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도전, 성공 뒤에 찾아온 균열
내가 어릴적 우리 엄마는 사업을 하는 멋진 여자였다. 일곱 살 때 아빠가 일찍 돌아가시고, 전업주부였던 엄마는 미술 과외를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중학교에 갈 즈음에는 “이 정도 돈으로는 아이 셋을 먹여 살릴 수 없다”며 인테리어 사업을 시작했다.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결국 ‘건축’에도 뛰어들었다.
간이 콩알만 한 나는 엄마의 새로운 도전 앞에서 매번 “엄마, 그냥 지금처럼 살면 안 돼요?”라고 말하곤 했다. 속마음은 늘 같았다. 나는 엄마가, 우리 가족이, 망할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엄마는 언제나 이렇게 말했다.
“너희를 잘 키우려면 돈이 더 필요하고, 사업을 키워야 해.” 그렇게 엄마는 한 단계, 또 한 단계씩 집을 떠나 사회로 나아갔다. 우리가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아빠 없다고 기죽지 말라고 백화점 옷만 사 입혔고, 필요한 사교육은 모두 받을 수 있었다.
문제는 엄마가 라이선스 없이 동업이 필수인 건축에 뛰어들면서부터였다. 엄마는 주로 5층 정도 건물을 짓는 공사를 많이 했는데, 태어나 처음으로 십억, 이십억 단위의 공사를 수주하고 인부들을 부리게 되자 무척 뿌듯해했던 것 같다. 엄마는 스스로 “건축 건만 있으면 미친년처럼 달려들었다”고 말하곤 했다. 돌이켜보면, 그 업계에서 새로 시작한 듣보잡이었던 엄마가 젠틀하고 평판 좋으며 돈도 제때 주는 좋은 건축주를 만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건축이 시작되면 처음은 늘 좋았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쎄한 일들이 많아졌고, 급기야 몇 번은 의뢰인이 공사대금의 2~30%에 해당하는 잔금을 주지 않고 잠수를 타거나, 오히려 “줄 건 다 줬다”며 호통을 치고 엄마를 쫓아내는 일도 생겼다. 내가 “이건 말도 안 된다, 소송하자!”라고 하면 엄마는 늘 이렇게 말했다. “주변 보면 소송해 봐야 변호사만 좋은 일 시켜주는 거야. 그냥 털고 일어나야지.” 그때까지만 해도 공사가 계속 들어왔기 때문에, 여기서 본 손실을 다른 데서 번 돈으로 메울 수 있었다. 문제는 엄마에게 들어오는 일들이 점점 뜸해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엄마의 돌파구는 나의 통장이였다
돌아보면 과연 그 의뢰인들만 문제였을까 싶다. 엄마의 사업 수완에도 분명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그때도 늘 새로운 듯 익숙한 방식으로 돌파구를 찾았다. 바로 장성한 자녀들의 통장과 대출이었다.
첫 타자는 나였다. 나는 스물다섯 살에 졸업하자마자 취직을 했다. 취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돈을 잘 모아야 한다”며 적금을 들라고 했다. 적금을 들고, 해약할 때쯤에는 예금으로 묶으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 뒤, 그 예금 2천만 원을 담보로 대출을 받게 했다. 곧 갚겠다고 했지만, 그 말은 늘 유구무언으로 끝났다. 결국 예금을 해지해 대출을 갚았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3천만 원 신용대출, 또 추가 신용대출, 얼마 뒤에는 보험 담보대출, 그 다음에는 카드론까지 이어졌다. 엄마는 늘 “다른 사람에게 사정하는 것보다 너에게 부탁하는 게 낫지 않니”라고 말했다. 수년간 엄마가 사업대금이 부족하다며 전화를 돌리는 모습을 지켜본 나로서는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이었다. ‘키워준 은혜’라는 열쇠는 내 대출 계좌를 여는 마법의 열쇠였다. 그 사이 내 월급과 인센티브가 들어오는 통장도 이미 엄마 손에 넘어가 있었다.
그렇게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회사로는 이자를 납부하지 못했다는 독촉 전화가 매일같이 걸려오고, 카드론 연체 문자까지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온갖 종류의 독촉 한가운데 서 있었다. 내가 뭘 잘못해서 이런 상황에 놓였을까. 답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좌절할 때마다 엄마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네 빚이 아니라 나의 빚이야. 내가 다 갚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OO카드 카드론 한 번만 더 받아줘.”
엄마를 사랑해서였을까, 키워준 은혜에 보답하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이건 네 빚이 아니야”라는 말이 너무 달콤해서 믿고 싶었던 걸까. 그 모든 감정이 뒤섞인 채로, 나는 이자율 20%에 육박하는 악질 빚을 떠안은 빚쟁이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