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먹고살게 하기 위해
'겨우 서른'은 상해에 거주하는 서른이 된 여성 셋이 꿈과 사랑을 좇는 내용의 중국 드라마로, 자국은 물론 넷플릭스에도 공개되며 한국 관객에게도 입소문이 난 작품이다. 스토리라인도 탄탄하지만 무엇보다 상해라는 도시 안 사람들의 욕망과 삶의 애환을 잘 보여줬다는 평을 받고 있다.
"여성들의 도시 라이프"를 주제로 한 TV 시리즈가 등장한다는 것은 그 도시가 후대 여성들에게 동경의 공간이 될만한 자격을 획득했다는 이야기와 동일하다. 일찍이 "Sex and the City"의 뉴욕이 있었고, "로맨스가 필요해", 그리고 "WWW 검색어를 입력하세요"의 서울이 그 계보를 이었다. 파리를 배경으로 한 "에밀리 인 파리"를 말해 무엇하랴. 중화권에서는 좁게 봤을 때 "겨우 서른"의 상하이, 넓게 보자면 "Crazy Rich Asian"의 싱가포르가 배경이 된다. 자라나는 여자 청소년들은 멋진 커리어우먼들이 등장하는 TV 시리즈를 보며 꿈을 키운다. 어떤 직종이 꿈이 되기보다 도심 속 멋진 커리어우먼이라는 이미지 자체가 꿈이 되는 경우도 많다. 나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그 TV 시리즈들은 언젠가 대도시에서 일하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킨 주범이기도 했다. TV 속 커리어 우먼은 지방 소도시에서 일하지 않는다. 디트로이트나 미네소타, 울산과 오사카에서 일하지 않는다. 그들이 일하는 곳은 항상 화려한 도심이다. 욕망이 우글거리고, 사람들이 끊임없이 몰려드는 곳. 자라나는 여학생들에게 그 욕망은 앞코가 뾰족한 구두와 퇴근길 그녀들이 들르는 맥주집의 이미지로 각인된다.
흔히 도시로 모여드는 이유가 일자리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정책입안자들은 지역균형개발의 방법으로 공공기관 이전과 재건축, 도시재생 사업 등을 꼽는다. 물론 일자리가 많아지고 좋은 집이 생겨나면 그 도시는 더욱 매력적으로 변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과연 좋은 일자리와 아파트만을 찾아 상경하는 것일까? 좁은 집에 빨래가 다닥다닥 널린 홍콩이나, 지하철이 더럽다 못해 위험한 뉴욕은 어떤가? 사실 사람들은 하나하나를 따지면서 도시에 대한 환상을 키우지 않는다. 요소요소를 따지기 전 이미 그 라이프스타일 자체를 동경하게 되는 것이 맞는 순서다. 결국 도시에 대해 알기도 전에 그와 사랑에 빠져버리는 셈이다. 마치 좁은 홍콩식 아파트와 뉴욕의 차가운 밤거리가 낭만으로 포장되는 것처럼 말이다. 젊은이들은 일자리와 번쩍거리는 아파트라기보단, 어떤 꿈을 좇으며 도시를 사랑하게 된다.
도시는 지방 사람들에게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자, 자신이 살고 있는 이곳에는 없는 몇몇 속성을 가진 꿈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익명성과 다양성이다.
비교적 인구가 적고 직업군이 다양하지 않은 지역에 비해 대도시에는 나 하나쯤은 신경 쓰지 않을 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산다. 이는 도시 속 인간 소외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특이한 개개인을 포용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당장 특이한 사람들이 어디서 더 많이 사는지를 떠올려 보면 편하다. 퀴어 퍼레이드를 농촌에서 하는 사람은 없다. 드랙 퀸 공연은 후미진 도시의 뒷골목에서만 볼 수 있다. 말 그대로 도시의 공기가 자유를 만들기 때문이다.
도시는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넓은 범위의 일자리와 기회를 제공한다. 사람들이 모여 있다 보니 여러 가지 일을 시도하기에도 적합하다. 비싼 임대료에도 불구하고 한국 스타트업의 60%가 수도권에, 벤처캐피탈의 90%가 서울에 몰려 있다. 젊은이들이 아이디어를 내고, 투자를 받고, 네트워킹하는 그 모든 과정에 서울의 넓은 네트워크는 필수다.
전통적인 인간관계에 의해 사업이나 문화가 결정되는 일이 많은 지방과 다르게, 규모가 큰 대도시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운 관계 맺기와 기회 찾기가 가능하다. 그리고 대도시의 다양성과 가능성은 상대적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게 더 큰 가치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젊은 여성들은 이러나저러나 전통적 가치를 가진 세대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고령화가 많이 진행되고 직업군이 다양하지 않은 지역의 여성들은 더욱 자유롭지 못한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대도시는 그런 여성들에게 어떤 기회의 땅이 된다. 지방에는 많지 않은 다양한 직업 선택 및 인간관계의 기회가 도시에 모여 있다. 다양하고 진보적인 가치를 지닌 문화 콘텐츠도 도시에 집중되어 있다. 그렇기에 도시 여성의 삶을 소재로 하는 TV 시리즈는 웬만큼 발달된 도시가 아니면 잘 등장하기 힘들다. 아직까지도 많은 도시에서 여성은 대도시가 제공하는 만큼의 자유와 익명성을 누리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살기 좋은 도시는 결국 모두에게 살기 좋은 도시가 될 수밖에 없다. 도시는 증가하는 인구로 생명력을 얻고, 인구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젊은 여성이 기꺼이 눌러앉을만한 환경이 제공되어야 한다. 그리고 젊은 여성들은 가능성과 다양성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줄 만한 포용성을 원한다. 그리고 지금 한국에서 이 모든 가치를 제공해준다 말할 수 있는 곳은 서울 하나뿐이다.
인구의 서울 집중, 그리고 그에 따른 지방 소멸을 막기 위해서는 서울에 대항할 만한 도시가 한국에 하나 이상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대규모 산업단지를 지방에 심거나, 정부 기관을 통째로 이전하는 것 이상의 노력, 바로 젊은 여성을 유혹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광주나 부산에서 성공하는 멋진 커리어우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면, 한국은 비로소 서울 집중 현상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청년 여성이 서울에서 누리는 것 만큼의 익명성, 다양성,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다면, 자신이 이 도시의 주체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면, 그들은 그 도시의 중심에서 멋지게 걸어가기를 선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