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은 원래 말을 안 듣는다.

어른이 되는 과정

by 이유진

“애들은 원래 말을 안 들어”


남편이 한 번씩 아이들이 자기의 말을 안 듣는다고 불평할 때면 내가 하는 이야기다. 아이들이 자기를 무시하는 것 같은 기분에 괜히 열을 내는 것 같은데, 그 모습을 보면 초년생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나 역시 그랬다. 아이들이 말을 안 들으면 ‘얘네가 지금 나를 무시하나?’ 싶은 생각을 하곤 했으니까. 그런데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딱히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은 원래 어른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특히 우리 아이들을 볼 때 혹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볼 때면, 그들은 어릴수록 대부분이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캐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생님들끼리 모이면 농담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건 똑같은 말을 백 번 한다는 말이다.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지만 실제로 저학년을 담당할 때면 거짓이 아님을 실감한다. 그들은 내가 말을 끝내자마자 똑같은 질문을 다시 한다. 가령 ‘교과서 10쪽을 펴세요’라고 하면 말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선생님 몇 쪽이요?”라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10쪽이라고 10번 정도 대답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거짓말 같지만 사실이다. (게중에는 내가 직접 그 옆으로 다가설 때까지 그저 자기가 하던 일에 집중하고 있는 아이들도 있다.)


아이들은 자기의 필요에 의해서 선택적으로 귀를 열고 닫는다. 이것은 아마 본능이 아닌가 싶다. 신생아 때의 아기가 아무 말도 못 해 그저 우는 것만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다가 말을 배우고 자기가 원하는 말을 하게 될 때까지 그들은 오로지 자기가 원하는 바에 집중한다. 아마 멀티태스킹이 될 정도로 뇌가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그런 이유로 한 번에 한 가지만에만 집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가 가장 좋은 것에만 관심을 쏟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집에서도 내가 아무리 양치하러 오라고 해도 오지 않고 밥 먹으라고 식탁에 앉으라 해도 자기가 만지던 장난감에만 집중하던 아이들은 ‘사탕’이나 ‘티비’ 라는 말이 들리면 하던 일을 멈추고 쏜살같이 달려온다. 그건 아마도 그들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함일 것이다. 지금 본인이 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자기에게 일어나야지만 움직이게 되는 것. 아마 인간의 이기적인 본능인 것 같다.


그런 아이들을 볼 때면 참 사악하다 싶다. 혹은 어쩌면 저렇게 자기 하고 싶은 대로만 하려고 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들의 이기심에 한 번씩 서운할 때도 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첫째 아이가 어떤 유혹 없이도 자리에 앉아서 밥을 먹고, 동생에게 자기의 장난감을 양보하는 모습 등을 보게 될 때면 대견스러우면서도 뭔가 짠한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해 맑은 웃음으로 몇 쪽이냐고 물어대던 저학년들이 몰라도 눈치껏 짝꿍이 펼친 페이지를 보면서 당당하게 손드는 것이 줄어드는 고학년이 되는 것 처럼 어쩌면 우리가 어른이 된다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만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원하는 것에만 반응하던 아이들은 보육기관과 교육기관을 거치면서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내가 원하지 않지만 타인이 원하고 바라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학교에서는 자연스럽게 보다 높은 학년에 있는 학생이 자기보다 어린 친구들에게 양보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가령 도서관에서 저학년 아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거나 급식실에서 저학년 아이들이 식판을 흔들흔들 들고 지나갈 때 자기 차례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지나갈 때까지 피해 주는 것, 내가 먼저 하고 싶지만 누군가에게 양보하는 모습들. 마냥 자기 것만 취한다고 싶다가도 자기보다 어린 학생, 혹은 도움이 필요한 친구들에게 손을 내미는 아이들을 볼 때면, 자란다는 것이 저런 것이구나를 느끼게 된다.


