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처럼 시작해.

민망함은 너의 몫

by 이유진

요즘은 차를 타고 다니면서 라디오를 듣는다. 어제는 사르트르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해보지 않고 변명만 늘어놓는 사람들에게 자기기만에 빠지지 말라고 충고했다. 인간은 가능성으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는 행동으로 보여진다라는 말을 들으며 그래 정확한 말이라 동감했다. 아이들에게 다시 한번 일러주어야겠다 싶어 졌다. 나는 종종 아이들에게 너희가 선생님이 가질 수 없는 ‘젊음 즉, 시간’을 가졌다고 강조하면서 앞으로 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의 크기로 본다면 압도적으로 너희가 우위에 있다고 했다. 하지만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사르트르의 말은 그게 틀렸다고 말하고 있었다. 가능성은 가능성일 ,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유튜브 촬영을 위해 <싸이퍼>를 읽다가 우리 반 학예회로 랩을 해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어 아이들에게 제안을 했다. 아이들은 지금 무슨 소리냐며, 다들 난색을 표했지만 영 싫은 듯한 눈치는 아니었다. 나는 아이들이 랩을 쓰게 하는데 의의를 두고 싶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쓸 수 있는 것. 글쓰기 지도는 매번 하고 있으나 아무래도 쓰는 것을 싫어한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이게 딱 좋겠다 싶었던 것이다. 일단 아이들에게 랩을 해보자고 이야기는 했지만 사실 내가 랩에 대해 뭘 알겠는가? 책에서 읽은 것과 내가 실전으로 해 본건과는 천지 차이일 텐데, 나는 힙합을 좋아해서 랩을 많이 들어는 봤지만 실제로 해본 적은 없다. 아마 아이들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쇼미더머니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서 랩을 접하고 많이 들어봤겠지만 본인들이 직접 해본 경험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애들이 거부감 없이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아무래도 아이들 역시 자기가 해보지 않았기에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았다. 우리 반 말썽꾸러기 녀석들도 흥미를 보이긴 했지만 선뜻 자신 있게 좋다고는 손을 들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거지처럼 시작하라.



일단 아이들에게 해 준 말은 이거였다. 내 말을 듣고서 아이들은 킥킥댔다. ‘거지같이’라는 말이 아마 웃겨서였겠지. 나는 이 말을 지인으로부터 들었다. 당시 이것저것 하는 것이 많아서 무엇을 더 하기(원서 읽기)에는 부담스럽다는 생각으로 안주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던 어느 날, 모임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영어공부까지 어떻게 해요’라고 망설이자 ‘에이 뭘 어때 그냥 거지처럼 시작하면 되는 거야’라고 웃으면서 말씀해 주셨는데, 그 말을 듣고서 뭔가 모를 부담감이 싹 가셨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는 영어 원서를 함께 읽는 모임에 합류했고, 그날 이후로 지금껏 총 3권의 원서를 읽을 수 있었다.(아마 내가 대단히 잘하고 싶은 마음에 부담을 갖고서 시도하지 않았더라면 난 아마 지금까지 단 한 권도 읽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들은 역시 시작도 하지 않고서, 해보지도 않고서 자기들이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건 당연한 이치다. 해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잘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나 역시도 막상 말을 던져 놓고는 고민이 됐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냥 시킨다고 뚝딱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무슨 랩을 잘하는 것도 아닌데 애들한테 어떻게 가르쳐 줄 것인가. 그렇다고 래퍼를 고용할 수도 없는 일이니... 아이들이 실과 수업을 하러 잠시 교실을 비운 사이 마무리 짓지 못한 일들을 이래 저래 했다. 그러다가 번개같이 ‘이렇게 하면 되겠다’가 번쩍 떠올랐다. 얼마 전에 구입한 블루투스 마이크가 생각난 것이다! 요즘 수업 중에 잘 활용하고 있는데, 별거 아니지만 아이들은 마이크를 갖다 대면 왠지 긴장하기도 하고, 재밌어하기도 하고 또 진지해진다. 그런 아이들 앞에서 내가 MC가 되어 마이크를 잡아보았다.


