‘승짱’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언론도 그를 주목했다.  
 

불행히도 예상치 못한 슬럼프가 왔다. 시작은 손가락 부상이었다. 금방 낫겠지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부인 이송정 씨의 말이다.  

“손이 안 펴지고 너무 많이 부어서 보면 놀랄 정도로 증상이 심했어요. 남편이 집에서 말이 더 말이 없어졌던 시기였어요.”    


결국 손가락 수술을 받았지만 통증이 심해 타격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이승엽은 위축됐고 성적은 바닥으로 내려갔다. 2008년, 결국 2군으로 내려갔다. 100일도 넘는 동안 2군 생활이 이어졌다. 야구인생 최악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변하지 않았다. 느슨해지지도 않았다.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 감독이었던 우치다 준조는 말한다.

“이승엽은 대우가 좋지 않아도 2군 선수들과 똑같이 연습했어요.”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했다. 이승엽은 자신을 강훈련에 밀어 넣었다.

(오창훈, 당시 트레이너) “죽기 살기로 하는 거예요. ‘여기서 내가 더 이상 안 되면 죽는 것밖에 없다.’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수술하고 손을 붕대 감은 상태에서도 ‘형, 이것(수술하고 붕대를 감아 움직이지 않는 부위)만 안 쓰면 되니까. (붕대를 감지 않아서 움직일 수 있는 부위를 까닥이며) 이건 됩니다. 하면 돼요!’ 그렇게 운동을 했습니다.”    


슬럼프가 길어지고통의 시간도 길어졌다. 오늘 나가서 또 못 치는 거 아닐까, 야구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남들이 볼 때는 야구를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할 정도로 실패의 기간, 슬럼프의 기간이 길었는데 야구를 전혀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고 이거를 이겨내야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제가 해볼 건 다 해 봤는데 잘 안 되더라고요.”


부인 이송정 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말한다.

"애들이 어릴 때 아이들 붙잡고 가끔 남편이 하소연할 때가 있죠. 남편이. ‘아빠가 못했어, 아빠가 그래서 2군 갔어. 아빠 더 잘할게..‘ 사람들한테 아무한테도 말 못 하는, 내색 안 하는 그런 말을 아이들 붙잡고 할 때가 있었죠."    


이승엽은 2008년 7월, 어려운 상황에서도 베이징올림픽 국가대표 선수로 나선다. 공항, 기자들 앞에서 굳은 다짐을 표현했다.  

"저 죽지 않았습니다. 이번 대회를 통해서 다시 한번 최고의 선수라는 소리를 듣도록 정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예선 22타석 3안타. 부진이 계속됐다, 마침내 4강전, 한국 대 일본. 이승엽의 기록은 좋지 않았다. 2회 말 삼진, 4회 말 병살타, 6회 말 삼진.   

"육체적인 고통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야구가 안 됐을 때 슬럼프에서 벗어나는... 언제 벗어날지 모르거든요. 그 힘든 시기는 본인만이 겪는 거고 본인만이 이겨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승엽은 8회 말 네 번째 타석에 올랐다. 절박한 심정으로 오른 마지막 기회였다. 결과는 홈런. 역전승을 만들어낸 홈런이었다.     

"저는 그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오늘 지면 나 때문이다. 정말 이거 못 치면 죽는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정말로.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좋았을 때 눈물도 흘리고 했던 게.. 그때 힘들었던 기억이 있었기에..."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얼마 전 일본에서 활약할 때 알고 있었던 기자가 한국방문해서 물었다.

“일본에서의 야구는 당신 인생에서 어떤 의미가 있었나요?”
“(생각).....  지금까지 (야구를) 할 수 있었던 비결은 일본에서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기에, 있었기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어요. 많이 힘들었지만 많이 배웠어요.”         


(최희섭 선수) “‘형, 야구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 어떻게 해야 돼요?’ 하고 물으면 승엽이 형이 저한테 했던 말은 딱 한마디였어요.”
(기자) “그 한마디가 뭐죠?”
(최희섭 선수) “‘인내!’ 인내를 했기 때문에 지금 승엽이 형이 이 자리까지 온 게 아닐까요?”     


이승엽은 2011년 11월, 37살의 나이에 돌아왔다. 그리고 2012년에 삼성 라이온즈에 복귀했다. 같은 해 삼성 라이온즈는 한국시리즈에 진출했고, 이승엽은 MVP가 되었다.  우승했다.     


2015년 6월 3일, 삼성과 롯데의 경기에서 이승엽은 KBO 리그 통산 400호 홈런 대기록을 기록했다. 하지만 그는 차분했다. 침착한 태도로 1루, 2루, 3루를 돌아 홈으로 들어왔다. 특별한 세리머니도 없었다.  

