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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일리 Jul 04. 2021

비대한 자아는 불행을 낳고

저는 세상 모든 이들의 행복을 빌 뿐입니다

태양은 지구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

어린 시절엔 세상이 나쁜 사람과 착한 사람 둘로 나눠져 있다고 믿었습니다. 탑에 갇혀 있는 공주는 선한 왕자를 만나 탈출했습니다. 악한 마녀는 공주에게서 목소리를 빼앗아 가려 했고, TV 속 못된 시어머니는 사랑 밖에 모르는 여주인공의 얼굴에 물을 뿌렸습니다. 권선징악의 이야기는 묘한 안정감을 줍니다. 적어도 난 저렇게 못됐지는 않으니, 아마 착한 사람의 편에 있겠지. 최초의 도덕적 판단은 다분히 자의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어린 시절 커져가는 자의식과 함께 수많은 이들과의 다툼, 상처, 절교를 겪습니다. 밤에 떠올렸을 때 이불을 차게 되는 흑역사는 어쩌면 신이 주신 선물일지도 모릅니다.


성장과정에서의 수많은 다툼과 절교는 어린 시절의 비대한 자의식을 조금씩 닳게 만듭니다. 어쩌면 내가 나쁜 쪽이었던 건 아닐까. 누군가에게 나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던 건 아니었을까. 성찰이란 자아를 꺾고 평생에 거쳐 피어나는 꽃일 겁니다. 우리가 평생에 거쳐 깨달아야 하는 사실 하나, 나는 그리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야 앞구르기만 해도 동네 어른들의 박수를 받았다지만, 지금 우리는 그냥 70억 인구 중 한 인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광활한 자연과 복잡다단한 세상 속에 당신과 나는 그냥 개별적인 사람 하나, 의견 하나, 사상 하나, 취향 하나. 다른 사람 역시 그러니 우리가 서로 다르다고 해서 미워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비대한 자아를 성장기에 미처 꺾지 못한 사람이 어른이 되면, 주변에 피해를 끼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집니다.  특히 그가 사회적으로 괜찮은 지위를 가졌거나 주목받는 어떤 위치에 섰을 때 더욱 그렇습니다. 윤여정 배우의 아카데미 시상식 발표를 '바람피운 남자에게 시원하게 먹이는 한방'이라 해석하여 주변에 불쾌감을 안겨준 가수 조영남을 생각해봅시다. 한 여배우의 세계적인 스포트라이트에 기뻐하고 있던 사람들은 전남편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발언에 원하지 않는 불쾌함을 맛봐야만 했습니다. 주변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는건 힘들지라도, 자기가 속한 사회에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는 않아야 할텐데. 안타깝게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집니다. 온 세상이 자신을 위해 돌아간다는 착각으로 의기양양해지는 사람과, 반대로 온 세상이 자기를 합당한 만큼 주목하지 않아 피해를 보고 있다며 억울해하는 사람들. 내 장난감도 내거, 네 장난감도 내거라 주장하는 다섯살 어린아이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다섯살 어린아이처럼 귀엽다고 넘어갈 수도 없는 일이죠.  


정말 원하는게 공정인가?

청년의 시대정신을 '공정을 향한 열망'으로 해석하는 정치인들이 많습니다. 금수저/흙수저 논란으로 박탈감을 느낀 청년들이 현재 여당을 심판했다고, 우리 청년들은 정말이지 '공정한 경쟁'을 원하는 예민한 사람들이라구요. 글쎄, 과연 그 공정 담론이 경제적 불평등에 분노해 나온 담론일까요?


