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iley Jan 09. 2024

매일 100점짜리로 살기

오늘 하루도 사랑받을만 했나요?

나는 번아웃이라는 단어를 모르던 어린 시절부터 번아웃을 알았다. 그 때는 그게 사회현상이라는 것도, 다른 이들도 겪는다는 것조차 모르고, 그냥 미친듯이 달리다가 어느순간 잠깐 주저 눕는(?) 기간을 꼭 거친다고 생각했었다. 보통 그런 기간은 시험이 끝나고 하루 이틀이거나 대학생이 되고부터는 주말이곤 했다. 내게 주어진 것이 하나도 없어지는 순간 방문을 걸어잠그고 하루나 이틀 정도 아무것도 못하고 각종 비생산을 생산해내는(?) 시기. 그런 시기가 충전이라면 충전일 수 있겠지만, 그 시기의 나는 충전이라기보다는 그냥 무기력증에 가까웠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저 번아웃 그 자체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일을 몇 십년 동안 반복하다보니, 이제는 내가 번아웃이 오기 직전에 어떤 상태를 겪는지조차 단계적으로 알게 되었다. 보통 그 직전엔 이런 생각을 한다. '나로 살기 빡세다... 뭐 이렇게 지켜야 할 것도, 해내야 할 것도 많은건지...' 이렇게 사는 방식이 당연한지 알았던 시절, 다른 형태의 삶은 감히 상상도 못하던 시절, 친구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진짜 신기한데... 이 얘기 해준 친구는 다른 글에서도 자주 나오는 친구다... 도대체 얘는 어떻게 맨날 내게 감명을 주지...? 내 뮤즈인가..?) "얘는 다른 사람들이랑 자기랑 비교할 필요가 없어. 자기 자신만의 기준과 목표가 이미 저 하늘 끝에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랑 비교를 해서 뭐해!" 그 때 알았던 것 같다. 내가 만들어 낸 각종 지켜야 할 일들과 해내야 할 목표를 적은 사람이 누군지. 도대체 누가 나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지.


내가 꽤 오랫동안 취미 발레라는 운동을 하고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내게 취미발레의 장점을 물어보는데... 그 질문을 듣고 여러가지 이유가 떠올랐지만 항상 꺼내놓게 되는 결론은 하나인 것 같다. "제가 했던 운동 중에 가장 강도가 높아서요. 한시간 내내 몸이 탈탈 털리는 게 좋아요." 발레가 좋은 이유에 자세 교정이나 체력 증진, 스트레스 해소 등 여러가지 부수적인 것들이 포함되지만 내가 몇 년동안 취미발레를 꾸준히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다. 내 정신과 몸을 사정없이 탈탈 털어준다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나쁜 습관 중에 가장 버리고 싶은 것이 집 구석에 가만히 앉아 내가 오늘 했던 말들과 내가 했던 행동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면서 조금이라도 이상해보였거나 잘못한 것에 대해 물고 늘어지는 것인데, 그렇게 한동안 땅굴을 파다가 불안이 최고조가 되고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면 보통 엄마부터 친한 친구들에 전화를 싹 돌리게 된다. 그러나 그 시간에 발레 수업을 가서 탈탈 털리고 있으면, 그리고 그렇게 가뿐한 몸과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내가 오늘 무슨 말을 했고, 무슨 행동을 했는지 싹 잊어버리는 것이다.


여느 날처럼 퇴근길에 습관처럼 내가 오늘 했던 행동과 그 행동을 했을 때 같이 있던 상대방의 반응을 지레짐작하며 내 정신력을 또 쓸모 없는 방향으로 쓰고 있다가 문득 '그래서 나 오늘은 사랑받을만 했나?'하는 말이 떠올랐다. 결국 내가 내 하루를 이런 식으로 반추하는 이유는 내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오늘도 여전히 좋은 사람으로, 다음에도 또 만나고 싶은 100점짜리 인간이었는지를 걱정하고 고민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평가 지표로 나는 내가 하는 말 한 단어, 한 단어가 상대방의 표정 하나하나가 모두 완벽해야 그 날을 성공적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그런 내게 많은 사람들이 어떤 관계는 꼭 완벽하게 잘맞다고 유지되는 것은 아니라고, 나에 대한 신뢰와 애정은 고작 행동 하나, 말 하나에 부침개 뒤집듯이 뒤집어지는 게 아니라고 조언을 남겼으나 나는 이를 머리로는 이해해도 여전히 내 말 하나, 행동 하나에 계속해서 점수를 매기는 습관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런 내가 아무도 만나지 않고 집에 혼자 있는 날에는 괜찮으냐고? 웬걸, 그 때도 나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사랑받을만한 하루를 보냈는지 평가한다. 사랑받을 만하기 위해서는 집에 혼자 있을 때도 집 청소를 게을리해선 안되며, 생산성도 없는 OTT 영상을 하루종일 보고 있어서는 안된다. 적정량의 책을 읽어야 하고, 영어 공부도 쉬어서는 안된다. 또 그렇다고 너무 생산성만 챙겨서는 안되니 적당한 시간의 TV 시청을 곁들여야하고, 자기 전에는 스트레칭을 해야한다. 혹여 아침에 늦잠을 자거나 씻지 않으면 이런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무력하게 보내게 되므로 주말임에도 알람을 맞추고 꼭 씻어야 한다. 거짓말이냐고? 컨셉이냐고? 30년 인생동안 번아웃이 나를 가격한 주말 외에는 거의 모든 주말에 이런 생각으로 살고 있으니... 제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런 마음으로 산다는 말을 들어야 위로가 될 지경이다.


나는... 도대체 누구에게 그렇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걸까? 왜 이렇게 매일 내 하루에 점수를 매겨가며 100점짜리 인생을 살고 싶어하는 걸까. 어렸을 때 내가 이런 고민을 하면 보통 나이가 들면 조금씩 나아진다고 하여 그 말만 믿고 버텼는데, 확실히 나이가 들며 나도 나 자신에게 조금씩 자신감이 붙기도 하고 원래 인간관계라는 게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고 청정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많이 나아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나는 이 강박을 쉽게 벗어나기가 힘들다. 작은 소원이 있다면, 제발 단 하루만이라도 '내가 오늘 무슨 말과 행동을 했지? 그게 적절했나?'하는 반추없이 지나가는 날이 있었으면, 단 한번만이라도 '내게 주어진 휴일을 충분히 생산적으로 보냈는가?'라는 생각없이 보내는 주말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본다.... 가능할까?

작가의 이전글 고작 치킨 한번 참아야하는 실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