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드라마 '반짝이는 워터멜론'을 보고
* 주의 : 드라마 '반짝이는 워터멜론'의 스토리와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드라마 '반짝이는 워터멜론'이 종영했다. 나는 가을 내내 사실 열고보면 참 특별할 것 없는 그 드라마에 푹 빠져 한 회차를 보고나면 일주일 내내 그 회차를 돌려보는 것도 모자라 비하인드 영상까지 찾아볼 정도였다. (새삼스러운 모습은 아니다. 10대 때부터 으레 인생 드라마 축에 속하는 드라마는 이런 식으로 애정하곤 했다.) 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가장 큰 관심사는 '과거로 타입슬립한 이찬의 아들인 은결이 후천적 농인인 아버지가 농인이 될 사고를 막는 것에 성공하는가?'였다. 주인공인 은결이 믿어의심치 않았던 자신이 과거로 타입슬립한 이유이자, 이 드라마의 처음과 끝을 매듭지은 이야기였다. 자신의 아버지가 후천적 농인인지도 몰랐던 은결은 드라마 초반부터 끊임없이 이찬에게 위험한 순간들을 피하게 한다. 이찬은 이유도 모르고 왜 자꾸 자신의 일을 막냐며 화를 내기도 하지만, 은결은 너무도 간절하게 자신의 아버지에게 소리를 앗아갈 사고를 방지하고자 한다. 그가 이찬에게 닥쳐올 사고를 피할 수 있도록 외딴 섬으로 불러내어 그를 설득하다가 그 마저도 소용이 없자 대뜸 바다 속으로 죽으러 달려들기도 할 정도로 간절하게.
나 또한 이찬이 그 사고를 피하고 소리를 잃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기대하고 보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참으로 웃기게도, 그런 생각을 하면 동시에 정말 그것이 맞는가? 옳은가? 하는 의문이 함께 떠올랐다. 만약 내가 후천적 농인 부모 아래에서 자라다가 우연히 과거로 돌아가 그들이 농인이 되지 않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나도 바다고 산이고 뛰어들어 무조건 그 기회를 잡고 싶었다. 그러나 드라마가, 내가 영상으로 보여주는 장편 소설이라 생각하는 드라마가, 우리의 희노애락을 모두 품으며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드라마가 그런 식의 전개를 펼치는 것이 정말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쩌면 정말 이찬의 사고를 은결이 막고 이찬은 소리를 잃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은결이 이찬에게 자신이 미래에서 온 이찬의 아들이라 밝히며 "나는 외로웠어. 가족들 모두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데, 나 혼자만 늘 다른 세상에 사는 것처럼 늘 외로웠다고. 그런데 너랑 같은 세상에 살 기회가 생겼어. 잡고싶어." 라고 말하던 순간에 선천적 농인인 어머니와 형, 후천적 농인인 아버지와 청인인 은결의 가족 안에서 그가 얼마나 외로웠을지가 너무 눈에 훤히 보여서. 그에게 그런 가족을 주는 것이 이 드라마가 가진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아주 잠깐.
그러나 결국 사고는 일어나고, 이찬은 농인이 된다. 이찬을 불행에서 피하게 하려고 그를 외딴 섬으로 불러내고, 설득이 되지 않자 바다에 뛰어들고, 그럼에도 닥친 불행을 막기 위해 그를 구하러 가다 교통사고를 당해도 벌떡 일어나 그를 구하고, 사고가 예정된 날 이찬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하며, 원래 사고가 일어났어야 하는 시간을 무사히 넘겨내면서 은결이 느꼈던 안도감이 무색하게도 교통사고를 당할 뻔한 은결을 이찬이 구하고 대신 사고를 당하며 결국 이찬은 소리를 잃게 된다. 아버지의 불행을 막았다는 안도감과 아버지와 음악을 나누며 지내게 될 수 있는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모두 부서지는 그 순간에 사고가 난 이찬을 끌어안으며 통곡하는 은결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과 동시에 그래도 내가 그다지 크게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결국 나는 알았던 것이다. 은결이 1995년으로 돌아가기 전에 보여주었던 어른 이찬의 단단한 모습을 보았기에 결국 이찬은 저 불행을 피하지 못했음에도 그 불행을 딛고 일어나 '아내에게 사랑받고, 자식들에게 존경받는 훌륭한 아버지가, 약점도 개성으로 만들어내고 어떤 시련도 영웅서사로 만들어내는 은결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리고 결국 이 드라마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불행을 모두 다 피하고 완전무결한 인생을 살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결국 닥칠 불행이라도 딛고 일어나자'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이 드라마가 나의 인생 드라마가 되기에 충분한 마지막 방점을 찍어주었다.
