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를 쓰는 것이 일상이 돼버린 요즘, 나는 요즘 연예인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농담이고) 연예인들이 일상생활에서 돌아다닐 때 왜 마스크를 쓰고 다녔는지를 조금 이해하게 됐다. 왜냐하면 사실 이전에는 그들의 얼굴이 마스크를 쓴들 못 알아볼까 싶은 의구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직접 마스크를 쓰고 다녀보니 알겠다. 역시 사람은 뭐든지 직접 겪어봐야 한다고, 새삼 마스크의 위력을 깨달았다고나 할까.
코로나가 터지고 초반에 마스크를 쓰고 다닐 때에는 복직 전이었고, 생활 반경이 동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므로 이미 이전에 얼굴을 아는 사람들이었기에 마스크를 썼다고 해서 그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마스크를 쓰는 것이 사람의 인상착의에 큰 차이를 준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복직을 하고 전에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면서 간혹 가다 그들의 전체 얼굴을 보게 될 때, 나는 사뭇 ‘누구인가?’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 참으로 신기했다.
예를 들면, 우리 반 친구들이 그렇다. 아이들과 일주일에 두 번을 만나는데 이제 두 달 정도 되어가는 지라 나는 그들이 익숙해졌고, 당연히 그들의 얼굴을 다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밥을 먹을 때라던지, 한 번씩 아이들이 마스크를 벗고 있는 모습을 마주할 때, 이 아이가 내가 알고 있는 그 친구가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전혀 얼굴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할 때, ‘아, 마스크가 얼굴 전체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구나 ‘를 새삼 느끼게 된다. 나도 모르게 ‘어머, 너 교정하고 있었니?’라는 말을 하게 되는데, 그도 그럴 것이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교정을 하는지 마는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동네 엄마들이다. 첫째 아이 유치원 하원에 맞춰서 놀이터에서 약 한 시간 반 가량을 놀다가 들어가는데, 그러다 보니 매번 놀이터에서 마주치며 인사하게 된 엄마들이 있다. 처음에는 대면 대면하다가 매일 만나다 보니 이제는 제법 친근해졌는데, 그 엄마들 역시도 마스크를 쓴 얼굴을 첫인상으로 만나서 그런지 가끔 더운 열기에 한 번씩 마스크를 벗은 얼굴을 볼 때면, 전혀 다른 인상에 깜짝 놀라게 된다.
마스크를 쓴 얼굴이 익숙해지고, 그것이 마치 그 사람의 얼굴인 양 나도 모르게 인지하게 된다. 마스크를 쓴 얼굴 역시 나의 선입견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얼굴의 일부만 보고서 그것을 그 사람의 얼굴이다 라고 인식하는 것 역시 성급한 판단이 아닐까. 매번 ‘성급한 판단’때문에 실수하고 때로는 곤란한 상황에 직면하기도 했었던 과거를 떠올리며 ‘침착함을 유지하기’, ‘성급하게 판단하고 행동하지 말기’를 되새김질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것이 그렇듯 ‘훌륭함’으로 가는 길은 참으로 어렵다.
철없는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마스크를 쓴 얼굴이 마음에 든다. 늘 계란형의 얼굴을 꿈꿔온 나에게 마스크는 약간 각진 나의 턱을 가려주는 아주 훌륭한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스크를 쓰고 있는 내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집으로 돌아와서 마스크를 벗고 나면 느껴지는 귀 위쪽의 통증을 인지할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싶은 현타(?)가 온다.
마스크를 본격적으로 착용하고 다닌지도 어느덧 6개월 정도가 지난 것 같다. 사람이라는 것이 또 적응의 동물인지라 이제는 다들 마스크를 쓰고 생활하는 것이 익숙해 보인다. 어디서든 마스크를 쓴 모습들이 더 이상 어색하지 않은 세상.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가 이제는 일상으로 받아들여진 지금. 아무 생각 없이 지내다가도 앞으로도 영원히 이렇게 마스크를 쓰고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은 마음에 문득 두려움과 무서움이 급습하기도 한다. 사람들의 말처럼 이제 세상은 코로나 이전과 이후의 시대로 나뉘게 된 것일까. 세상이 바뀌고 거기에 적응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한번 놀라움을 느낀다.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어 많은 사람이 죽어갔을 때의 그때도 이런 공포감 속에서 사람들은 그 일상에 적응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우리가 상상하기에는 끔찍했던 과거의 잔혹한 역사들이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익숙한 일상으로 젖어들어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사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싶다. 우리의 삶이란 무엇일까. 과연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결국 우리는 코로나를 매해 맞아야 하는 인플루엔자 독감처럼 여기며 3가 4가 코로나가 추가된 5가를 맞으며 일상에 젖어들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상황에서든 살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무섭게도 느껴진다.
기사를 보다가 이효리 씨의 인스타 사진 하나를 보게 됐다. ‘흔들리는 세상에서 나만의 중심잡기’라는 멘트가 하나 붙여진 사진을 보면서 그녀는 요가뿐 아니라 삶에서 어떤 경지에 올랐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탑스타 자리를 떠났지만 지금도 현직의 젊은 아이돌 못지않은 전성기를 다시 한번 구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인기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모습이, 연예인으로서의 삶과 한 개인으로서의 삶의 균형이, 내면의 성숙이 외면의 미모와 어우러지며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한 전성기를 맞고 있는 그녀가 참 부러워졌다. 그녀의 말처럼 흔들리는 세상에서 중심을 잡는 일이 그녀의 고난도 요가 동작만큼이나 쉽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코로나가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지만 우리 삶 속에 공포는 언제나 존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코로나는 어쩌면 그 공포가 외면으로 드러난 것일 뿐,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범죄, 혹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커다란 두려움이나 공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르겠다. 뭐가 됐든 우리는 이 공포를 이겨내야 하고 다시 삶을 살아가야 한다. 마스크를 쓰는 것으로 코로나를 예방할 수 있는 것처럼 내 삶의 내 마음의 공포를 예방해줄 마스크가 필요하다. 두렵고 흔들리지만 자꾸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 귀찮고 짜증 나지만 참아낼 수 있는 용기, 비록 눈에 띄는 결과물이 보이지 않지만 계속해나갈 수 있는 꾸준함. 나에게 지금 필요한 것들이 바로 이런 것이다.
누군가 말한다. 인생은 롤러코스터라고,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다는 것. 인생은 어쩌면 길고 지루한 일상 가운데 잠깐 기뻤다가 또다시 슬픔과 지겨움이 오는 것이라고, 그러다 또 잠깐 기뻐할 일이 생기는 것의 연속이라고. 그 잠깐의 기쁨과 행복을 위해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잠깐의 행복보다는 일상의 위대함을 믿고 싶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의 위대함과 소중함 속에서 매 순간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흔들리는 세상에서 나만의 중심잡기가 필요하다. 마스크를 쓰기 전부터 알고 있는 사람들이든 쓴 이후에 알게 된 사람들이든 마스크가 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듯, 내 삶의 판단 기준은 무엇보다 나 자신이어야 함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열두 발자국>의 정재승 교수님이 말한 ‘타인의 욕망을 나의 욕망이라 부추기는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기 위해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 무엇일지 다시금 생각한다. 그 누구와도 비교하지 말고 나만의 세상에서 우뚝 설 수 있기를, 하루하루 더 단단한 사람이 되어가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
*표지 사진 : 이효리 씨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