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모든 월급쟁이는 사장을 꿈꾸나요?
며칠 전, 혼자 강릉여행을 다녀왔다. 꽤 오랫동안 번아웃에 시달렸는데, TV와 핸드폰, 회사 모니터에서 벗어나 아날로그 생활을 하고 싶어서 에어비앤비를 열심히 뒤져 제격인 숙소를 찾았다. 숙소 값이 꽤나 비싸서 오랫동안 고민했으나, 어느 주말 밤 이대로 뒀다간 내가 다시 우울이나 무기력 늪에 빠지겠구나 싶어서 일단 결제를 했다. (결제를 하면 취소를 못하므로...) 그렇게 도착한 숙소는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웠고, 조용한 숙소에서 혼자 잠들고 일어나 뒷마당 문을 열어 바람 소리와 바람에 나뭇잎이 사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다가, 답답해질 때쯤 씻고 나가 약 10분 거리에 있는 바다를 보고, 그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책을 읽는 생활을 2박 3일동안 했다. 그리고 돌아온 일상에서 나의 번아웃은 어느정도 해소되었고, 예전에는 새벽 한시까지 자고 싶은데 잠이 안와서 애꿎은 핸드폰만 들여보며 괴로워했다면, 지금은 퇴근하고 집에 와서부터는 핸드폰을 최대한 켜지 않으려 하고, 그러니 이번주 내내 11시 반이면 잠들곤 했다.
여행을 가면 나는 기념품으로 마그넷과 책을 사오는 편이다. 해외 여행을 가서는 그 나라 언어로 된 책을 사오곤 하는데, 국내 여행일 때는 보통 독립서점을 찾아간다. 강릉 숙소의 호스트님께서 내가 책을 읽으며 쉬기 위해 숙소를 방문한다고 했더니 강릉의 한 독립서점에서 큐레이션 받아오신 책을 비치해두셨다. 덕분에 2박 3일동안 총 4권의 책을 읽었는데, 집에 오는 기차를 타기 전에 그 서점을 찾아가 '비밀책'을 구매했다. 비밀책은 보통 독립서점의 사장님들이 큐레이션한 책을 안보이게 포장하고, 그 책을 대표할 수 있는 문장이나 단어들을 기입하면, 독자들이 그 단어들만 보고 구매를 하게 되는 시스템이다. 작년 제주도 여행 때 처음으로 구매했었던 비밀책이 생각보다 너무 마음에 들었던 기억이 있어서, 그 뒤로 여행할 때마다 부러 독립 서점을 찾아가 비밀책을 구입하곤 한다.
이번 여행에서도 내가 생각하는 점을 딱 표현한 문장으로 포장된 책이 있길래 그 책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생각만큼 좋은 책이다. 책은 어떤 작가의 에세이인데, 나처럼 시간의 순서대로 그때그때 생각나는 점들을 기록하여 모은 책이다. 그래서 그런지 책을 읽는 순서에 따라 그녀의 취준시절, 면접 후, 입사, 부서 이동, 퇴사, 퇴사 후 일상을 따라가게 된다. 지금 읽고 있는 부분은 그녀의 퇴사 후 일상인데, 아마 그녀는 퇴사 후 제주 살이를 하러 떠난 것 같다. 제주에 머물면서 그녀는 그동안 그녀가 놓치고 살았던 것들을 하나 둘씩 느끼며 살아간다. 공교롭게도 강릉 여행 때 호스트 분이 준비해주신 책 중에 가장 먼저 집어들었던 책에도 제주도에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은 책이었다. 서울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제주에 살고 있는 작가가 본인과 유사하게 제주에서의 삶을 살고 있는 분들을 인터뷰한 책이었다. 일주일 새에 서울에서의 바쁜 삶을 포기하고 제주도에서 여유로움을 택하여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을 두권이나 읽은 것이다.
