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안의 ‘수치’와 얽힌 묘한 가풍

by 해일리


수치심 지옥



대학 시절, 언니가 처음 보는 내 남자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다.


“그런데 얘 좀 부끄럽지 않아요?”
남자친구가 당황해서 “네?” 하고 땀을 뻘뻘 흘리자, 언니는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아, 얘 편지도 써줄 텐데 맞춤법 막 틀리고 그러잖아요. 그런 거 안 부끄러워요?”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글을 쓰다 보니 이 흑역사가 떠올랐다. 당시 남자친구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고, 나는 남자친구 앞에서도 내 ‘모자란 지력’을 수치스러워해야 하는 사람으로 서 있었다. 여자친구를 욕보이는 사람이 하필 여자친구의 가족이니, 그 모욕마저도 친절하게 받아내야 했던 그는 “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하고 웃으며, 안쓰럽게도 스스로를 나와 같은 맞춤법 바보의 위치에 놓아주었다.


지금도 타이핑을 치다가 화면에 빨간 줄이 그어질 때마다 나는 괜히 바싹 긴장한다. 불현듯 떠오르는 그때의 흑역사와,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맞춤법이 여전히 미진한 나 자신에 대한 수치심, 그리고 왜 좋은 기억도 많은데 하필 그런 장면만 떠올리는지에 대한 자기혐오까지 겹쳐서 말 그대로 ‘수치심의 지옥’에 빠진다.


어쩌면 이건 우리 가족의 가풍인지도 모르겠다. 상대에게 ‘수치’를 주고, 또 그 수치를 받을까 봐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 부끄러울지 모르는 모든 것들을 어떻게든 애써 감추는 엄마, 나를 의도적으로 욕되게 하려는 건 아니지만 너무 무관심해서 아무렇지 않게 모욕하는 언니 사이에서 나는 ‘수치’를 두려워하며 자랐다. 나의 '대문자 I' 극내성적인 성향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편부모 가정에 대한 수치심, 주위 시선에 대한 두려움, 항상 뛰어난 언니보다 부족한 나 자신에 대한 수치심, 낮은 지력에 공부도 싫어하는 기질에 대한 수치심까지. 열거하면 끝이 없다. 그런데 수필이나 소설 속 가난했던 시절을 다룬 이야기들을 보면, 가난으로 인한 수치심은 빠지지 않는 단골 소재다. 돈이 있어야 의식주를 해결하고, 인간관계를 원활히 유지할 수 있는 사회에서, 돈은 가장 빠르게 인간의 근원적인 수치심과 연결되는 매개체인 것 같다.






나는 있는 그대로 괜찮은 사람



지금 돌아보면, 내가 인격을 형성하던 10대 시절에 “지금의 너로도 괜찮아”라는 말을 해준 가족이나 친지는 아무도 없었다. “엄마가 고생하니까 네가 더 잘해야 해”, “다른 형제들이 속 썩이니까 너는 더 좋은 딸이어야 해”, “공부 열심히 해라” 같은 말은 수도 없이 들었지만, 그냥 ‘너는 너라서 괜찮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스스로에게 그런 말을 해 줄 수 있을 만큼 성숙하거나 자존감이 높지 못했다.


그나마 천만다행으로, 사람이 참 좋으셨던 영어 선생님이 “네 언니가 얼마나 뛰어난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너로서 정말 똑똑해. 진심이야”라고 말해주셨다. 그때는 왜 그렇게까지 감동이었는지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내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받은 게 그때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잘했으니 보상받은 것도 아닌, 지금의 나도 충분하다는 말을 들은 게 그렇게 좋았던 거다.


사람은 누구나 있는 그대로 충분히 훌륭한 존재인데, 인생은 원래 상대평가가 아닌데... 우리는 유독 자존감이 형성되어야 할 10대에 끝없이 비교당하고 “더 잘해라”라는 압박 속에서 자라난다. 그리고 2030이 되어 사회의 쓴맛을 제대로 맛보면서 또다시 비교와 성과 압박, 사회생활 스트레스의 진면목을 맞닥뜨린다. “나는 왜 이렇게 힘들까?”, "남들만큼 돈이 없을까?" 어떤 사람은 그대로 무너지고, 어떤 사람은 그제야 자존감이라는 게 필요하다는 걸 깨닫고 꾸역꾸역 채워 넣으며 살아간다. 나 또한 지금도 그렇게 늘 스스로에게 쭉쭉 자존감을 주입해주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때 언니에게 못 했던 말을 이제야 속으로 해본다.
맞춤법 좀 틀리면 어때? 나는 지금의 나로도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야. 그러니까 내 남자친구 앞에서 자기 가족을 깎아내리는 건 제발 그만해 줘.”


언니에게 말할 수 없더라도 지금, 나에게 말해주어야겠다. 나는 지금도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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