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원하던 직장에 취업해 남부럽지 않은 연봉을 받으며 일하는 친구 A는, 요즘 부쩍 독립에 대한 생각이 많아진다고 했다. 그의 일산 집은 광화문 직장과 그리 멀지는 않았다. 통근 거리 때문이냐고 물어보니, 그건 또 아니라고 했다.
"TV 때문이야. 집 나가고 싶은거"
그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TV 때문이라고? 자취하면 TV가 생기는게 아니라 오히려 없어질텐데. 의뭉스러운 눈을 한 나에게 친구는 독립하고 싶은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집에 들어가면 쉬고 싶거든. 나도 일 하고 밖에서 진 다 빼고 돌아오면 에너지를 충전할 구석이 필요하단 말이야. 그런데 아버지랑 형이 거실에서 계속 TV를 보고 있다보니 계속 정신이 사나워지는거야. "
"나는 내일도 직장엘 나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루 종일 TV소리가 들리면 내가 원래 하려고 했던 하루의 마무리를 못하게 되잖아. 일기를 쓰려고 해도 도무지 집중이 안되고, 어머니는 불쑥불쑥 방에 들어오지. 주말에도 아침에 일어나면 계속 TV 소리를 들어야 된단 말이야."
그는 놀랍게도 이 얘기를 하면서 약간 울먹이고 있었다. 가을의 아름다운 햇살은 부모님과 함께 사는 스트레스로 사라진 모양이었다. 뭐였을까, 눈부신 토요일 오후에 그를 이토록 슬프게 만든 건. 우리는 왜 이렇게 자기만의 방을 갈망하는 것일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단톡방에서 본인 방 인테리어를 싹 바꿔보리라 비장하게 다짐하는 친구를 보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네이버 부동산을 하루 종일 보는 것처럼, 친구 역시 자신만의 방을 가지고 싶다는 욕구를 마음 속 깊이 눈물을 쏟아낼 정도로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집 나가면 고생이라던, 나가면 새는게 돈이요 없는게 시간이라던 부모님의 말이 떠올랐다. 그렇게 고생할게 뻔한데, 왜 우리는 점점 나가고 싶어하는 걸까?
일찍이 시대의 현자 버지니아 울프는 책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에게 자기만의 방이 필요한 이유를 써 낸 적이 있다. 여성 해방에 대해 쓰고 싶다면 투표권이나 성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시선에 대해 써도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자기만의 방에 대해 약 170쪽 분량의 에세이를 쓰기를 선택했다.
책은 작가 버지니아 울프가 숙모가 낙마해 돌아가시면서부터 연간 500 파운드의 유산을 상속받는 것을 알게 되는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관련 소식을 들은 날은 여성에게 남성과 동일한 투표권이 주어진 날이었는데, 그녀는 솔직하게 투표권보다 더 기쁜 소식은 바로 유산 소식이었음을 고백한다.
나는 은화를 지갑 안에 미끄러뜨리며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유산을 상속받기 전)의 쓰라림을 기억하건데, 고정된 수입이 사람의 기질을 엄청나게 변화시킨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요. 이 세상의 어떤 무력도 나에게서 500파운드를 뺴앗을 수 없습니다. 음식과 집, 의복은 이제 영원히 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력과 노동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증오심과 쓰라림도 끝나게 됩니다. 나는 누구도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 <자기만의 방>은 단순한 방에 대한 책은 아닌 셈이다. 그보다는 여성이 고정 수입을 가지게 되었을 때 가지게 되는 태도, 그리고 그 태도에서부터 나오는 자유와 평등에 대한 책이다. 작가는 책 내내 자기만의 방에 더해 연 500파운드의(현재 돈으로 약 연 4천만원) 고정 수입에 대한 언급을 놓지 않는다. 고정 수입에 더해 외부인(특히 남성 가족 구성원)으로부터 방해받지 않는 일정 공간이 보장받은 다음에야 여성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나는 마지막 장을 읽으며 그녀에게 백 년을 더 주자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녀에게 자기만의 방과 연간 500파운드를 주자, 그녀가 솔직하게 자신의 내면을 이야기하고 지금 쓴 것의 절반을 빼버리도록 허용해 주자. 그러면 그녀는 조만간 더 나은 책을 쓸 거라고 말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들에 달려 있습니다. 시는 지적 자유에 달려 있지요. 그리고 여성은 그저 이백 년 동안이 아니라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언제나 가난했습니다. 여성은 아테네 노예의 아들보다도 지적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여성에게는 시를 쓸 수 있는 일말의 기회도 없었던 거지요.
1920년대에 쓰인 버지니아 울프의 연설 아닌 연설 안에는 21세기 한국의 모습도 있다. 아버지의 TV 소리를 피해 독립하고 싶어하는 한 남자와, "오늘의 집" 어플리케이션에서 예쁜 러그를 사모으는 여자는 모두 버지니아식 '자기만의 방'을 위해 고군분투 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단순히 직장 근처의 방을 잡아 사는 차원을 넘는 한 개인의 해방 선언이나 다름이 없다. 자기만의 방에서 자신이 원하는 책을 쓸 때에만 약자(1920년대의 여성)은 비로소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지금까지 가족 단위의 삶에 집중해왔다. 집은 가족이 다 같이 사는 곳이고, 그곳에서의 행복은 종종 가장이 아닌 다른 집안 구성원들의 자유를 침해할 때가 있었다. 거실에 TV를 놓는 것이 단적인 예시다. 가족 구성원은 가장이 노동을 끝내고 집안 전체를 예능 프로그램의 소리로 채우는 것에 반기를 들 수 없다. 1,2층으로 구분되지 않은 한국의 아파트에서는 작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근다고 해서 자기만의 방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자식들이 경제권을 가지기 전까지는 이런 자유의 제약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될지 모른다. 그러나 고정 수입(연 500파운드: 경제권)이 생긴 자식은 점차 이 자유를 제한당하고 싶지 않아한다.
1인 가구를 결혼 전의 임시적 생활 상태로 보는 시기는 이미 지났다. 한국 전체 가구의 가장 많은 비중을 1인 가구가 차지한다. 높아져버린 부동산 가격과 결혼을 기피하는 성향에서 이들을 분석하는 시선도 있다. 그러나 아마도, 이들의 상당수는 자기만의 방을 찾아 이미 떠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남아있는 10%의 4인 가구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1인 가구로 점차 흩어질지 모른다. 자기만의 방을 향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