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루만이라도 예쁜 집에 살고 싶어
퇴근 후 네이버 부동산을 보는 습관이 생겼다.
사이트에 접속한 후, '가격' 필터를 클릭한다. 5억 이하로 맞춰놓은 다음 직장과 최대한 가까운 지역을 뒤지기 시작한다. 꿈은 크게 가지라 했으니, 빌라 탭이 아닌 아파트 탭 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가끔 가다 운이 좋아 5억 이하 아파트를 발견해 클릭해보면 이내 아파트의 탈을 쓴 원룸 오피스텔이라는 걸 알게 된다. 매번 알면서도 보라색 화살표가 뜨면 클릭하는걸 멈출 수가 없다. 아파트 탭에서 오피스텔 탭으로, 오피스텔 탭에서 빌라 탭으로 넘어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 모른다.
네이버 부동산을 실컷 뒤지다 보면 슬슬 지금 집을 사는 건 아무래도 무리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잔뜩 "영끌"했다 나중에 은행에 피 빨리는 거 아니야? 유튜브에 '집값 버블'을 검색한다. 지금은 상승장 후반부라 우선 무주택자들은 기다리는게 낫다는 전문가들의 말을 참고한다. 그래, 역시 그렇겠지? 앞으로도 집값은 계속 상승할 것이라는 다른 전문가들의 말은 애써 무시하기로 하자. 오늘도 집을 사겠다는 꿈은 가슴 속 깊으로 꺼진다. 요즘의 생활 패턴이 이랬다.
직장생활 1년이 지나고 통장에 어느 정도 돈이 모일 무렵 '내 집을 사고싶다'는 강력한 욕구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다른건 필요 없었다. 계약이 만료되지 않고, 겨울옷과 겨울 이불을 넣어놓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했다.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공간이 분리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 욕망이 끓어오른 것이 2021년 초였다는 것이다. 그 전에도 집 값이 비싸다는 얘기는 심심찮게 나왔지만, 지금 집값은... 정말 비쌌다. 그때부터 쉬는 시간의 대부분을 네이버 부동산에서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집 가격을 훑어보며 놀라기 바빴지만, 이내 감당할 수 없는 집값이 점점 아무렇지 않게 느껴진다. 5억을 하는 집이 싸다(?)는 말을 뱉을 정도니 말 다했다. 괜히 살 수 없는 집 안을 구경하는 맛만 들려버렸다.
문제는 내가 당장 집을 사야 할 상황도 아니라는 거였다. 당장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집에서 조금 더 살 수 있는데도, 몇달 사이에 천만원씩 오르는 집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조급해지는게 문제였다. 오랜 시간 원룸에서만 살아온 답답함이 한꺼번에 터지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부모님 집을 나와 내 책상 한 칸만 있는 것만으로도 기쁘기 그지 없었지만, 욕심은 한번 자극하니 끝도 없었다.
네이버 부동산과 부동산 유튜버들의 방송은 묘한 중독성이 있다. 마치 내가 억대 자산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거나, 지금 가지고 있는 종잣돈으로 당장 갭투자를 시작해야 할 것만 같은 불안함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나는 현실과 점점 멀어졌다. 밖에 나가지 않고 주말 내내 부동산 얘기와 청약홈만 들락거리는 경우도 많았다. 어떻게 하면 집을 살 수 있을까. 엑셀 창에는 대출에 따른 이자 시나리오만 깜빡거렸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그 망상에서 빠져나오기로 결심했다.
시작은 나, 지금 뭐 하고 있지? 라는 생각에서부터였다. 20대 후반에 종잣돈도 별로 없는 사회초년생이, 6억 7억짜리 아파트를 왜 보고 있지? 내가 이 아파트를 빚을 내서 산다고 해서 당장 그 이자를 갚을 돈이 있나? 설사 몇천만원이 오른다 해도 관리비와 수리비를 모두 감당할 만한 여유가 있나?
전혀 없었다. 나는 인플레이션 헷지라는 그 한마디로 그냥 겁에 질린 채 빈지워칭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자기 연민에 빠져있을 만큼 상황이 좋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여느 사람과 다름없이, 20대 후반에 직장을 얻어 처음으로 돈을 벌고 있을 뿐이다. 내가 돈이 많지 않은 건 그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그냥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오히려 20대 후반에 아파트를 턱턱 사는 사람이 특수한 케이스인것을, 나는 미디어에 나오는 화려한 자산가와 연예인의 이미지에만 홀려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와 똑같은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어떤 이는 연봉을 높이기 위해 자격증 공부를 했고, 어떤 이는 부모님 집에서 최대한 독립을 미루고 있었다. 어떤 이는 주식 어플리케이션을 들락거리며 벼락 부자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 네이버 부동산만 죽어라 쳐다보는 것 보단 현명한 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종잣돈이 없는 지금 내가 살 수 있는 집은 없었으므로.
그래서 나는 뭘 했냐고? 나는 라탄 빨래바구니를 샀다.
나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당장 사는 곳을 바꿀 수도 없었고, 더 많은 월급을 받을 수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일 조금 더 행복한 하루를 만들기 위해 예쁜 빨래바구니를 사는 것. 화장실 수납장과 방향제를 바꾸는 것. 널브러진 옷과 책을 정리하고 집을 좀 더 깔끔하게 만드는 것, 그것 밖에 없었다. 당장 30평 짜리 아파트를 살 수는 없지만, 7평의 내 방은 좀 더 예쁘게 만들 수 있으니까.
2030의 인테리어 열풍이 뉴스가 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남성들이 방을 꾸미는 것을 보고 누군가는 '남성의 여성화'라고, 누군가는 'SNS에 자랑하기 위한 용도'라고 평하고는 했다. 그러나 2030은 지금 방을 꾸미는 것 외에 할 수 있는게 없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먼 미래를 봤을 때 인테리어에 드는 돈을 아끼고 투자해서 종잣돈을 늘리는 게 맞지 않느냐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먼 미래를 위해 돈을 모아 나가서 살 수 있는 자산은 거의 없다. 때로는 비합리적인 소비가 누군가에겐 합리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나에게 1억이 있었다면 갭투자를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100만원이 있다면, 빨래바구니를 사는게 더 합리적이다. 당장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
돈이 많다면야 인테리어가 대수일까. 한강뷰의 풀옵션 신축 아파트에 산다면 굳이 소품 하나하나를 취향에 맞게 고르고, 공간 배치를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수납을 걱정하고 조금이라도 더 공간을 구분하려고 애를 쓸 필요가 있을까? 멋진 뷰도, 넓은 공간도, 짱짱한 옵션도 없는 보통의 청년도 예쁜 집에 살고 싶다. 현생에 지친 내 몸을 좀 더 멋진 소파와 침대에 누이고 싶다. 단 하루라고 예쁜 집에 살고 싶어서, 나는 네이버 부동산보다 오늘의 집에 접속하기를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