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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록 Oct 28. 2022

이 세상의 한구석에 (この世界の片隅に) 리뷰


일본 내에서 다루는 20세기 초반 일본의 특징을 세 가지 제시한다면 ‘다이쇼 로망’, ‘군국주의 파시즘’, ‘전후(戰後) 일본’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 셋은 단독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서로 긴밀한 인과관계를 갖는 탓에 묶여서 다뤄지는 경우가 잦다. 따라서 다이쇼 로망이 군국주의 파시즘으로 이어진 흐름을 가져온 서사가 있는 한편, 전쟁이 경과함에 따라 패망하게 된 일본 전반에 깔린 우울과 불안, 공포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 존재하기도 한다. 이 중 한국에서 논쟁이 뜨거워지는 쪽은 주로 후자다. 그 대표적 사례인 <반딧불이의 묘>가 정식 개봉했을 때 관객들의 반응은 찬반양론으로 갈렸다. <반딧불이의 묘>를 비판하는 쪽은 피해자 코스프레에 불과할 뿐이라 주장했고, 옹호하는 쪽은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정치적 성향 등을 들어가며 이를 반박했다. 과연 민중과 체제를 완전히 동일시해버리는 것이 옳은가의 문제도 남았다. 민족적 당사자로서건 일종의 관찰자로서건 민감할 수밖에 없는 주제다.

 보다 최근에 나온 <이 세상의 한구석에>는 어떨까? 이 영화 역시 <반딧불이의 묘>와 비슷한 맥락에서 비판받았다. 일단 <이 세상의 한구석에>에서는 민중과 체제를 완전히 떼어놓기 힘들다. 작중 스즈의 장인, 남편이모두 해군에서 근무했다는 점, 스즈 역시 (후반부의 대사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국가를 신뢰했다는 부분 등은 마음 편히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한구석에>가 어떻게 일상의 균열로서의 전쟁을 다루고 이를 점진적으로 변화시켜나가는지를 보며, 이 영화를 지지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변호할 수는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세상의 한구석에>는 호죠 가로 시집을 가게 될 주인공 스즈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자연히 스즈를 감싸고 있는 모든 것이 영화를 구성한다.  영화 초반부의 핵심 이미지들은 길거리와 마을을 오고가는 장면들이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바다와 시내, 집 주변, 학교 등을 천천히 따라다니며 스즈의 일상 루틴을 따라간다. 때론 현 시점 뿐 아니라 이전에도 늘 그랬다는 듯 아예 그래픽 매치와 생략을 이용해 한 공간을 오가는 모습을 한 컷 만에 담아내어 보여주기도 한다. 이후 집에 돌아와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일상의 순간순간을 연결한다. 시집을 간 쿠레에서도 마찬가지로 물을 떠오거나 회람판을 돌리러 가거나 배급을 받으러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오고가는 이미지들로 구성된다. 늘 어딘가에 갔다 오는 것으로 하루는 마무리가 된다. 이 영화를 ‘호죠 스즈가 되는 우라노 스즈의 일상물’로 불러도 될 것이다.

 그러다 시집살이 중 히로시마에 다녀온 뒤부터 스즈의 위치가 고정된다. 스즈가 머무르는 공간은 주로 집이며 그가 집과 멀리 떨어진 외부에 있는 장면은 당분간 거의 나오지 않는다. 때론 공습경보 발령으로 인해 아예 집에서 나올 수 없는 경우도 생기게 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가족과의 일상은 유지되고 어떻게든 밥을 지어 끼니를 해결하면서 하루하루를 이겨내며 살아간다. 향수병에 걸린 스즈의 버팀목은 가족이 되며, 어딘가에 갔다 오지 않아도 일상은 완성된다.

 중반부에 이르러 스즈는 다시 어딘가로 갔다가 돌아와야 하는 상황과 마주한다. 그러나 이 때, 평소의 루틴을 따라가지 못하는 시퀀스가 나온다. 비싼 설탕을 구하기 위해 낯선 길을 따라 암시장에 간 스즈는 돌아오는 길에 비싼 물가를 체감하며 “이런 나라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라고 독백한다. 스즈가 길을 잃어버리는 것은 바로 이 순간이다. 전쟁으로 인해 일상에 균열이 오고 이를 완전히 체감했을 때, 스즈는 평소대로의 루틴에서 벗어난 미아가 된다. 이때 스즈가 조우한 사람은 공교롭게도 어린 시절 외갓집에서 수박을 주었던, 오빠가 말한 대로 “자시키와라시”라는 집의 정령인 줄로만 알았던 부랑아였다. 여기서 그녀의 이름이 린이라는 사실 역시 알게 된다. 왜 하필 스즈는 미아가 되었을 때 린을 만나게 되었고 이름까지 알게 되었을까? 그저 어린 시절 베풀었던 선행에 대한 보답으로서 등장했을 뿐이었을까?

 스즈의 어린 시절은 자신이 그리던 그림처럼 판타지와 공존해있었다. 자신을 납치하려던 도깨비의 이야기, 하얀 토끼로 그려진 파도의 이미지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스즈가 전쟁 속의 일상이라는 현실과 마주하자, 어린 시절의 판타지였던 “자시키와라시”는 ‘린’으로서 스즈 앞에 나타나게 된다. 일상에 균열이 생기는 순간 판타지는 판타지로서 남아있지 못하게 된다. 병실에 누워있는 스즈의 장인이 야마토의 침몰 소식을 전하며 “세토 내해도 이제 우리 바다가 아니라더라.”라고 말하자 “그럼 파도 토끼도 이젠...”이라고 답하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전쟁이 일상에 스며들게 되면서 스즈의 그림과 공존하던 일상은 변화하고 분열하기 시작한다. 이는 린이 등장하기 전, 계단에서 그리던 군함 그림마저도 헌병대에게 빼앗겨 버리는 부분이나 테츠와의 대화 중 점차 그림을 자주 그리지 못하게 되었다는 대사에서도 암시된다.


