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경제적 자유' 광풍에 대하여
4년만에 15억을 벌었다는 월급쟁이, 부동산으로 70억을 번 자산가, 주식으로 돈방석에 올랐다는 슈퍼 개미. 요즘 내 유튜브 알고리즘은 돈으로 가득차 있다. 초록창 쪽지함은 월 천만원을 벌 수 있다는 속삭임으로 가득하다. 내가 직장인이 된지 얼마 안 되었음을 눈치챈 것일까, 아니면 이 세상이 점점 월 천만원을 벌고 싶은 사람들로 가득차고 있는 것일까.
일찍이 예수는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 진리라 말했다.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2천년이 지난 지금 그 누구도 진리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부활했다던 예수는 금싸라기 땅의 교회 안에서 숨쉰다. 그리고 그 교회조차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한다는 자본주의가 등장했다. 동학개미들의 아버지 존 리는 부자를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말한다. 돈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돈이 많아야 한다. 우리는 자유 앞에 '경제적'이라는 단어를 붙이기 시작했다.
본래 경제적 자유란 경제 활동을 할 자유를 뜻한다. 영어로 Economic Freedom이란 개인이 자신의 욕구를 위해 경제(돈을 버는) 활동을 할 자유이며, 국가가 나의 사유 재산을 침해하면(세금을 통해) 이 economic freedom이 저해된다고 보는 시각까지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다. 한국에서 경제적 자유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의 경제적 자유란 '일을 하지 않아도 될 자유'이다. 유튜브에 경제적 자유를 검색해 자기 본업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한번 살펴보길 바란다.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자유로운 사람'은 일을 하지 않아도 매달 금융 소득으로 일정 수입을 벌어들이는 사람이다. 이들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이들이 번 액수와, 이를 통해 창출되는 금융 소득이다.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으로 양극화 문제를 거론한 지 7년이 지났다. 7년 전 대학생이었던 나는 불평등이 악화된다는 사실에는 분노했지만 '자산수익률이 경제성장률을 넘어선다'가 정확히 어떤 뜻인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 와서 보니 피케티는 많은 제테크 유튜버들이 이야기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무리 일해봤자 돈이 돈을 낳는 것을 넘어설 수는 없고, 자본시장이 계속 팽창하는 이상 실질 소득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 말은 '월급쟁이로는 절대 부자 못 됩니다 여러분'과 같은 말이다.
피케티가 말한 양극화 문제가 개인에게 자유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점은 흥미롭다. 사람들은 올라가는 자산 가격, 터무니없는 소득을 벌어들이는 자산가와 연예인을 보며 그들이 무한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한남 더 힐에 사는 BTS의 멤버가 원룸 오피스텔에 사는 나보다 더 큰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할 수 있다. BTS의 멤버는 퍼스널 쇼퍼를 데리고 유명 패션 하우스의 옷을 시즌별로 살 자유가 있다. 반면 나에게는 SPA 브랜드의 옷을 세일할 때 지르는 자유가 있을 뿐이다. 신세계 정용진 부회장은 원한다면 야구단을 통째로 사버릴 자유가 있다. 반면 나에게는 야구 티켓을 살 자유가 주어진다. 마치 사람이 가진 돈의 크기 만큼 자유가 정해진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사실 자유는 그렇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소비자로서의 자아를 배제하고 생각했을 때, 보유 중인 자산 혹은 현금흐름이 자유로움에 끼치는 영향이 크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시간을 마음대로 융통할 자유가 있을 수 있다. 이 점에서는 정용진 부회장과 나의 자유도가 비슷할지도 모른다. 혹은 표현의 자유가 있을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자유는 기본적으로 민주 사회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므로 어느 쪽이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니 한국에서의 '경제적 자유'란 결국 소비자로서의 자유를 뜻하는 셈이다. 당신이 소비자로서 이 세상 모든 것을 소비하고 싶다면, 예를 들어 시즌별로 옷을 장만하거나 야구단을 사고 싶다면 경제적으로 풍족해질수록 자유도 또한 높아진다고 말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소비자가 아닌 인간에게는 자유와 돈의 크기가 양의 상관관계를 이루지 않는 경우도 많다. "돈으로는 행복을 살 수 없어요!" 식의 징징거림을 전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냥 자유라는 그 말과 돈의 관계를 한번 따져 보자는 얘기다.
흔히 자유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다. 흔히 소극적 자유를 ~로부터의 자유, 적극적 자유를 ~를 향한 자유라고 이야기한다. ~로부터의 자유는 결국 제약에서 해방되는 수준의 자유를 뜻한다. 예를 들어 국가가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면 국가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리고 싶을 것이다. 회사가 내 사생활을 침해하고 있다면 공적 생활로부터의 자유를 수호하고 싶을 수 있다. 흔히 경제적 자유에서 묘사하는 자유의 모습과 유사하다. 자유로운 인간을 묘사할 때 우리는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먹고 싶을 때 먹는 사람"이라고 말하고는 한다. 정확히 말하면 출근 시간으로부터의, 점심 시간으로부터의 자유를 우리는 원하는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소극적 자유가 사실 국가와 기업의 재량에 따라 조정 가능하다는 점이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서 일을 할 수 있게 하고, 먹고 싶을 때 자신이 원하는 메뉴를 먹을 수 있게 하는 게 과연 그리 어려운 일일까? 요즘의 경제적 자유 광풍은 어쩌면 일반적인 근로자들이 근로 환경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일지도 모른다.
적극적인 자유는 ~를 향한 자유가 된다. 예를 들어 권력 의지가 있는 사람은 공직에 출마하는 것이 권력을 향한 자유를 추구하는 길이 된다. 이 사람에게는 그냥 가만히 내버려두는 상태(소극적 자유 상태)가 진정한 자유로 느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예술인으로서 창작물을 만들고 싶은 사람에게는 창작물을 향한 자유가 적극적인 자유 추구일 것이다. 이 사람은 아침에 마음껏 늦잠 잘 자유가 주어진다고 해도 완벽하게 자유롭다고 느끼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다.
적극적인 자유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욕구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자신이 어떤 것을 진정으로(남의 욕망을 투영하지 않고) 원하고 있는지 파악해야만 그 대상을 향한 자유 실천이 가능해진다. 사실 이 자유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돈은 매개가 될 수밖에 없다. 돈을 많이 모으는 것 그 자체가 목표인 사람은 없다. 제테크 서적은 모두 돈을 모아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한다. 그 하고 싶은 것이 없으면 소극적 자유도, 적극적 자유도 사실 어정쩡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토마 피케티와 제테크 유튜버들이 사실 같은 이야기를 했던 것처럼, 예수와 존 리 역시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존 리가 선지자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걸 모두 알아차려주기를 바란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뒤에는. 돈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 어느 정도의 돈을 뜻하는 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으니, 사실 진리(자신의 욕구에 대한 이해)를 탐구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 진리를 통한 자유에 필요한 예산을 짜는 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