하지만 자란다는 것은 늘 긍정적인 면으로만 발전하는 것은 아니고,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을 해야한다. 어떤 일을 마음 가는 대로 혹은 감정적으로만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배우면서 사회의 룰, 내가 살아가는 공간에서의 규칙들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절충안을 찾으며 합의점을 찾게 된다. 그러다가 그 균형이 무너지게 되면서 나의 욕구보다는 타인의 욕구에 집중하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내가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세상이 깨지고 나는 초라한 존재가 아닐까 싶어 지면서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의 말만 좇아서 그들의 주장에 휘둘려 살아가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자기 장난감이 빼앗기면 울며 불며 소리치던 작은 아이는 어디로 간 걸까?


우리 모두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욕구에 집중했지만 점차 그 욕구는 누군가의 기대치를 충족시켜 줘야 하는 고지에 다다르게 된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의 기대를 충 종시 켜야 할 것인가? 그렇다면 나의 욕구 혹은 기대는 누가 충족시켜 줄 것인가? 내가 원하는 것에 집중하던 삶은 누군가가 원하는 삶으로 바뀌게 되고 누군가의 기대 혹은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의 시선이 어느새 내 삶에 깊숙이 들어와 내 삶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르게 될 때, 인생의 비극이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이처럼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던 피카소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다. 정형화된 표현에 얽매이지 않고 그림을 그렸던 그처럼 우리 역시 누군가의 시선과 기대에게 부응하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그것을 표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자기만의 삶을 말이다. 누군가의 말을 귀담아듣는 것만큼이나 내가 하고 싶고, 내가 원하는 것에 집중하는 아이들의 사고방식을 어른이 되었다는 이유로, 부모가 되었다는 이유로 어쩌면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회화를 통해 더없이 훌륭한 인간이 되었지만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작은 아이를 한 번쯤 돌봐주어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른이 되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누군가의 말에 귀 기울여주고, 사회적 위치에 따라 나의 말과 행동을 정비하는 만큼 그 모든 것을 해방시켜 줄 수 있는 나만의 출구를 말이다.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의 장수연 작가는 ‘쓸데없는 일’을 할 때에 가장 즐거웠다고 한다. 육아 휴직을 하고서 무엇이 효율적이고 생산적이지 않은 일을 하면서 보낸 그 시간이 정말 충만함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고 하면서 그간 자기가 너무 쓸데 있는 일에만 집중하며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직장이 아닌 직업을 찾으라고 강조하는 <쿨하게 생존하라>의 김호 작가도 마찬가지다. 직장에서 벗어나는 순간, 더 이상 명함의 나로 존재하지 않는 순간에 할 수 있는 자기만의 ‘업’, 그것은 결코 사회에서 바라는 혹은 타인의 눈에 그럴 듯 한 무엇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만의 만족감 혹은 일상의 스트레스를 날려줄 수 있는 출구가 되는 무엇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럴듯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더라도 그저 내가 하는 것만으로도 무엇인가 즐겁고 뿌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그런 일. 내가 나일 수 있는 그런 일. 어린아이처럼 그저 내 욕구에만 집중해서 할 수 있는 일. 그런 일이 어른의 삶에 반드시 있어야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소개팅을 할 때 의무적으로 물어보던 상대방의 취미생활이 참 중요한 것이구나를 새삼 깨닫는다. 한 사람의 정체성은 어쩌면 현재 직업이 아니라 심취해 있는 취미생활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나의 취미 생활 목록을 한 번 작성해 봐야겠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 무엇을 더 하고 싶은지를 생각해봐야겠다. 나는 어른이지만, 앞으로 살아내야 할 긴 시간들에 비하면 어쩌면 아직 어린아이 일지도 모른다. 내 욕구에만 충실할 수 없다는 것 알고 적절히 조율할 줄 아는 훌륭한 어른이 되었지만 우리 아이들처럼 마냥 놀고만 싶은 마음이 늘 상주하는 무늬만 어른 말이다. 비단 나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그러니 어서 하루라도 빨리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자. 남은 어른 기간이 보다 즐거운 삶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표지 사진 : 피카소의 <꿈>,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