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골에 빠지지 않기

<에고라는 적> <배움의 발견>

by 이유진

에고라는 것은 현명한 판단에 있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그것은 '자아'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일을 그르치게 하는 것일까. 얼마나 이성적이 되면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일까.


부부가 어찌 안 싸울 수 있냐고 하지만 나는 싸우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싸운다는 것은 서로 불편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고 그 불편한 감정은 때론 날카롭게 표현되어 상대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아이들에게까지 전이되므로 가능하면 싸우지 않는 것이 맞다. 게다가 나의 경우, 상한 감정이 상대방의 어떤 행위나 말로써 해소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마음이 힘들어진다.


하지만 관계와 감정을 이야기하는 많은 책들에서는 결국 내가 원하는 그런 상황(상대방이 내 마음을 알아주고 내 감정을 해소해 주기를 바라는)은 내 욕심일 뿐이라 말한다. 처음에 읽을 때에는 화가 났고, 시간이 흐르면서는 어느 정도 납득이 되었고, 현재는 '그래 맞는 말이야'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 경지이지만 다시 실전에 돌입하는 순간을 맞이하면 내가 고개를 끄덕이던 그 주옥같은 문장들은 크게 효과가 없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폭풍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에는 이기적인 생각들 밖에 들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예전에 비해서 나의 에고를 누르기 위해. 즉, 스스로가 만든 감정의 골에 빠지지 않기 위해 다른 방법을 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중의 하나는 내가 바라는 모습을 가진 지인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다. '언니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이렇게 한 번 떠올려 보면 조금 그 기분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스무 살 때부터 알고 지내게 된 그 언니는 전형적인 이과 타입의 이성적인 사람으로 그때까지만 해도 내 주변에서 만날 수 없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만약 언니와 내가 동갑인 상태로 만났더라면 아마 우리는 서로 친구가 될 수 없었을 것을 확신한다.) 늘 감정에 휘둘리던 나와 달리, 언니는 객관적인 눈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내 기준에서는 엄청 심각한 일들이 언니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되었고 그것은 나에게 새로운 충격이었다.


보통 친구들에게 하소연하면 그들은 내 감정에 동조해 주었고, 내가 잘못하지 않았다고 말해주었으며 결국 나를 지지해주는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언니는 그러지 않았다. 누군가의 자잘못을 따진다던가, 나를 응원해준다던가의 그런 판단없이 그저 별 일 아니라고, 우울해 할 필요 없다고, 그저 앞으로는 이렇게 하면 좋을 것 같다는 간단한 충고와 함께 유쾌한 웃음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러면 정말 언니 말처럼 아무일도 아닌 것이 돼버렸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 한 번도 언니의 위로에 섭섭하다고 느낀 적은 없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내가 우울하거나 기분이 다운될 때,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하며 웃는 그녀의 웃음소리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화가 조금 누그러드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나는 남편과 싸웠을 때, 더 이상 내 감정에 맞장구쳐 줄 친구들에게는 연락하지 않는다. 물론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내 얼굴에 침뱉기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내가 만드는 아집이라는 동굴을 더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지지자를 얻으면 내가 잘하고 있다는 생각을 더 크게 만들 뿐이고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크기는 점점 더 작아진다.)


물론 감정의 해소를 위해 공감을 얻는 것도 중요하다. '나도 그랬어', '우리도 맨날 싸워'라고 말해주는 친구들의 말에 나는 위로를 받을 수도 있고, 누군가의 불행(이라고 말하는 것이 적합한지 모르겠지만)에 내 처지를 비교하며 '그래 사는 게 다 똑같지 뭐'라며 지금의 상황을 가벼이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처방전은 진통제에 그친다고나 할까. 근본 해결책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그리고 다음 방편으로는 어찌 보면 가장 토로하고 싶은 사람일지도 모를 상대방(남편)에게 나의 불편한 감정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예전에는 입을 다무는 것으로 일관했다면 이제는 일단 말을 하고 본다. 하지만 직접적인 말보다는 문자를 이용하게 된다. 왜냐하면 서로 기분이 나쁜 상태에서 이야기해봤자 듣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도 좋은 의도로 주고받기가 어렵다는 것을 몇 번의 싸움으로 배웠기에, 일단 감정에 휘둘리고 있는 상황에서는 적어도 직접 말하는 것을 피하게 됐다. (문자는 아무래도 감정이 한 번 걸러지게 되는 필터링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나는 주로 위의 두 가지 방법을 통해 억울하고 기분상한 감정의 50퍼센트 정도를 날려버린다. 때로는 달리기를 하러 나가기도 하고 그럴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글을 쓰기도 하는데, 확실히 효과가 있다. 글을 쓰면서 내 감정을 토로하다보면 아무래도 날것 그대로 내뱉을 수는 없지만 (누가 볼 수 도 있으므로) 쓰다 보면 무엇인가가 해소되는 것은 있다. 오늘 이렇게 글을 쓰면서 느끼는 것은 글쓰기를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는 자기반성뿐이지만 말이다.