사실 세상은 원래 공정하지 않습니다. 청년들도 그걸 알고 있습니다. 그걸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들이었다면 정용진의 인스타그램이 그런 반향을 얻었을리도, 나혼자산다에 나오는 연예인들의 화려한 삶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개인적으로 높은 재산과 사회적 인정은 1% 영감과  29% 노력, 그리고 70% 운으로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일부 청년이 원하는 공정은 다같이  사는 금수저/흙수저가 극복된 사회가 아니라, 자기가 얻은 수능 점수만큼 사회적 대접을 받는 시험에 의한 공정에 가까운  합니다. 국민의  이준석 대표는 얼마  국회의원도 일정 '자격을 갖춰야 하기 때문에' 혹은 '자기계발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시험을 통과해야 국회의원 자격을 얻을  있다고 발언했습니다. 요즘 청년들은 엑셀을   아니 국회의원들도   알아야 한다며 컴퓨터 활용 능력을 시험 과목  하나의 예로 들기도 했습니다. HBO 드라마 '이어즈  이어즈' 등장한  가상 극우 정치인의 발언이 생각납니다. "아이큐가 80 넘지 못하는 사람들의 투표권을 박탈해야 합니다!" 그는 시즌 1 끝에 당선되어 영국의 빈부 격차와 난민 문제를 심화시키는 주범이 됩니다.


어떻게 지금의 한국 사회는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당연히 시험 점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요? 이는 시험을 쳐서 대학엘 합격하고, 좋은 대학에 가면 지금껏 해온 노력에 대한 보상이 있을 것이라 철썩같이 믿은 청소년기의 자아가 그대로 남아 있어 발생한 현상이라 생각합니다. 부모가 설령 서울대에 가면 애인이 생긴다는 거짓말을 했어도, 그 이후에 삶에선 그게 거짓말이라는걸 깨달아야 합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누려온 것, 노력을 통해 얻은 것이 모두 자기가 노력한 것에 대한 보상이라는 비대하고 좁은 자의식의 표출입니다.


비대한 자아는 불행을 낳고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필자에게 '그래서 너는 뭐 얼마나 겸손하냐' 라고 묻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저 역시 자의식에 끌려다니는 자아중독 인간일 뿐입니다. 대학 서열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해본 적도, 왜 사회는 이런 대단한 나 자신을 몰라보느냐고 억울해했던 적도 있습니다.


위에 적힌 내용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래도 아버지가 논문을 써주는 것보다는 시험을 쳐서 일자리를 얻어내는 편이 낫지 않냐고. 높은 학벌을 가진 사람이 실력이 좋은건 확률적으로 맞는 것 아니겠느냐고. 그렇게 불편함을 느끼시는 분에게는 그 부분을 가뿐히 무시해도 좋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실 제가 이 글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한국 사회 청년 담론에 대한 무릎을 탁 치는 비판이 아니거든요. 저는 오히려 세상이 나를 몰라주고 있다는 억울함과 내가 이렇게 대접받아야만 마땅하다는 나르시시즘이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능력주의가 비대한 자아와 만나면 인생이 불행해지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능력주의는 필연적으로 개인을 패배자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리고 있는 사회적 환경이 나의 노력 덕분이라고 뽐내기 시작하는 순간, 나보다 더 많은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을 필연적으로 과도하게 동경/혐오하게 됩니다. 두 쪽 모두 나의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저스틴 비버는 나보다 노력을 많이 해서 롤스로이스를 타나요? 스파크를 타는 사람은 소나타를 타는 사람보다 노력을 덜 한 사람인가요? 시험과 재산으로, 직장과 결혼상대로 세상 속 나의 위치를 가늠해보면 잠깐의 위안을 얻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위안은 한순간이요, 억울함은 오래 남을 것입니다. 술자리에서 '내가 왕년에는 잘나갔는데, 지금은 대접을 못받는다'며 억울해하던 선배가 과연 행복해 보였는지 생각해보면 쉽습니다.


답은 의외로 쉬운 곳에서 나올지도 모릅니다. 바로 먼저 행복해지는 겁니다. 재산이나 성적 같은 '객관적으로 측정 가능한' 영역이 아닌, 그냥 그 자체로 자기 충족감을 안겨줄 수 있는 영역에서요. 저는 그래서 주변인을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일상의 기쁨을 찾으시기를, 덕질할 상대나 기깔나게 재미난 운동을 발견하시기를. 자녀와 애인의 '넌 너무 귀여워!' 등의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불공평하고, 우리는 언젠가 모두 죽으니, 남은 순간에 작은 기쁨을 찾을 수 있기를. 사랑과 감사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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