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살림
매일 아침 7시 바깥 세상으로 나간다. 새로 산 셔츠를 입고, 바지의 주름을 다려본다. 얼굴에 난 뾰루지를 감추기 위해 파운데이션을 덧바른다. 문이 닫힌다. 전날 뜯은 택배 상자가 바닥에 나뒹구는 건, 이따 생각하기로 한다.
대학 시절 어른이란 출근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멋진 사원증을 목에 걸고 수많은 외국인 바이어와의 커뮤니케이션을 해낸 후, 집에 돌아와 차가운 맥주 한 캔을 따는 커리어 우먼을 꿈꿨다. 면접관 앞에서 뭐든 할 수 있다며 텅빈 가슴 안에 열정과 오기만을 집어넣기를 6개월. 드디어 나에게도 출근하는 사람의 자격이 주어졌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집에 돌아와 차가운 맥주 한 캔을 따려고 보니 집이 엄청 더러웠다는 것과, 그 맥주 한캔을 따기 위해 퇴근 길에는 장을 봐야 한다는 거였다. 퇴근을 하면 자기계발과 취미생활에 온 힘을 쏟으리라 다짐했건만, 현실적으로 집안일 조금 하다보면 저녁 10시였다. 책 몇페이지 읽고 유튜브 영상을 보다 보면 어느덧 내일의 출근을 위해 잠에 들어야 했다.
문제는 내가 본격적인 살림에 익숙하지 않다는 거였다. 나는 계절별로 옷을 드라이클리닝 해서 수납해놓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때되면 이불과 시트를 바꾸고 이를 세탁해서 적당한 곳에 넣어야 한다는 걸 몰랐다. 6개월 마다 방을 바꾸던 시절 옷장은 아무렇게나 쓰다 정해진 기간이 지나면 나가버리면 그만이었고, 이불이나 기타 생활공간은 기초 청소만 해도 잘 유지되었다. 그나마 요리는 했으나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고 남은 식재료를 보관하는 데도 미숙했다. 미숙했다 정도가 아니라 지금도 미숙하다. 생활의 모든 면에서. 화장실과 신발장을 청소하고, 수납장을 정리하고, 쓰레기를 그때그때 비우고 옷장을 정리하는 그 모든 면에서. 나는 정돈되지 않은 집을 놔두고 마치 깔끔한 사람인 척 집을 나섰다. 속은 번잡스럽기 그지 없었다.
중용에 '신독'이라는 말이 있다. 삼가할 신, 홀로 독자를 쓴다. 혼자 있을 때도 삼가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삼간다'는 남들과 있을 때 행동하는 것처럼 점잖게 행동함을 뜻한다. 우리는 남들 앞에서는 깔끔을 떨지만, 홀로 있을 때는 지저분한 상태로 지내고는 한다. 남들 앞에서는 고상한 취미를 가진 척 하지만, 홀로 있을 때는 B급 만화와 보여주기 민망한 미디어를 즐기기도 한다. 중용은 이 괴리를 없애라 한다. 나 홀로 있을 때도 남들과 함께 있는 것처럼 내 몸과 마음, 주변머리를 잘 정돈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삶은 지금껏 그 신독과 정 반대였다. 나는 손님이 올 때만 집을 치우고, 남들 앞에 설때만 옷을 깔끔하게 입으며, 남들 앞에서 아는 척을 해야 할 때면 책을 읽었다. 나이를 먹고서도 내가 설 자리 하나를 관리 못한 셈이다.
어른이란 무엇일까? 나는 어른이란 자신을 먹이고 입히고 살게 하는 자라고 정의내리고 싶다. 아이들은 스스로 먹지 못한다. 양육자가 밥숟가락으로 먹을 것을 입어 떠 넣어 줘야만 생활을 유지한다. 자기가 살아갈 공간을 꾸리지 못한다. 장난감으로 신나게 놀다 보면 양육자가 어느샌가 치워줄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흔히 어른의 조건으로 경제력을 꼽는다. 그러나 억만장자조차 자신을 위한 요리 한 그릇도 못한다면 깜찍한 어린이에 머무는 존재다.
그러니 나는 살림의 미숙함을 부끄러워하기보다, 이 미숙함을 알아가는 과정 자체를 어른이 되어가는 순간들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냉장고에서 음식이 썩어가는 것도, 머리카락이 바닥에 나뒹구는 것도 다 내가 부족한 탓이니 어쩌랴. 30대의 멋진 커리어우먼은 하이힐을 신고 화려하게 도시를 누비는 여성이 아니라, 그 화려한 하이힐을 잘 관리하여 몇년이고 신는 여성일 것이다. 냉장고 속 시원한 맥주 한캔과 잘 다려진 셔츠를 위해 오늘도 청소기를 돌리는 여성일 것이다. 20대 초반의 내가 꿈꾸던 건 멋진 커리어 우먼이었다. 그리고 난 지금 멋진 살림왕을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