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 갇힌 빛 - 소금이 지켜낸 예술에 대해

오스트리아 알타우제 소금광산 방문기

by 헤일리

타임라인이 다소 뒤죽박죽이지만, 4월 이스터 여행 기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2박을 하면서 꼭 소화하고 싶었던 1박의 일정은 할슈타트와 소금광산. 석탄 캐는 광산은 접해봤어도, 소금을 캐는 광산을 볼 수 있는 기회는 드물테니 말이다. 게다가 잘츠부르크(Salzburg)가 그야말로 ‘소금(Salz)의 성’인데, 근처의 소금광산을 놓친다면 노른자를 빼놓고 가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사실 소금광산은 전 세계 어디에나 존재한다.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광산 출신의 소금은 아마도 히말라야 핑크 솔트일 것이다. 다만 유럽, 특히 오스트리아의 광산들이 유독 유명한 이유는 중세 시대부터 유럽 경제를 지탱했던 ‘하얀 황금’의 중심지였고, 그 역사를 영리하게 보존해 훌륭한 관광지로 일궈냈기 때문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여행 전 알아보니 할슈타트 내 소금광산은 공사 중이었다. 아쉬운 대로 40분 정도 더 떨어진 알타우제(Altaussee) 광산을 예약했다. 결과는 '오히려' 대만족. (왜 '오히려'인지는 글 말미에 나와있다.) 딸아이와 친정엄마 모두 이번 이스터 휴가를 통틀어 가장 즐거웠던 순간으로 이곳을 꼽았으니 말 다 했다.

어서 와, 소금광산은 처음이지? (’쇼‘가 컨셉인 광산 체험)

소금 하면 염전을 먼저 떠올리는 한국 사람으로서, 소금광산에 들어가니 흥미롭고 신기한 것들이 참 많았다.

우선, 서늘한 광산 속에 들어가서 만져본 소금 벽의 질감이 너무 생생했다. 호기심 많은 딸 아이는 소금 벽에 손가락을 대서 만지고선, 그 손가락의 냄새를 맡아보더니 짜다며 신기해했다. 찾아보니 이 광산은 박제된 유적이 아니라 여전히 현역이다. 과거엔 광부들이 곡괭이로 암염을 깨부쉈다면, 지금은 시추 용해 방식을 쓴다. 지하 소금층에 물을 주입해 녹인 후, 그 염수를 지상으로 끌어올려 정제하는 식이다. 이렇게 생산된 소금은 파이프라인을 타고 인근 에벤제(Ebensee) 공장으로 보내져 화학 공업, 제약, 식용 소금이 되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간다.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변해있는 시대에, 수억 년간 건재한 물질의 세계를 목도하니 묘한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변하지 않을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인류가 결국 물질의 세계에 기대어 살고 있다는 것.’ 우리가 빛의 속도로 정보를 주고받는 광케이블조차 결국 지각에서 추출한 규사와 광물에서 온 것이 아니던가. 수백 년 전과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인류의 후손인 내가, 수백 년간 자리를 지켜온 원시적인 공간에서 흐르지 않는 물질의 시간을 마주하는 경험이 참으로 묘했다.


하지만 알타우제 광산에는 이런 물질적 풍요보다 더 특별한 서사가 숨어 있다. 그것은 이 곳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진귀한..루브르급의 '지하 박물관'이었다는 것.

히틀러는 그 당시 자신의 고향인 린츠(Linz)에 세계 최대 규모의 총통 미술관을 세우려 했다. 이를 위해 유럽 전역에서 약탈한 미술품 6,500여 점을 습도가 일정하고 폭격으로부터 안전한 알타우제 광산에 숨겼다. 미켈란젤로의 <브뤼헤의 성모>, 베르메르의 <회화의 기술>과 <천문학자>, 얀 반 에이크의 <헨트 제단화> 등 인류의 보물들이 이 어두운 소금 굴속에 갇혀 있었다.

각 국에서 유명한 작품들을 잘도 약탈해서 광산에 숨긴 극악무도한 나치…

이야기는 여기서 절정을 향한다. 전쟁에서 패배의 기운이 짙어지자, 나치는 미술품과 광산을 모두 폭파하려 했다. (내가 가지지 못할 바에야 파괴하겠다는 고약한 심보!!) 전쟁 말기, 나치는 거대한 항공기 폭탄을 광산 안으로 들인다. 하지만 예술의 가치를 소중히 여겼던 광부들이 폭탄을 몰래 밖으로 빼내고 장치를 무력화하면서, 작품들은 다행히 생존하게 된다. 보물급 예술품들을 지켜낸 영웅이 화려한 군인이 아닌, 투박한 손을 가진 소금광산의 광부들이었다는 점이 이 서사에 뭉클함을 더한다. (영화 <모뉴먼츠 맨>의 실제 배경이기도 하다.)

진정한 영웅, 그대의 이름은 광부!


예술을 구한 영웅적 서사의 여운이 채 가시기 전, 광산은 우리를 광부들의 생생한 일상 속으로 안내한다. 그것은 광부들의 이동수단이었던 나무 미끄럼틀 체험.

소금광산은 수직으로 깊게 파 내려가는 구조가 아니라 산의 경사를 따라 여러 층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 체력 소모가 너무 컸기에, 광부들은 위층에서 아래층으로 빠르게 이동하기 위해 나무 미끄럼틀을 탔다고 한다. 그 미끄럼틀을 현대식으로 설치해놓은 것을 경험했는데, 경사가 급격해서 제대로 스릴 만점이었다. 관광 상품을 제법 잘 팔 줄 안다고 느꼈던 것이, 한번 타고 아쉬움을 뒤로했더니 몇 분 뒤 새로운 미끄럼틀 코스가 나온다. 끝인 줄 알았는데 또 한번 태워주니 만족 대만족..!


꽤 가파른 미끄럼틀, 매우 재미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피날레는 광산 내의 공연장이었다.

어두운 광산 속에서 펼쳐지는 빛과 소리의 향연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한때 노동의 근원지이자 전쟁의 긴박한 수장고였던 공간이 예술을 선보이는 무대로 재탄생했다는 사실, 그리고 2026년의 내가 그 역사의 한복판에서 평화롭게 공연을 보고 있다는 사실에 코끝이 찡해졌다.


사진으로는 온전히 담기지 않는 감동의 순간

잘츠부르크를 방문한다면, 알타우제 소금 광산을 가볼 것을 정말 강력하게 권하고 싶다. 루브르급 예술 작품들이 머물렀던 서사를 품은 소금벽은 오직 이곳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하며 기억을 끄집어내기 위해 꺼내본 사진과 영상과 함께, 소금 광산의 추억을 달콤하게 곱씹는다.

유럽 여행은 계속 내가 과거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감각하게 한다. 2억 년 전의 바다가 만들어낸 소금 벽이 현대 산업의 혈관이 되고, 이름 없는 광부들의 손길이 인류의 걸작을 구원해낸 그 경이로운 연결고리들. 그 감각이 다른 여행지에서 또 어떻게 깨어질지, 기분 좋은 기대를 품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