안타깝게도 책 읽기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미 머리가 복잡하기 때문에 무엇인가 토로해야지 해소가 되는 것인데, 책 읽기는 무엇인가를 주입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읽고 있는 <배움의 발견>과 같은 책은 조금 효과가 있었다. 남의 불행을 위로로 삼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고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이게 소설인지 실화인지 구분을 할 수 없을 만큼의 끔찍한 상황들에 그만 내가 느끼는 부당함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솔직한 심경이다. 물론 그녀의 현재는 (겉으로 보이는 이력들만으로 볼 때) 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함에 놓여있지만 책 속에서 묘사되는 그녀의 과거는 정말이지 '끔찍' 혹은 '비참'하다고 밖에 여겨지지 않을 처참한 순간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다양한 삶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실로 이런 것을 목도하니 참으로 세상은 넓고 다양한 사람들은 많다는 것을 실감한다. 나 역시 그런 다양한 사람들 중의 한 명이겠지만 그녀가 겪은 일들에 비하면 내 인생은 참으로 보잘것없는 소소한 에피소드처럼 여겨진다. 읽으면서 안타깝기도 하고 반성도 하고, 대단하다 싶기도 하고, 사람의 맹목적인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도 새삼 알게 됐고, 내가 그런 맹목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아닌지 한 번 돌아보게 되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 가운데 나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뿐이라고 말하던 그녀의 메시지가 새삼 나의 상황과 맞아떨어져서 조금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 그렇다. 감정의 골에 빠지기를 원치 않는다면 스스로가 벗어나기 위해 방법을 찾아야 하고 그것은 누가 해주기를 바라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는 또 배웠다. 내가 벗어나기 위해 마음먹는 일이 더욱 중요했다.



여러분이 앞으로 할 일들 중 의미를 지닐 일들은 하나같이 이 인스타그램에 담을 수 없는 여러분의 자아입니다.... 초라한 첫 직장에서 일하면서 사랑에 빠지는 그 사람은 결혼사진에 나오는 완벽하게 포토샵 된 멋진 사람과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것도 온라인상에서 보는 모습과 전혀 다르겠지요. 무엇보다도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것보다 현실에서는 훨씬 많은 똥을 치워야 할 것이고요, 잠도 부족하고, 애들과 사소하고 치사한 일로 대치하고, 자신에 대한 의혹에 휩싸이는 순간들도 수도 없이 많을 것입니다...


노스이스턴 대학교 졸업 축사 中, 타라 웨스트 오버, 2019.5.3 (김희정 옮김)



인스타그램에 올릴 없는 나의 자아에 대해서 생각하라는 그녀의 말이 마음속 깊이 와 닿았다. 우리는 모두 다르다. 인스타에 올려져 있는 사진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우리는 그 사진 속의 누군가를 동경하고, 사진 속에 보이는 것을 전부라 착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진실은 너머에 있다. 예쁜 사진을 찍기 위해 그곳까지 찾아가는 수고, 늘씬한 몸매 뒤에 감추어진 피나는 절제와 고통의 순간들, 어느 인생이든 존재하는 고통과 들키고 싶지 않은 치부와 같은 모습이 결국 우리 삶의 80프로 혹은 90프로 이상일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감정의 골에 빠지지 않기 위한 나의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진 것 같긴 하지만 나는 오늘 다시 한번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에고라는 적>에서 말했듯 나라는 인간은 내가 생각하고 내가 만들어 낸 모습이 아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만이 나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발견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에고는 결코 나의 자아가 아님을 그것이 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님을, 내가 느끼는 화남과 분노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 나는 '내 생각이 옳다'라고 말하는 에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감정의 골에 빠지지 않기 위해 벗어나려는 노력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일순간의 자존심에 지금 직면하고 있는 상황을 악화시킬 수밖에 없는 감정의 골에 들어가 버린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지만 경험하기를 원치 않는 유쾌하지만은 않을 과정을 겪어야 할 것이고 최악에는 내가 원하지 않는 결과를 일으키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나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 누가 꺼내 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지금 당장 벗어나기 위해 어떤 다른 방법을 찾을 것인가.


미래는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로 짐작할 수밖에 없다. 나는 억울한 마음으로 오늘 밤을 눈물로 지새우고 싶지 않기 때문에 감정의 골에서 벗어나기로 마음먹었고,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해 거기에서 빠져나왔다. 물론 그것만으로 상황이 다 해결된 것도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어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더 이상 울면서 억울해하는 나는 없다. 지금으로선 그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한다. 자존감이 이런 것이구나를... 나는 아주 조금은 알게 되었다.






* 표지 사진 : Photo by Yuris Alhumaydy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