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에 사로잡힌 나에게

나의 하루를 돌아보며

by 이유진

여느 날과 다름없이 둘째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막 정류장에 들어서는 마을버스를 타기 위해 미친 듯이 전력질주를 했다. 겨우 버스에 올라타 자리를 찾았으나 당연히 만석. 등줄기로는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아침마다 일어나는 대환장 파티 속에서 아이들에게 짜증을 낸던 것이 갑자기 생각나고, 에어컨 바람은 왜 이렇게 약한가 싶은 생각이 들 무렵, 창 밖으로 까만색 원피스를 입은 임산부 한 명이 걸어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가느다란 팔다리와 배만 볼록한 모습에 임신 당시 굉장히 살이 많이 쪘었던 내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난 그때 뭐가 그리 맛있어서 많이 먹었었나 싶은 생각도 들고, 나도 한창 부른 배로 열심히 출근하러 다녔지 하는 생각도 하며 혼자만의 망상에 빠질 무렵, 버스는 정류장을 향해 막 정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임산부에게 자리 양보 해주세요.”


다시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버스 안에서 웬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돌아보니 기사님이 외친 목소리에 분홍색 자리에 앉아있던 분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방금 창 밖으로 보았던 그 임산부였다. 그녀는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듯 어쩔 줄을 몰라하며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기사님의 사이다 발언과 임산부가 자리에 앉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 꼬리가 올라가며 짜증스러웠던 기분이 반전되었다. 나랑은 아무 관련은 없지만 말이다.


‘기사님 의외네.’


젊은 마을버스 기사님은 아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얼굴을 알고 있다. 우선 나보다 어려봬는 얼굴과 친구 남편과 상당히 닮은 점, 게다가 마을버스라는 게 운행하시는 분이 소수로 고정되어 있어 자주 마주치다 보니 그런 탓도 있었다. 그리고 주말이면 아이들 데리고 근처 산에 간다고 텅텅 빈 버스를 탈 일이 두어 번 있었는데 그때 기사님이 자리를 마음대로 옮기고 싶어 징징대는 우리 둘째 아이를 겁 준(?) 에피소드들이 종종 있었기에 그의 얼굴을 기억하게 된 것이다.


사실 나는 딱히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다소 투덜이 같아 보이는 그의 모습이 썩 긍정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운전을 할 때 마치 자신의 차를 운전하는 것 마냥 본인의 기분을 드러내는 데에 거침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신호가 바뀌었을 때 앞 차가 조금이라도 주저하면 망설이지 않고 버스 크락션을 빵빵 울려대며 구시렁대는 식이었다. 차를 탈 때마다 매번 그랬기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젊은 사람이 불만이 많네라고 단정 지었다. 그랬던 그 기사님이 오늘 아침 외쳤던 그 사이다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사실 내가 한창 배가 불러서 버스를 타고 다닐 무렵에는 생각보다 배려해주시는 분들이 없다는 것에 놀란 경험이 있다. 배가 남산만큼 불러온 상태로 버스를 타도 자리를 양보해주는 사람은 흔치 않았고, 그렇다고 내가 양보를 해 달라고 생떼를 쓸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 그럴 때 저런 버스 기사 아저씨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뭐 결론은 사람에 대한 편견을 갖지 말자고 늘 생각하면서도 나 역시도 그 기사님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기사님을 간혹 마주치고 게다가 버스에 머무르는 시간이 10여분 정도밖에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사님에 대한 판단을 이미 내리고 있었다는 사실에 그만 부끄러워졌다.




아이들에게 세계 명작 동화를 읽어주다 보면 극명하게 대비되는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들의 이야기에 가끔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이 사람이 굳이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는데...’라는 혼잣말을 삼키곤 하지만 장황하게 설명해 봤자 아직 4,6살 밖에 안된 아이들이 인간의 다양한 면모를 이해하기는 불가능한 것. 혼잣말로 구시렁대긴 하지만 나 역시 그런 명작동화를 읽으며 커 왔고, 한동안 세상은 착한 사람 아니면 나쁜 사람이 있는 것이다라는 판타지의 세계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이기에 여전히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나이가 들수록 인간이라는 것이 착하다 혹은 나쁘다 두 가지 성향의 흑백논리로 딱 잘라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워가면서도 결국 이 사람은 나에게 호감이 있는가 혹은 나에게 친절한가를 여부로 좋다 싫다를 판단하고 있는 내가 아직도 어리구나 싶다.


문유석 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에인간은 익숙한 것에 끌리고 새로운 , 타자를 경계한다. 논리 이전에 감성적으로 우리 편이라는 편안함을 주지 않으면 배척 장치가 발동한다.”라는 대목이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의 행동은 인간 본능에 의한 당연한 것이구나 합리화를 시키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늘 경계해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했다.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자기가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 모든 것을 ‘나’를 중심으로 판단하려 든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모든 것의 기준이 내가 되는 것이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일상에서는 무의식적으로 모든 것을 내 기준에 맞춰 판단하는 내가 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잠깐이라도 오늘 하루 일어났던 일에 대해 혹은 어떤 사건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을 가지려 노력한다. 성찰이라고 하니 대단히 어려운 과제처럼 느껴지지만 어떤 형태로든 글을 쓰는 일이 나에게는 도움이 된다. 짧은 감사일기라도 말이다. 일기 인지 넋두리인지 모를 글을 쓰면서 나의 하루를 되돌아보게 되고, 내가 잠깐 했던 생각에 대해 다시 풀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 그러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성찰을 하게 된다. 글쓰기의 처음 목적은 불손했지만 나는 글을 쓰게 된 삶에 대해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늘 생각이 많아서 괴로웠던 한 미성숙한 인간이 글을 쓰면서 치유되고 있음을 느낀다. 늘 무겁다 생각했던 나의 생각들이 글로 옮겨지면서 나는 자연스레 가벼워진다. 나의 삶의 무게를 글에 옮겨담으면서 나는 조금씩 더 행복해지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리석다. 동사무소 직원이 무표정하게 자기 할 말만 하는 딱딱한 태도에 나도 모르게 기분이 나빠지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다. 물론 내가 먼저 웃으면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돌아섰다면 어땠을까 싶지만 아직 그렇게 까지는 인격이 성숙되지는 못했기에 그저 빨리 잊어버리자 싶다. 친절을 당연하게 받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의 쌀쌀맞은 태도에 나도 모르게 상처를 받는 인간이기에 이렇게 또 쓰면서 금세 훌훌 털어버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


편견이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고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이 자기가 살아온 삶이 있는데, 어찌 거기에서 벗어나 공정한 눈으로만 상대를 바라볼 수 있을까? 하지만 결국 나를 위해서 편견을 갖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상대방의 불친절에 기분이 나빠지지 않으려면 그 사람에 대한 편견을 내가 먼저 버리는 것이 지름길이라는 말이다. 나에게 어떤 나쁜 감정이 있어서 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결국 인간은 어리석다는 사실. 나 역시 그런 어리석은 인간이기에 계속 배워야 한다는 사실. 이렇게 글을 쓰면서 성장하기를 기대하며 앞으로도 글쓰기를 게을리하지 말자는 사실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