요즘 들어 부쩍 '행복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편안한 나의 집에 있을 때, 갖고 싶은 것을 부담 없이 갖게 될 때, 별 걱정 없이 출퇴근하는 일상을 보내는 순간순간, 내게도 있었던 힘든 시련들을 지나 가장 빛나고 행복한 순간에 도달했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 그 순간들마다 마냥 행복해하기만 하면 좋겠는데, 나의 불안세포는 '지금 참 행복하다'는 말 바로 뒤에 자꾸 말을 덧붙인다. '이 행복이 과연 언제 끝나게 될까', '이 행복이 끝나버리면 어떡하지' 같은 말들을.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 현재의 행복을 망치면 안된다는 교과서 같은 말을 몰라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도 이런 내가 싫어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도 해보았지만, 이건 머릿속에서 이미 자동화되어 있는 알고리즘 같은 생각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할수록 더더욱 선명해지기만 할 뿐이다. 그런 내게 저 드라마가 던진 메시지가 바로 이찬의 사고였다. 언젠가 그 행복이 끝날 수 있지만, 피하려해도 닥칠 불행은 결국 닥치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딛고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사실 은결이 타입슬립을 한 목적은 이찬의 사고를 막는 것이 아니라, 청인이었던 아빠와의 행복한 추억을 안고서, 농인이 된 삶을 딛고 일어선 아빠의 단단함과 행복을 목격하는 것이었을 거라고.
드라마가 메시지를 던질 수 있는 전개를 해야한다는 것과 더불어 이찬에게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전개에 의구심을 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이찬이 청인으로 살아가게 되었다면 그 인생이 정말로 더 나은 것인가? 하는 것도 있었다. 현실적이고 절대적인 기준으로 청인의 삶보다 농인으로 견뎌내야 하는 삶의 무게가 더 크겠지만, 사실 그 무게를 더 무겁게 만드는 것은 청인 혹은 농인이라는 사실보다 청인인 우리의 편견과 무지이지 않은가. 후천적 농인이었던 이찬과 달리 은결의 엄마이자 선천적 농인이었던 청아의 삶만 봐도, 모든 청인이 청인의 언어를 사용하니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그 말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였다. 그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었던 것이 청아에게 수화를 알려준 은결이었고, 청아와 대화하고 싶어 수화를 독학한 이찬이었고, 일시적으로 소리를 잃어본 적이 있었기에 수화를 알고 있었던 은유였다. 그 다리를 건넌 청아는 가족과 친구들의 삶에 들어올 수 있었고, 더불어 이찬의 친구들과 청아의 아버지까지 모두 그녀의 언어를 배우고 익혀 그녀의 세계로 건너감으로서 그녀의 삶은 덜 불행해졌다. 그리고 미래의 청아는 그 다리를 기반으로 더 많은 농인들에게 계속해서 다리를 놓아주는 일을 할 수 있었다.
애초에 청인과 농인 모두 차별없이 동등하게 대화하고 의견을 표할 수 있는 세상이었다면 은결은 이찬에게 닥친 사고에 그렇게까지 절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떤 불행은 우리가 만들고 있는 것일수도 있음을, 그러니 우리 모두 우리가 보지 못하는 세계를 계속해서 넓혀나가야 할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행이 닥쳤다면 우리에게 그것을 딛고 일어날 용기와 힘이 있다는 것을 믿자는, 그런 드라마였기에 나는 이 드라마를 보는 내내 너무나도 행복했고 감사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내가 이 행복이 언제 끝날지 불안해하는 순간마다 나는 이제 그 생각을 안 하기보다 오히려 이 말을 되뇌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통 앞에 아름답고, 끝까지 강인하게 어떻게든 이겨낼 것이다."라고. Viva La Vida. 인생이여,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