슬슬 6학년 2학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확실히 아이들 키를 비롯해 덩치가 눈에 띄게 성장하였고, 움직임이 과격해졌다. 온라인 수업을 하면서 학교에 많이 등교하지 않았을 때에 비해 많이 친해져서일까. 특히 한창 에너지가 샘솟는 사춘기 남학생들이라 스스로가 제어되지 않는 부분들이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잔소리를 해봤자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반복되면 지겹고, 아이들에게 먹히는 것도 순간이다. 이참에 잘됐다 싶었다. 잔소리를 랩으로 해보자!


나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지만 랩을 시작했다. 유튜브에서 찾은 무료 비트가 티브이에서 흘러나오자 아이들은 당황했다. 일부는 킥킥댔다. 우리 선생님이 지금 뭐하려는 거지? 설마?


“지금 너희들은 정상이 아니야. 테스토스테론! 테스토스테론! 바로 그 호르몬이 너희를 정상이 아니게 만들지. 지금 여기서 가만히 앉아 조용히 있고 싶다면, 아마 그게 정상이 아닐 거야. 테스토스테론! 테스토스테론! 그건 여자들에게도 있지. 하지만 여자는 아주 조금. 남자는 90프로.”


이런 식으로 랩을 했다. 물론 엉망진창 랩이었다. 라임이고 뭐고 하나도 맞는 게 없었다. 대놓고 웃는 아이들, 웃음을 참는 아이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아이들. 뭐가 됐든 아이들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의 의도를 알아들었다. 그리고 덧붙여서 설명했다. 에너지를 분출하고 싶은 것은 이해하지만 이곳은 좁은 교실이고, 남학생들만 있는 건 아니라고., 여학생들과 선생님이 함께 있는 곳이니 자제를 부탁한다고 했다. 그리고 아침에 학교 오기 전에 운동을 하면서 에너지를 좀 분출하고 오라고 했다. 달리기든 뭐든 하면서 말이다. 아이들의 집중도는 최고조에 달했기에, 특히 남학생들은 내 말에 바로 수긍했다.


나 : 선생님 랩 어때? 잘했어?
아이들 : 아니요~ 이상했어요!
나 : 인정. 그래도 내가 무슨 말하고 싶은지는 알겠지?
아이들 : 네에!
나 : 보는 너희들이 민망했지?ㅎㅎ 근데, 난 괜찮았어. 그러니 일단 랩을 써보자! 어때?


아이들은 나의 의도를 알아들었다. 중요한 건 랩 실력이 아니라 랩에 담으려고 했던 메시지였다. 거지 같은 나의 랩에도 아이들은 그 메시지를 알아들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아이들도 그 정도만 해주길 바랐다. 내가 <싸이퍼> 영상을 촬영하면서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바로 그거였다. 말은 하자는 . 싸워야 싸울 있어야 한다는 . 이번 학예회를 통해서 아이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말들을 했으면 좋겠다는 나의 취지였다. 그리고 내가 직접 해보니 또 알 수 있었다. 처음 시작이 어렵지 아무렇게나 하고 보니 그럭저럭 할만했다. 민망함은 보는 사람의 몫이었다. 본인은 시작할 배짱만 있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아이들은 조금 더 연습과 독려가 필요할 것이지만 말이다.




아이들에게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이 전부는 아니다. 가능성이 실제가 되려면 행동이 필요했다. 내가 해 주어야 하는 일은 그것을 어떻게 이루어갈 수 있는지 실천방법을 알려주고 독려하는 것이다. 가능성을 믿고 꿈을 가져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제시하고 직접 도전할 수 있도록 단계적으로 알려주는 것 말이다. 우선 아이들과 가사 쓰기를 해야겠다. 라임을 맞추고 비트를 찾는 건 다음이다. 먼저 가사를 쓸 수 있도록 주제를 정하고 대상을 정해줄 것이다. 가사를 쓰면 다시 고쳐쓸 수 있도록 검사하고, 수정해 나갈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단계적으로 해 나가는 과정에서 아이들이 직접 행동하며 배워가는 것이 있기를 바란다. 결과물이 어떻든 잘하든 못하든 본인들이 직접 해보면서 겪어가는 이 모든 과정이 그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 작은 경험이 되기를 바란다. 아이들의 랩 경연대회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