사실 내가 강릉에 간 가장 큰 이유가 건물이 빽빽하고 사람이 너무 많은 서울이 숨막히는 기분이 들어 한적하게 쉬고 싶어서였기 때문에 나는 내가 선택한 책이 나의 기분을 가장 잘 설명해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을 때도, 지금 읽고 있는 작가의 퇴사 후 일상을 다룬 부분을 읽을 때도, 나는 내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그들의 삶이 부럽지 않았다. 그들의 삶을 폄하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라 나는 서울의 빡빡한 삶에 지쳐 자연과 여유로움을 찾아 떠나오지 않았나? 그랬으니 응당 그들이 선택한 방식의 삶을 부러워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정말 좋은 삶의 태도고, 그들이 행복해서 기쁘지만, 내가 언젠가라도 저렇게 살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게 이상했다. 그 당황스러움 끝에 이런 깨달음이 있었다. 나는 조금 지쳤을 뿐, 내게 가장 큰 행복을 선사하는 것은 자연이나 여유로움이 아니라 일이라고. 나는 일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월급쟁이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 어쩌면 내게 가장 큰 행복을 선사하는 건 내가 월급쟁이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친구나 동료들이 월급쟁이 못 해먹겠다며 사업이나 해야겠다고 할 때마다 한가지 의문이 들었다. 사장의 삶은 월급쟁이보다 정말로 편안한가? 내가 볼 때 사장은 직원보다 더 많은 불안감과 책임감을 견뎌야 하는 자리였는데 말이다. 물론 세상엔 그 불안을 동반하여 위험을 감수한만큼 더 큰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 정말 많고, 나 또한 그들이 대단하다는 걸 인정하지만 그게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나는 원래도 기질 자체가 불안이 높은 사람이기에, 앞이 보이지 않는 걸 못 견디게 괴로워한다. 어느 정도냐면 내 인생 첫 퇴사의 이유가 '내가 오늘 출근하면서 몇 시에 퇴근할 수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였을 정도로. 나는 일이 '많은' 것보다 일이 많을지도 '모르는' 상태를 더 괴로워했다. 일이 많으면 오늘 저녁에 운동을 못 갈테니 다른 날로 미뤄야 하는데, 일이 많을지 모르면 내가 오늘 운동을 갈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고, 그 계획을 언제로 옮겨야 할지도 모르지 않는가. 나는 무언가를 '모르는' 상태가 너무 무섭고 힘들다. 그런 내게 내가 언제 잭팟이 터질지도 모르고, 사업을 어떻게 굴려야 하는지 물어볼 사람도 없는 사장이라는 역할을 감내하는 건 거의 고문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현대사회에서 여유로움이란 불안함을 동반한다. 프리랜서나 사장, 하물며 건물주도 그 건물이 공실로 비어있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고려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백수가 체질이 아니다. 백수야 말로 한 치 앞을 모르는 존재의 끝판왕이므로.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들을 되돌아보면 언제나 내가 백수였던 시절이다. 그래서 나는 여유로움을 얻기 위해 월급쟁이의 삶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비록 주 5일을 회사에 저당잡혀 살아야 하지만, 내게 주어진 일만 끝내면 그 외 시간에는 업무와 분리될 수 있고(아마 사장은 그렇게 못할걸...), 그 대가로 적어도 큰 문제가 없는 한 내가 그만둘 때까지 꼬박꼬박 내 통장에 돈이 찍힐 이 일이 내게 주는 안정감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뭐, 누군가는 그렇게 안주하면 안된다고 할지는 몰라도 글쎄, 나는 잭팟의 기쁨보다는 안정감의 기쁨이 더 큰 사람인지라 내가 추구하는 행복을 갖고싶다.
나는 이제 안다, 내가 여유롭게 살다가 강릉 여행을 갔다면 난 이처럼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강릉 여행에 가서 아무 생각 없이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월요일은 돌아올 것이며, 그 월요일에 난 출근할 곳이 있으며, 월요일에 내가 출근을 하면 난 이번달에도 월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