그 뒤로 스즈가 현실을 자신의 그림으로 덮는 장면들이 몇 나온다. 이때의 화면은 스즈의 노트와 다를 바 없이 표현되며, 화면 위에 종종 그림을 덧대거나 아예 스즈의 그림으로 장면을 묘사한다. 공습하는 미군 비행기들과 대응 사격을 하는 대공포가 만들어낸 ‘풍경’을 보며 ‘지금 여기에 그림 도구가 있다면...’이라고 생각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스즈는 포격이 이루어지는 그 순간을 비현실로 받아들여 마치 자신과는 동떨어진 그림의 대상으로 여기며 그 순간을 멍하니 지켜본다. 스즈는 그렇게 자신이 처한 공포스러운 상황에 그림을 덧칠함으로써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판타지를 다시 프레임 안에 집어넣으려 한다. 이를 일종의 ‘희석시키는’ 행위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스즈가 그림으로 화면을 덮는 장면 중 인상 깊은 씬이 또 하나 있다. 스즈를 중심으로 주변의 배경이 왼손으로 그린 그림처럼 일그러지는 장면이다. 스즈는 스스로가 고백했듯이 일그러지는 일상과 함께 일그러져간다. 공습경보와 정전에 벌벌 떨던 스즈는 공습경보 구호(?)를 척척 외치고 폭격에 분노하며 “뭐든 써서 살아가야 해요. 그게 우리의 싸움이에요.” 같은 말들도 서슴지 않는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이미 일본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다. 최고의 군함이라던 야마토의 격침 소식과 패전 소식, 매일같이 반복되는 공습경보, 줄어드는 배급, 그와 대비되어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소이탄 폭격 빈도. 그리고 그 끝에는 히로시마에 투하되는 원폭이 있을 것이다. 결국 아무리 그림을 덧대어도 원폭의 하얀 빛은 스즈의 노트(화면)를 침범해 가득 채우게 된다.

 원폭이 투하되고 얼마 있지 않아 일본이 패전을 선언하자, 스즈는 울분을 토하며 뛰쳐나간다. 그 순간, 영화는 중요한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익스트림 롱숏으로 태극기를 잡은 뒤 스즈의 자기고백적 독백과 연결시키는 장면이다. “바다 건너에서 온 쌀, 콩... 내 몸은 그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지. 그러니까 폭력에 굴복하게 되는 건가?” 버티며 살아가던 삶이 국가와 함께 붕괴함을 청취하고 목격함과 동시에 스즈의 감정은 폭발하기에 이른다. 바로 이 때 스즈는 이전까지 인지하지 못했던 외부의 현실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취해온 일상마저 식민지에 대한 침탈과 착취를 근간으로 한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영화는 짧은 시간동안 ‘대일본제국’의 일원으로서의 스즈와 '침략국'과 '전범국'의 국민으로서의 스즈를 격렬히 충돌시키다 이미 폭력의 주체였던 그들에게 ‘안온한 일상’이란 결국 이루어질 수 없었음을 인정한다. 마치 스즈의 판타지처럼 말이다. 물론 이를 속죄라고 하긴 힘들 수 있다. 그저 분열된 일상을 거쳐 온 끝에 내린 단순한 결론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세상의 한구석에>는 이 씬에서 변명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한 개인으로서의 그녀가 받아들여야 하는 진실과 마주시키며 이렇게 경고한다. 정말 그 모든 것이 아름답고 평온했다 말할 수 있느냐고.

 이후 스즈가 자신의 판타지를 한 번 더 마주하는 장면이 나온다. 히로시마의 다리 위에서 대화를 나누는 스즈와 슌사쿠 뒤로 초반에 나왔던 도깨비가 슥 지나가는 장면이다. 이는 과거와의 재회가 아니며, 평화로운 일상이 재개될 것이라는 희망도 아니다. 도깨비와 악어가 흔드는 손은 차라리 스즈의 판타지가 스즈에게 건네는 작별인사, 혹은 스즈의 오빠(에 대한 죄책감)의 현현과의 작별인사에 가깝다. 슌사쿠의 말대로 그 때로는 돌아갈 수 없다. 그래도 일상은 이어진다. 과거와 작별한 후 스즈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고아가 된 한 아이다. 스즈는 아이를 품 안에 안고 집으로 돌아가 다시 전쟁 이후의 일상을 시작하고 유지하게 될 것이다. 국가와 체제가 무너진 뒤에 찾아온 라스트 씬은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일상을 재조직하도록 한다.

 어떻게 보면 <이 세상의 한구석에>는 <반딧불이의 묘>가 가진 명확한 한계를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다. 끝내 전쟁 책임자를 조명하거나 화면 안으로 끌어들이지 못했(거나 의도적으로 그러지 않았)으며, 여전히 우회적인 태도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두 번째 문단에서 언급했듯이, 내가 이 영화를 지지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영화가 갖는 의의 역시 부정하기 어렵다. 하다못해 현 일본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했을 때 상당히 진보한 태도의 작품이 나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이만큼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방증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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