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것을 멈출 수 있는 용기

<인어공주>를 보며 나의 삶을 떠올리다.

by 이유진


나는 잠잘 시간이 되어 침대에 누울 때면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그래서 잠자기 전에 책을 읽어주는 것을 언젠가부터 안 하게 됐다. 차라리 책을 읽고 잠자러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애들이랑 하루 종일 집에서 뒹굴다 보니 책 읽어 주는 것도 지치고... 이래저래 빼먹게 되는 책 읽기가 왠지 모를 죄책감을 안겨다 주어, 대신 누워서 이야기하기를 빼먹지 않고 하고자 노력한다.


말 그대로 누워서 내 맘대로 지어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옛날 옛날에~’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명작 동화에서부터 내가 지어 낸 내 맘대로 이야기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이들에게 훈계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들려줄 때 꽤나 효과가 있다. 예를 들면 한창 울면서 징징대던 첫째 아이에게 ‘울보 왕자님 이야기’(이것도 물론 내가 마음대로 지어낸다.)를 해주면 다음날은 징징대는 것이 좀 덜해지는 그런 효과라고나 할까.


그런데 그것 마저 귀찮아지는 요즘, 나름 꾀를 내어서 이제 좀 자란 아이들에게 대신 이야기를 시킨다. 물론 처음에 내가 하나 해주는데, 예전 같으면 적어도 2-3개는 해야지 끝이 날 일을 이제는 나 하나 첫째 아이가 하나, 그리고 둘째 아이가 하나 하면서 수고(?)가 많이 줄었다. 그리고 어젯밤에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데에 한계를 느껴 갑자기 떠오른 디즈니의 <인어공주>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아무래도 악당 마녀 우슬라 덕분인지 흥미진진한 스토리에 아이들은 나름 재미있게 듣다가 첫째는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이내 잠이 들어버렸고, 낮잠을 실컷 잤던 둘째는 똘똘한 채로 똑같은 질문 백개를 해대기 시작했다. (가령, 그럼 핑크 마녀는 어떻게 됐어? 그럼 초록 마녀는 어떻게 됐어? 이렇게 색깔별로 백번을 물어본다.) 결국 내일 인어공주를 넷플릭스로 보여주겠다고 다짐한 뒤에 잠이 들었다.(아, 힘들다 힘들어... 정말 영혼까지 털어가는 녀석이다.)



추억의 <인어공주>를 보며 승자와 패자를 떠올리다.


그리고 다음 날 우리는 다 같이 <인어공주>를 찾아보았다. 그런데 오랜만에 보며 추억에 잠겼다기보다는 새로운 시선으로 보게 됐다. 아마 내가 아이들이 생겨서 이겠지?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인어공주> 포토

에리얼이 아빠와 맞서 싸우는 장면, 마녀 우슬라에게 겁 없이 찾아가 계약을 하는 장면을 보면서 문득 먼 미래가 상상이나 되듯 겁이 났다. 나라면 저렇게 부모와 맞서 싸울 용기가 났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애리얼은 에릭 왕자님과 사랑의 결실을 맺고 결혼을 하면서 배를 타고 멀리 떠나는데, 남아있는 인어 가족들과 떠나는 인어공주 에리얼이 새삼 괴리감 있게 느껴졌달까. 특히 언니들이랑 인사를 나누는 장면에서 물속에서 손을 흔드는 에리얼의 언니 인어들이 현실에 안주한 패자처럼 느껴지고 배 위에서 왕자님과 함께 손을 흔드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에리얼은 승자처럼 보였다면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한 것이겠지? (넷플릭스는 캡처가 안 되는구나)



쟁취하는 열정과 현실에의 타협


자기가 바라는 것이 있으면 에리얼처럼 쟁취하는 게 맞는데, 사실 우리가 살면서 그런 열정을 보이기도 쉽지 않거니와 그런 열정은 나이가 들면서 현실과의 타협이라는 이유로 자연스레 식어간다. 더욱이 애리얼은 그냥 인어도 아니고 바닷속 제왕의 막내 딸로 귀한 신분의 공주님이 자기가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던져서 사랑과 맞바꾸는 것이 현실성 없게 느껴졌지만, 한편으론 모든 것을 던지는 그 열정이 새삼 대단해 보였다.(그래서 주인공이겠지만.)


