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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일리 Jul 03. 2023

[엘리멘탈/ 파친코] 정상의 삶에는 설렘과 사랑이 없어

정상의 삶을 살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이를테면 메리어트 호텔에서 결혼하는 삶. 서른 초반에 대기업 회사원 남편과 전셋집을 얻고 TV는 몇 인치가 좋을지 골라 보는 삶을 꿈꿨다. 판교나 동탄 같은 신도시 사모님이 되어 알뜰하게 세금 혜택을 챙기고 언제 주거지를 갈아탈지 고민하는 매일매일. 


회사에는 그 정상의 삶을 버젓이 살아내는 사람이 많았다. 다들 짝을 어렵지 않게 구하는 듯했다. 결혼하려는 결정도 쉽게 하는 것 같았다. 돈이 없다고 앓는 소리를 해가면서도 결혼식은 어찌나 큰 곳에서 들 하는지. 테니스와 골프, 오마카세와 파인 다이닝, 롤렉스와 티파니. 


나는 정상의 삶을 갈망하면서도 그 이미지가 표상하는 허세스러움을 경멸했다. 저렇게 보여주는 것에 에너지를 소모하면 어디에서 깊이를 찾을 수 있는 걸까. 하루하루 영원처럼 지나감을 다들 모르고 자산가로서의 미래를 지나치게 낙관하는 것은 아닐까. 경멸하는 이 마음이 과연 신 포도를 보는 여우와 같이 단순하고 얕은지, 아니면 정말로 물질주의에 반하여 소박한 물건으로 기쁨을 누리는 고귀함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알지 못했다. 분명한 건 내 오장 육부가 불편했다는 것이다. 7011번 버스 안과 세브란스 빌딩 모퉁이 담배를 태우는 남자들을 지나치면서 내 위장은 꼬이고 있었다.  


최근 개봉한 픽사의 애니메이션 <엘리멘탈>은 이민자 부모를 둔 엠버의 이야기를 다룬다. 엘리멘탈 시티로 이주해온 부모가 일궈낸 가게를 물려받는 일이 자신의 소명이라 생각하는 엠버. 부모의 고생을 헛되이 하고 싶지 않은 그녀는 고객을 상대할 때면 화르르 타오르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다. 정상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압박감은 그녀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한다. 불 같은 그녀의 앞에 물 같은 한 남자가 나타나 사랑을 속삭이기 전까지는 말이다. 


<엘리멘탈>은 뻔한 할리우드 로맨스 공식을 따른다. 현실적인 장벽에 부딪힌 커플. 서로의 다름은 매혹적이면서도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진다. 커플이 사랑을 포기하려는 그 때 둘 중 하나가 목숨을 잃을 뻔한 사건이 발생한다. 죽음 앞에서 현실적인 조건 따위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둘은 서로를 찾는다. 그들의 만남을 반대했던 모든 이들은 역경 속에서도 서로를 찾아낸 커플을 이해하고 응원한다. 특유의 통통 튀는 발라드곡이 배경음악으로 흐르면 엔딩 크레딧이 오른다. 


이 영화의 뻔함에 특별함을 입히는 건 이민자, 그중에서도 동양계 이민자라는 주인공의 설정이다. Elements cannot mix라며 딸의 면전에 소리를 지르는 엠버의 어머니는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이 결혼 반댈세"를 외치는 K 드라마의 시어머니와 닮았다. 가족이 전부인 삶을 넌 이해하지 못한다며 소리치는 엠버는 부모의 넘치는 희생과 사랑에 어쩔 줄 모르는 수많은 한국계 장녀의 모습을 하고 있다. <Crying in H-Mart>, <파친코>, <미나리>, <김씨네 편의점>에는 연달아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부모가 등장한다. 자녀 세대는 백인 주류 사회와 다른 모양을 한 이들의 사랑을 백번 이해하지만 본능적으로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없어 괴로워한다. 그리고 이야기의 끝에서 모든 이민자 2세는 자신만의 삶을 살아간다. 부모의 희생을 알면서도 그에 부응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부모의 사랑에 깊이 감사하고 때때로 그 이야기를 예술로 승화시킨다. 


엘리멘탈 감독 피터 손의 편지 (감독은 한국인과 결혼하라는 할머니의 유언을 듣지 않고 이탈리아계 여성과 결혼했다고 한다)

그들은 사랑을 통해 중력을 거스른다. 엠버는 웨이드를 사랑하면서 감춰온 열망과 재능을 발견한다. 웨이드는 현실을 다른 방식으로 인지하게 한다. 현실은 장벽이 아니라 옆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나누는 축제의 현장으로 변한다. 함께 할 수 없는 백만 가지 이유는 함께 하고 싶다는 한 가지 이유로 무력화된다.

<파친코> 속 솔로몬 

<파친코>의 솔로몬은 다니던 투자회사에서 한국계 이민자의 투자 결정을 돕다 회사를 그만두기로 한다. 이민자와 결정적인 순간에 한국어로 이야기하던 그는 그제야 깊이 잠들어 있던 해방감을 느끼며 빗속에서 춤을 춘다. 그의 인생은 일본에서 파친코 사업을 시작한 아버지로부터, 그리고 그 아버지를 낳으러 일본으로 건너온 외할머니로부터, 그리고 예기치 않게 생긴 아이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베푼 언청이 증조할아버지로부터 시작되었다. 외할머니 선자는 남편 이삭에게 자신의 아이도 자기가 받은 사랑을 받을 수 있게 키울 것이라 다짐한다. 버려져야 할 아이는 버려지지 않고, 팔려야 할 땅은 팔리지 않는다. 그렇게 사랑은 현실을 변화시킨다. 


엠버가 가게를 물려받았더라면, 솔로몬이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물론 그 자체로 아무 문제는 없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이야기에서 본 것과 같은 사랑과 설렘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인생에서 아주 많은 경우 사랑과 설렘은 그 자체로 살아가는 힘이 된다. 


어느날 7011번 버스에서 나는 인생의 지금 이 시점에 메리어트 호텔에서의 결혼식, 사랑과 설레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함을 깨달았다. 버스는 서울역환승센터를 막 앞두고 있었다. 베낭을 고쳐 메고 뒷자석에서 일어나는 일이 평소보다 더 가볍게 느껴졌다. 교통카드를 카드기에 갖다 대자 하차 알림이 울렸다. 롤렉스와 티파니? 어림도 없지. 나는 빗속에서 춤을 추고, 무지개를 만들어 낼 것이다. 걸음은 가벼워지고 다리는 어째서인지 평소보다 빨리 움직이는 것 같았다. 더이상 포도가 신포도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믿음 소망 사랑, 믿음 소망 사랑. 나는 발밑의 중력이 약해지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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