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막한 현실에 절망하고 있다면
사실 달리기를 하러 나갈 때면 하루 전날부터 다음날에 대한 걱정이 몰려온다. 아, 내일 뛰는 날이네.(나는 이틀에 한 번 꼴로 뛴다.) 뛸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그것인데, 새벽에 눈을 뜨면 여지없이 이거 뛰러 나갈 수 있는 건가 싶은 몸상태와 나가기 싫은 마음이 요동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이 말똥 말똥해진 이상 일단은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나가게 된다.
오늘은 달리면서 딱 3킬로만 뛰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한 바퀴에 250미터 정도 되는 공원을 뱅글뱅글 도는 것이 지겨워진 나는 공원 밖으로 종종 나가는 편인데, 뛰어나가는 공원 입구에서 가방을 메고 걸어가는 한 청년을 보았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깜깜한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한숨 쉬듯 담배를 물고 지나가는 청년의 축 처진 어깨를 보며 수험생인가 싶었다. 그러면서 지금 달리면서 힘들어 죽겠다. 그만 달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나와 그 청년 중에서 누가 더 괴로울까 싶은 생각이 드니 차라리 달리는 내가 낫겠다 싶어 졌다. (물론 그 청년은 수험생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런 생각으로 막판 스퍼트를 내서 달리다 보니 결국 5km를 다 달렸고, 달리고 나서의 개운함은 무엇보다 상쾌했다.
간단한 스트레칭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씻고 책을 펼쳐 들었는데, 거기서 이런 말이 나왔다.
수용소에 있었던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글로 쓰거나 이야기할 때, 당시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절망적이었던 것은
자기가 얼마나 오랫동안 수용소 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한다.
나는 다시 그 청년이 떠올랐고, 자연스레 나의 수험생 시절이 떠올랐다. 정말 그랬다. 내가 시험을 치를 때 가장 두려웠던 것은 공부를 하는 그 시간의 괴로움보다 합격여부가 보장되지 않은 상태의 불안함이었다. 합격한다는 보장만 있으면 얼마든지 수험생활을 견딜 수 있을 것이었다. 수능이든 임용이든 ‘합격이다’라는 결과를 미리 알 수만 있다면 기꺼이 공부 외에는 아무것도 쉽사리 허락되지 않는 그런 환경을 견딜 수 있을 것이었다. 나뿐 아니라 내 친구들의 불안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시험과 직장생활 혹은 육아를 병행하는 친구들에게 있어서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 수험생의 시간들은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었음을 종종 고백했다.
절망의 가장 큰 불행은 그 끝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 이 안 좋은 상황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것인지 누구도 알 수 없지만 빅터 프랭클은 그런 최악의 순간에서도 정신적 성취를 이뤄내는, 영적인 고지에 오르는 사람은 있다고 말한다. 수용소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는 진정한 기회는 자기들에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고, 그곳에도 기회가 있고, 도전이 있기에, 그런 경험의 승리를 정신적인 승리로 만들 수 있다고 말이다.
나는 이 말에 일부 동의한다. 일부라는 말은 정말 그런 사람들은 소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지금에 닥친 절망적인 상황은 언젠가는 끝난다는 것이다. 내가 겪은 대부분의 일들은 그랬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기뻐도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았다. 수험생활의 고난함도, 합격의 기쁨도, 출산의 고통, 달리기의 힘듦 등 그 순간에는 영원할 것만 같던 것들이 대부분 끝이 났고, 또 다른 고통과 행복이 시작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힘든 상황에 놓여있다면 삶에 기대감을 품고서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빅터 프랭클이 그랬듯 말이다. 그는 발에 종기가 나서 너무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작업장으로 걸어가면서 오늘은 무엇을 먹을 수 있을까? 담배와 수프를 바꿔서 먹을까? 소시지를 빵과 바꿔 먹을까? 고약한 감독관을 만나면 어떡하지? 등 매일 시시각각 하찮은 일만 생각하도록 몰아가는 상황을 너무 역겹게 느껴져 생각의 주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고 말한다. 청중들이 가득 찬 쾌적한 강의실에서 수용소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강의하는 자기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 그것은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던 최악의 고통과 본인이 처한 상황들을 이겨내는데 큰 힘이 되었다는 것이다. 미래의 기대감은 현재 삶의 고통과 지루함을 이겨내는 데 있어 큰 돌파구가 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나는 상당히 동의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반드시 그 고통 가운데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빼먹지 않고 하는 끈기가 필요하다. 단지 기대감 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기대감이 현실이 되려면 그에 따른 실천이 필요하다. 캠퍼스의 낭만을 꿈꾸는 수험생들이 그저 캠퍼스만 꿈꾸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원하는 캠퍼스의 낭만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기대를 실현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매일 해야 할 분량의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습관처럼 새벽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책을 읽고, 잠깐이나마 글을 쓴다. 촬영하고, 틈틈이 영상을 편집하면서 일주일에 한 편은 유튜브에 영상을 업로드한다. 누군가가 봤을 땐, 돈도 안 되는 일을 왜 저리 열심히 하고 있을까 싶을 수도 있다. 나 역시 그렇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이를 일을 하면서 지겹기도 하고, 뭐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진 않아도, 이런 것들이 지금 내 삶에 상당히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복직하고 나서 이 혼란한 시기에 지난 공백기간이 무색할 만큼 도태되지 않고 적극적으로 적응해서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 만약 이런 준비가 없었더라면 (물론 이 사태를 예고하고 시작한 것들은 전혀 아니었지만) 아마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 점차 실현 가능한 기대감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은 지루한 삶에 큰 활력이 된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실감한다. 나중에는 좋아지겠지 하는 막연했던 기대감이 뭐가 됐든 조금씩 실행을 하면서 내가 바라는 미래의 그림이 희미하게나마 구체적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 지금 내 삶에 있어서 가장 큰 즐거움이다. 그 기대감이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마치 수용 소안에서 그가 느꼈듯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의 고민은 있다. 매일의 지겨움도, 일상의 피곤함도, 나는 왜 아직 안될까. 하는 자책감도 있다. 어쩔 수 없다. 우리 삶은 그런 것이니까. 그저 먼지처럼 쌓이고 쌓여 티끌이 태산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빅터 프랭클의 말처럼 하루 하루 고단한 삶에 대한 근시적인 고민이 아닌, 실현 불가능 할 것 같지만 내 삶에 대한 원시적인 접근과 그에 따른 아주 작은 실천을 시작해 보면 어떨까?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당장 현실이 바뀌지는 않으며, 장미빛 미래를 보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기대감은 생겨날 수 있다. 막막한 현실에 플라시보같은 달콤한 약 하나를 공짜로 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아무도 처방해 주지 않지만, 그저 내가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먹는다면 절로 생겨나는 것이니 한 번 해볼만 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