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혹은 청소년 추천도서 목록을 보면 궁금할 때가 있다.
이 책에 담긴 뜻을 어린이와 청소년이 잘 이해할 수 있을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볼 때마다 하게 되는 질문이다. 나에겐 어려운 책이었다. 고등학교 때 처음 읽었는데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좋은 책이라고 하니 억지로 글자를 읽어나가기만 했던 것 같다. 누군가 "데미안 읽었어?" 하고 물어보면 "응, 읽기는 했는데..." 하고 말끝을 흐리곤 했다. 책 뒤에 있는 해설을 보며 '아, 이 부분이 그런 내용이구나', '여기는 이렇게 이해해야 하는 거구나'하며 깨닫게 된 부분도 많다. 얼마 전 다시 읽으며 새롭게 이해된 부분도 있다. '읽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알려준 책 중 하나다.^^
미하엘 엔데가 쓴 소설 《모모》역시 그런 책이다. 어린이책 전문 출판사인 비룡소에서 나왔고, 어린이 도서연구회 권장도서에 오르는 등 이런저런 면에서 어린이 혹은 청소년을 위한 책인 듯싶다. 하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도 하면서 인생 경험을 쌓은 후에 읽으면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데미안》과는 다르게 책 속에 담긴 문장이나 단어는 쉽다. 착한 우리 편 모모와 거북이 카시오페이아, 호라 박사가 힘을 합쳐 악당 회색 신사들과 맞서는 싸움은 흥미진진하다. 초등학생들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책을 다 읽은 후, 어느 부분이 가장 인상적인지, 어떤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지, 책을 읽고 무엇을 배우고 느꼈는지 등을 물었을 때 어린이와 어른이 하는 대답은 많이 다르지 않을까 싶다.
저자는 삶에서 소중한 두 가지를 강조한다. 첫 번째는 사람이다. 나와 타인 모두 중요하다는 것을 주인공 '모모'를 통해 알려준다. '모모'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 역시 소중히 여긴다. 모모가 타인을 소중히 여기는 것을 표현하는 방법은 누군가의 옆에 가만히 앉아 따뜻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여주는 것이다.
"꼬마 모모는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재주였다.... 모모는 어리석은 사람이 갑자기 아주 사려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끔 귀 기울여 들을 줄 알았다. 상대방이 그런 생각을 하게끔 무슨 말이나 질문을 해서가 아니었다. 모모는 가만히 앉아서 따뜻한 관심을 갖고 온 마음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
... 내 인생은 실패했고 아무 의미도 없다, 나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다, 마치 망가진 냄비처럼 언제라도 다른 사람으로 대치될 수 있는 그저 그런 수백만의 평범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모모를 찾아와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러면 그 사람은 말을 하는 중에 벌써 어느새 자기가 근본적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와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 소중한 존재다.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모모는 그렇게 귀 기울여 들을 줄 알았다."
모모는 필요할 때면 중요한 질문도 던질 줄 아는 아이다.
회색 신사와 모모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보자. 회색 신사는 유명해지고 성공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믿고 있다.
인생에서 중요한 건 딱 한 가지야. 뭔가를 이루고, 뭔가 중요한 인물이 되고, 뭔가를 손에 쥐는 거지. 남보다 더 많은 걸 이룬 사람, 더 중요한 인물이 된 사람, 더 많은 걸 가진 사람한테 다른 모든 것은 저절로 주어지는 거야. 이를테면 우정, 사랑, 명예 따위가 다 그렇지.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모모는 묻는다.
아무도 아저씨를 사랑하지 않죠?
모모는 회색 신사가 무섭기도 했지만 불쌍한 마음이 더 컸다. 외롭고 불행해 보였다. 그래서 맞서 싸우는 대신 걱정하는 마음으로 속삭이듯 묻는다. "아무도 아저씨를 사랑하지 않죠?"