(민훈기 기자/해설위원) “야구에 대한 존중이 굉장히 강합니다. 야구를 바르게 하는 선수예요. 400호 홈런이라는 대기록을 세웠을 때 이승엽의 굉장히 상징적인 부분인 것 같아요. 배트를 조용히 놓고 고개를 숙이고 차분하게 운동장을 그냥 돌거든요. 축하한다든가 기뻐한다든가 이런 표정이 없이. 존중과 배려거든요. 상대 투수에 대한. 자기는 대기록을 세웠지만 상대 투수는 대기록에 좌절하고 희생물이 된 거니까. 그런 부분 같은 게 상징적으로 이승엽이 어떤 선수인가를 보여주는 것 같아요.”


2016년 9월 14일. 이승엽은 한일 통상 600호 홈런을 기록했다.   

"그때 그런 힘든 시기가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사실은 지금이 더 행복하다니까요. 지금 야구가 더 재미있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야구를 대하는 태도가 저는 더 진중해지고 더 야구를 사랑하게 됐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37살에 복귀를 해서 42살까지 뛸 수 있고, 42살에 은퇴를 하지만 아직도 야구를 사랑하고 또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은퇴투어를 하는 선수는 프로야구 역사상 이승엽 선수가 처음이라고 한다. 10개 구단 전체에서 은퇴 투어가 진행되었다. 다른 팀의 선수들도 그에게 사인을 받고 함께 사진을 찍으려고 줄을 섰다.     

"사람들은 실패를 하면 너무나 실망을 하지만 그 실망 속에서 배움이 있다고 분명히 저는 생각합니다. 저도 그 실패가 있었기 때문에 아직 이 나이에 야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LA 다저스 투수였던 박찬호는 말한다.

“지금 이승엽 선수의 훌륭함은 홈런을 몇 개 쳤나, 저는 그게 대단한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것은 미래에 이승엽 선수보다 하나 더 친 선수에 의해서 그냥 없어져요. 이승엽 선수의 대단함은 결국 기록이 아닌 그동안 많은 희생과 절제와 그리고 꾸준함 인내력, 이런 것들을 발전시키고 성장시켰던 그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세운 이승엽의 기록이다. 홈런 1위 467개, 타점 1위 1,498타점, 득점 1위 1,355득점, 2루타 1위 464개 (KBO 리그)다. 23년간 쏘아 올린 홈런 비거리 합계는 74,070m다. 이는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산 높이 8배라고 한다.

“제 기록이 멈춰지니까, 진행이 아니라 이제 과거가 돼 버리니까 그런 부분에서는 좀 아쉽지만 그래도 홀가분합니다. 할 만큼 했으니까..”    


은퇴식에서 이승엽은 자리를 함께 한 팬들 앞에 섰다.


여러분의 함성소리 기억하겠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고개 숙여 인사하며 눈물을 흘렸다. 눈물에는 선수생활 내내 감당해야 했던 긴장과 마음 졸임, 기대, 실망, 고통,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치열하게 걸어온 끝자락에서 느끼는 감동과 후련함이 담겨있는 듯했다. 방송에서는 말한다. 이승엽은 재능보다는 의지를 믿었고, 제일 약해졌을 때 제일 강했다고.      


10월 7일. 은퇴 나흘 후.

“제가 좋아했던 야구를 했고, 어렸을 때 꿈이었던 프로야구 선수가 돼서 좋은 모습으로 은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정말 저는 행복한 남자라고 생각하고, 정말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했다는 인사밖에 드릴 말씀이 없네요. 할 말이 없습니다. 그 말 외에는.”     


이 말을 전하는 이승엽 선수의 표정이 넉넉하고 깊다. 최선을 다해 힘껏 살아온 이에게서 나올 수 있는 표정이 아닐까 싶다. 인내와 투지, 겸손과 절제, 배려와 감사가 어우러져 있다.   

이승엽 선수가 살아온 시간을 보면 믿을 수 있게 된다. 노력의 결과는 조금 늦게, 때로는 너무하다 싶을 만큼 늦게 올 수도 있지만 반드시 좋게 온다는 것을. 힘든 만큼 기쁘게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을 한 번 더 믿게 된다.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어려움 속에서도 중심을 잡고 스스로 이끌어가는 삶 무엇인지 보여주어 감사하다. 성장하는 삶이 무엇인지 묵묵히 행동과 실천으로 가르쳐주어 많이 감사하다.


이승엽 선수 고맙습니다.    


출처: SBS 스페셜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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