그러고 보면 우리가 즐겨보는 만화, 영화, 드라마 등 작화 속의 주인공들은 대부분이 자신이 처한 현실을 극복하는, 혹은 박차고 벗어나려는 인물들이 중심이 된다. 그래야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니 말이다. 사건. 사건이라는 것은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현재 상태에 안주해서는 절대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지긋지긋한 현실을 박차고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정재승 교수는 그의 강연을 엮은 책 [열두발자국]에서 인간의 뇌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기 때문에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분배한다고 한다. 그래서 뇌는 평소에 하지 않던 것을 시도하기보다는 지금껏 해온 대로 하는 것을 선택하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쉽게 변하지 않는단다. 현실에 안주해도 지금 누리는 것을 누릴 수 있는데 굳이 모험을 무릎 쓸 이유가 없다는 것. 굳이 변화를 꾀하지 않더라도 지금 내가 누리는 것들을 잃지 않는 상황이라면 굳이 변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 즉, 절실한 어떤 상황, 극단적으로 암에 걸리면 담배를 끊는 것처럼 나에게 엄청난 절박한 상황이 닥치지 않는 이상 쉽게 변할 수가 없는 것이 인간이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에 하지 않던대로 시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나는 정재승 교수의 그 말이 너무 와 닿았다. 나 역시 이대로 살아서는 안될 것 같은 뭔가가 왔었고, 때문에 평소에 하지 않던 것들을 시작하면서 아주 조금은 인생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생각은 변함없지만, 한편으론 바뀐 그 삶이 다시 일상이 되니 ‘나는 지금 고여있는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면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사실 요즘은 동화책을 쓴다는 명목으로 브런치 글쓰기를 소홀히 하고 있는데, 이도 저도 제대로 진행되는 게 없다는 것이 더욱 큰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이거나 저거나 제대로 결과로 나오는 건 없고, 누구는 책을 출판하고, 누구는 강의를 하면서 또 다른 시작을 진행하고 있는데 나만 제자리에서 머물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그냥... 조금 우울해진다. 나의 가치가 빛을 발할 때가 올 것이라고 누군가에게(나의 남편, 혹은 가족들) 호언장담 하지만 사실 나는 그냥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은 아닐까... 싶은 그런 생각들. 일찍 일어나서 달리기하고 글쓰기 한다고 유튜브 한다고 혼자서 설치고 다니지만 결국 아무런 성과도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싶은 그런 생각들.



힘든 날, 코로나 블루인가.


사실 오늘은 나에게 참으로 힘든 날이었다. 어젯밤 인어공주 이야기로 아이들을 재우고, 오랜만에 옛날 아이돌 가수에 꽂혀서는 밤새 유튜브를 보다가 늦잠을 잤다. 그로인해 띵한 머리는 아침부터 스트레스 지수를 높여주었고, 코로나로 인해 아이들과 열흘 가까이 매일 치대다 보니 나는 무엇인가 억장이 나기 시작했다. 뭔가 모를 억울함이 단전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올랐고, 때마침 터지는 둘째 아이의 고집과 생떼 쓰기는 불에 기름을 쏟는냥 나를 거침없이 폭발하게 만드는 좋은 윤활제가 되어주었다.


태풍은 지나갔는지 비는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하고, 바람도 불다가 말다가를 반복하니 공원에는 도저히 못 나갈 것 같고, 집에서 놀아야 하는데, 내가 뭘 해주기는 너무 싫은 날이었다. 그렇다고 TV를 하루종일 보여주는 건 왠지 모를 양심의 가책이 느껴져 오전에 보고는 다시 껐다. 아이들의 지루함과 짜증, 그리고 나의 피곤함과 짜증이 겹치면서 나의 목소리는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았고, 그야말로 모든 스트레스를 아이들에게 풀어댔다.


한 번씩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내가 미친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이 조그만 아직 미성숙한 아이를 상대로 오기로 기싸움을 하고 있는 나라는 존재는 도대체 언제쯤이면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인지. 나에 대한 자책과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이 한데 어우러져 참기 힘든 상황을 자꾸 만들어냈다. 내가 스스로 말이다. 내가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건지 나도 이해할 수 없는 ‘화’를 다스리는 게 쉽지 않았다. 뭔가 나를 내버려 두지 않는, 잠시도 혼자 공간을 확보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토록 나를 분노하게 한 것인지 아니면 그에 맞춰 울면서 떼를 써대는 아이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오늘은 정말 그 모든 박자가 잘 맞아떨어져 대환장 파티가 여러 번 열린 날이었다.


결국 나에게 남는 것은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과 후회뿐이다. 혹시나 내가 화를 내고 소리친 것이 아이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쳐서 성격이 이상해지는 건 아닌지, 엄마의 언어폭력에 아이들이 움츠려 드는 것은 아닌지 별별 걱정만 나를 옥죄어 올뿐, 이 싸움의 승자는 결국 아무도 없다. 그저 처절한 후회를 하는 패배자 엄마만 있을 뿐이다.


잘못된 것을 멈출 수 있는 용기


그래도 토로할 수 있는 육아 선배들이 있어서 위로를 받는다. 친구들과 지인들.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나만 그런 게 아님을 알려주는 그들 덕분에 나는 다시 정신을 차린다.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으면 더 이상 자책과 후회도 말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그런 밑바닥을 보여주지 않을 수 있을 것인지 좀 더 연구하고 실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당장 멈추면 된다는 것.


잠든 아이들의 모습은 천사 같다. 못난 엄마이지만 그런 엄마를 늘 좋다고 따라다니는 우리 아이들에게 나는 오늘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좀 더 성숙한 인간이 되기를, 정재승 교수의 말처럼 인생의 목표가 성공인지 아니면 성숙인지 잘 생각해야 할 나는, 자책과 후회보다는 잘못된 것을 멈출 수 있는 용기가 더욱 필요함을 깨닫는다. 애리얼처럼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악마와 계약할 만큼의 용기는 없지만, 지금 잘못하고 있다면 그것을 멈추는 용기가 나에겐 필요하다. 그것은 어쩌면 또다른 변화를 꾀하는 것을지도 모른다. 하지 않던 것을 시도하는 것도 변화지만 잘못된 것을 멈추는 것도 변화이다. 오늘과 같이 아이들에 분노를 쏟아내는 일은 더이상 없기를. 잘못된 것을 멈출 수 있는 용기를 기도하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나를 토닥여 본다. 오늘 하루도 잘 버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