가슴을 울리는 질문이다. 모모의 진심 어린 관심과 존중을 경험한 회색 신사는 마음속에 지니고 있던 진정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경청의 힘이다.
저자는 강조한다.
진정으로 귀를 기울여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줄 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모모가 가진 건 단지 잘 듣는 능력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관심과 배려였다.
소중한 두 번째는 시간이다. 죽은 시간과 살아 있는 시간으로 구분된다. 시간은 진짜 주인의 시간일 때만 살아 있다. 나 자신으로 사는 시간, 가슴으로 느끼는 시간,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살아 있는 시간, 진실한 시간이다. 시간이라고 해서 다 같지 않다.
시간을 재기 위해서 달력과 시계가 있지만, 그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사실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한 시간은 한없이 계속되는 영겁과 같을 수도 있고, 한 순간의 찰나와 같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한 시간 동안 우리가 무슨 일을 겪는가에 달려 있다. 시간은 삶이며, 삶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이니까.
사람들은 시간을 아껴 성공을 쫓으며 살라는 회색 신사의 유혹에 넘어간다. 돈은 더 많이 벌게 되었지만 행복하지 않다.
시간을 아끼는 사람들이 옛 원형극장 인근 마을 사람들보다 옷을 잘 입긴 했다. 돈을 더 많이 벌었기 때문에 더 많이 쓸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무언가 못마땅한 기색이나 피곤함, 또는 불만이 진득하게 배어 있었다. 눈빛에는 상냥한 기미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온몸에 배어 있는 못마땅한 기색, 피곤함, 불만, 상냥한 기미라고는 찾을 수 없는 눈빛.
죽은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점점 늘어간다는 점이다.
죽은 시간을 전파하는 회색 신사에 맞서 싸울 것을 결심한 호라 박사는 모모에게 설명해준다. 살아 있는 시간이 무엇인지,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진짜 주인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시간은 말 그대로 죽은 시간이 되는 게야. 모든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시간을 갖고 있거든. 시간은 진짜 주인의 시간일 때만 살아 있지.”
"빛을 보기 위해 눈이 있고, 소리를 듣기 위해 귀가 있듯이, 너희들은 시간은 느끼기 위해 가슴을 갖고 있단다. 가슴으로 느끼지 않은 시간은 모두 없어져 버리지. 장님에게 무지개의 고운 빛깔이 보이지 않고, 귀머거리에게 아름다운 새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과 같지. 허나 슬프게도 이 세상에는 쿵쿵 뛰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눈멀고 귀먹은 가슴들이 수두룩하단다.”
“나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나누어 주며 매시간마다 진실을 말해 주지. 허나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것 같아 걱정이란다. 사람들은 오히려 두려움을 불어넣는 자들을 더 믿고 싶은 모양이야. 정말 수수께끼야.”
호라 박사는 왜 그토록 시간을 중요하게 여겼을까? 왜 사람들의 시간을 살려주고 싶었을까? 그 답을 아래 문장에서 찾을 수 있을 듯싶다.
시간은 삶이며, 삶은 마음속에 깃들여 있는 것이다.
시간을 잃으면 삶을 잃게 되는 것이다. 죽은 시간을 사는 사람들은 마음을 잃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모모》는 신비로운 모험과 도전, 악당을 물리치는 통쾌한 승리 속에 꽤 묵직한 주제를 담고 있다. 사람과 시간을 소홀히 여기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진정한 행복과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저자는 "이 이야기가 앞으로 일어날 일인 듯 얘기할 수도 있다"라며 글을 마무리한다. 성공을 추구하며 정작 자신은 잃어가는 사람들은 언제든, 그러니까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늘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회색 신사의 유혹에 넘어가 마음을 닫고 죽은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지금 '우리'일 수도 있다는 의미다. 그러니 모쪼록 자신과 주변을 살피며 살아 있는 시간을 살아가라고 권유한다.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인가?
살아 있는 시간을 살고 있는가?
내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모모》
어른이 되어 읽으니 더 좋다.
울림이 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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