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 5회기
“이제 오늘을 포함해서 3번가량 남았는데, 어떤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으세요?”
선생님.. 저는 모든 것이 다 정해져 있는 가이드가 좋습니다...
“특별히 다루고 싶은 주제는 없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흘러가는 대로 같이 이야기하고 싶어요.”
5회기 상담은 두 가지 주제로 수렴했다. 피상적 관계와 감정 수용.
상담을 가기 직전, 퇴근 전에 또래 동료 선생님이 교실 문을 노크했다. 와 Y쌤! 무슨 일이세요, 반가운 목소리로 물으며 맞이하니 "그냥, 괜찮은가 해서요."라 말하며 페레로 로쉐를 건네더라.
어라? 나 진짜 괜찮은데, 싶다가 기분 좋게 머리가 멍-해졌다. 인지부조화랄까? 지난 글에도 썼지만, 생활부장에게 학폭 관련 업무를 넘긴 뒤에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독감 유행으로 관련 학생 A, B 모두 결석 중이라 눈앞에 보이지 않다 보니 마음은 편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를 위해 작은 선물을 들고 찾아와서 마음을 써준다는 사실이 놀랍고 신기했다.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주는 것에는 익숙했는데 나도 관심을 받을 수 있구나. 나 조차도 가볍게 여겼던 내 마음의 어려움을 어루만져 주는 사람이 있구나.
이러한 작은 에피소드를 이야기하고 나니 새삼 다른 사람에게 내 힘든 마음을 잘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점을 깨달았다. 내가 누군가를 위로했던 것처럼 누군가가 나를 위로할 수도 있다. 이제까지는 힘들고 어려운 이야기들을 하다 보면 같이 있는 사람도 우울해질까 봐 애써 화제를 전환하기 일쑤였다.
우울감이 가장 심했던 지난여름에 친구가 집에 놀러 왔을 때 교권 추락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많이 하다가 자꾸 분위기가 쳐져서 애써 밝은 얘기를 했던 기억이 있다. 부정적인 감정과 사건의 디테일을 감추려 들던 나의 성향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피상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생생한 삶의 조각을 구체적으로 나눌 때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속마음이 나온다.
다 괜찮다고 말하면 그 이상으로 깊어지기가 어렵다. 어쩌면, 내가 괜찮다고 말할 때 나는 내 지인들의 인품을 과소평가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내 약함을 알면 그들이 떠나갈 것이라고 말이다. 약함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아직은 두렵지만, 용감하게 약함을 드러내 보일 때 깊어지는 것 같다. 피상적인 관계를 벗어나고 싶다. 나도 깊은 이야기를 하는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
그 속마음을 듣기도 하고, 말하기도 할 때 관계가 깊어지는 모양이다. 앞으로는 조금 더 미주알고주알 쫑알쫑알 이야기해 볼까나.
그리고 나는 감정을 잘 받아주지 않는다. 상담을 하면서 근래의 나는 감정코칭을 거의 하지 않고 엄격하고 단호한 면으로 치우쳐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감정을 받아주는 것이 곧 행동 교정의 중단이라 여겼다. 그러나… 감정은 받아주되 행동은 받아주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
교사로 일하기 시작한 이래로, 아니, 담임을 맡기 시작한 이래로 나는 긍정심리학과 긍정적 훈육을 기반으로 삼아 학급을 경영해 왔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이 짜증을 내고 화를 내면 같이 화를 내고 엄격하게 대했다. 변명을 하자면, 감정코칭을 할 마음의 여력이 없다. 내가 내 감정도 받아주지 않고 있었다.
상담사는 자기 자신의 감정을 받아주지 않는데 남의 감정을 받아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감정 수용이 곧 무언가 하기 싫은 것을 안 해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짚어주었다.
우리 반의 H와 J가 떠오른다. 화를 내고 골을 내는 아이들에게 내가 되레 화를 내며 그렇게 화내면 안 된다고 윽박지르지 않았나 반성해 본다. 화를 내는 아이들을 보는 게 싫다. 그 감정이 전이되는 것이 싫다. 그래서 스스로도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면 그 감정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점점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할 때에도 내 감정을 숨기게 된 것일까? 상담사는 내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야기에서 감정이 잘 묻어있지 않는다고 한다. 현실감이 부족한 둥둥 떠다니는 말들, 흔히 말해 영혼이 없는 말이다.
내 감정을 어떻게 건강하게, 숨기지 않고 표출할 수 있을까? 고민과 숙제가 남는 시간이었다.
사실 쓸데없이 디테일하게, 듣는 사람이 늘어질까 하는 걱정 없이 내 마음을 털어놓는 곳이 있다. 바로 일기장이다. 분단위로 의식의 흐름을 붙잡아 미주알고주알 쫑알쫑알 이야기한다. 언제부터 이런 글을 쓰기 시작했을까 생각해 보면 고3시절로 돌아간다...
초등학생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있다. 예쁘고 공부를 잘하고 말도 재치 있어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은 친구였다. 머리가 비상해서, 나는 어떻게 해도 그 친구보다 잘 나가기 어려웠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른 학교에 나오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졌는데, 간간이 들리는 근황에 따르면 그 친구가 잘 노는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공부를 멀리한다더라. 토끼와 거북이의 거북이가 된 기분이었다. 토끼가 자고 있대! 내가 이길 수도 있어!
그런데 토끼가 낮잠에서 깨어났단다. 그러고는 나와 같은 학교를 지망한다더라.
한동안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때 내가 한 행동은 학원가에서 나눠주는 빈 공책 하나를 꺼내 그곳에 미친 듯이 갈겨쓰는 것이었다. 나는 왜 이 모양이지? 왜 J는 다 가졌을까? 내 마음속 깊은 응어리는 무엇 때문에 생겼나? 이 응어리의 정체는 무엇인가? 마지막 장쯤에 이르러서 답을 찾았다. 내가 가진 감정은 열등감이었다. 정체를 알고 나니 잔뜩 꼬인 감정의 실타래가 풀어졌다.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글로 감정을 정화하는 경험을 한 것이다.
건강한 감정 표출에 대해 계속 고민하면서 글을 다시 써야겠다는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그래서 묵혀 두었던 브런치도 다시 열었다. 누군가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감정을 정화시킬 수 있는, 그러면서 누군가에게 공감가 위로도 줄 수 있기를 바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